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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나를 사랑한 사람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쟁기자국을 남긴다”
  • 전순란
  • 등록 2016-05-04 10:24:41
  • 수정 2016-05-04 10: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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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3일 화요일, 비와 바람


휴천재 양편 언덕 소나무 숲이 성난 황소떼처럼 바람소리에 울부짖는다. 3층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도 덩달아 그 황소 목에 매달린 큰 방울처럼 종일 쉬지 않고 울려댄다. 휴천강에서 울려오는 물소리도 숲의 아우성에 질세라 삿대질을 하며 무섭게 고함을 질러댄다. 자연의 거친 함성에 숨죽이며 내가 천벌 받을 일 있나 스스로 살핀다. 오늘처럼 피곤한 날 일기 쓰기에는 저 소음이 잠을 깨우는 죽비다.




간밤에 비가 온다 해서 행여 손님들 추울세라 방에 불을 지폈더니 밤새 더워서 못 잤다며 지리산의 밤을 뜬눈으로 지켰다는 일꾼들에게 맛난 아침을 준비했다. 어제 밤이나 이른 새벽에 서울로 떠나겠다던 상희 언니가 아래층 욕실에서 냉수만 나오는 줄 모르고 샤워를 하고는 너무 추워서 집밖으로까지 나갔다 그대론 안 되겠다고 다시 들어와서 식탁에 앉았다. “벗들이 먼 데서 와서” 일용할 양식을 같이 나누는 식탁은 언제나 기쁘다.


상희 언니가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으니 당연 학교 다닐 때 얘기가 주를 이루고 그때 자기와 사귀던 남자의 얘기가 나오고, 오래오래 자기를 잊지 못해 방황하더라고, 제발 결혼하시라고 내게도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한 후에야 떠났다고, 그리고 지금도 만나면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심지어 자기 딸과 언니 아들을 결혼시키자고 청혼하더라고 ‘옛이야기’를 풀어갔다. 오래오래 그 얘기를 들어주던 보스코가 임보 시인의 「아내의 전성시대」라는 시를 찾아 읽어 주자 일행은 박장대소하고 언니는 심쿵한 얼굴로 얘기를 끝냈다.



여자들에게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추억이 더 기억에 남는데 남자들은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기억이 더 절절 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보스코에게 물었더니 “나를 사랑한 사람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마음에 더 깊숙한 쟁기자국을 남긴다”는 퍽 시적인 대답을 한다.


아침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도 비가 그칠 생각을 않아 ‘산청한방박물관’을 관람하기로 떠났다. 월요일이고 비도 와서 사람이 없어 우리 팀 열 명이 그야말로 박물관을 ‘접수’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남편이나 가족의 건강에 관심이 커서 흥미롭게들 구경했다. 여인들이어서 역시 남편의 건강이 가장 큰 염려였다.



선희가 어제 저녁은 ‘대사관저의 이탈리아식 만찬’을 먹었고, 아침은 푸짐한 ‘미국식 조찬’이었다고 해서, 점심은 약초의 고장 산청답게 미루가 예약해준 약초식당에서 ‘약초정식’을 먹었다. “언니, 저녁은 돼지고기 삼겹살이나 구워먹고 아침엔 남은 고기로 김치찌개나 해먹읍시다.”하던 유근숙 목사가 하는 말, “그래도 집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남편이 끓여준 김치찌개가 최고더라!” 역시 사람은 자신 입에 길들여진 음식이 제일 맛있다. 대사부인들이 하던 얘기처럼, 남편이 타국대사관의 성대한 만찬에 다녀와서는 라면을 끓이라며 김치에 곁들여 꿀맛으로 먹는다든가, 자신도 관저에 돌아와 열무김치와 참기름으로 비벼 양푼째 놓고 먹노라던 말도 같은 얘기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내려 뱀사골 가는 시간도 늦출 겸 ‘함양산청추모공원’을 참배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얼마나 잔혹했는지 치를 떨며 관람하고, 월남을 다녀온 한국염 목사가, 월남에서 한국군이 지나간 마을마다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국군에게서 돈벌이를 했던 여인들이 저녁이면 지폐를 다리미로 다리면서 가족과 자식들에게 한국군의 만행을 잊지 않게 깨우쳐 주었다는 말도 그곳 여인들에게서 들었단다. 친일 반민족 기득권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군대도 경찰도 공안당국도 한낱 국민을 학살하는 병기일 따름이라는 게 보스코가 탄식하는 해방 후 70년 남한의 역사다.


지리산 쪽으로 가는 길에 빗줄기가 굵어지고 돌풍이 불어닥쳐 벽송사 옆 서암의 석굴을 둘러본 일행은 실상사도 지리산 뱀사골도 다음으로 미루고 서울로 서둘러 떠났다. 여인네들의 모처럼 1박 2일 지리산 방문은 아쉽게도 이렇게 끝났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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