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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왕인 박사께서 그토록 가르쳤는데도 쟤들은 왜 저 모양이래?”
  • 전순란
  • 등록 2016-04-25 09: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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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4일 일요일 맑음.


‘내 칭고’가 아침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맛있는 아침을 내주는 ‘칭고’의 손을 바라보며 “정말 저 친구와 긴 시간을 함께 했구나!” 생각했다. 로마에서 80년대 초를 함께 보내며, 서울과 인천 정도의 짧지 않은 거리를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오가며 살았다. 길이 멀어 ‘두 끼 밥은 먹어야 기름값이 빠진다’는 핑계로 늘 붙어살다시피 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시절 워낙 오지랖 넓은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고, 좋은 게 있으면 내가 눈독을 들여 기어이 빼앗아 갔다고, 아까운 걸 뺏기고 나서 보면 내가 즉시 남을 줘버려 더 아깝더라고, 나만 보면 ‘에그. 웬수!’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며칠 못 보면 ‘보고자퍼 못 살겠더라’고 애정 어린 타박을 한다.



오늘은 보좌신부 영명축일 축하곡을 연습한다고(그니는 성가대원) 먼저 성당에 갔고 우리는 30분후에 성당엘 갔다. 옥암동성당 주임 이영헌 신부님은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한 분으로 보스코의 살레시오 후배(7회)여서 우릴 반가이 맞아주었다. 찬성이 서방님과는 동창이어서 학교 다닐 때 찬성이 서방님이 기숙사에서 얼마나 고약한 성미였는지 누군가 맘에 안 들면 기어이 끝장을 내던 '곤조'였다고 회고하였다.


보스코의 기억으로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둘째 준이서방님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순둥이 준이서방님이 못된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동생인 찬성이서방님이 죽도록 맞아도 끝까지 덤비는 바람에 큰애들이 지겨워서라도 준이서방님을 못 건들이게 했단다. 



우리 신혼시절 반년은 찬성이, 훈이 두 도련님이 살던 상하방으로 우리가 끼어들어가서 사는 옹색한 살림이었는데, 찬성이 서방님의 ‘곤조’는 여전히 살아있어서 성깔이 어지간한 나와 걸핏하면 티격태격했다. 그러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2년여를 옥살이하고 나온 뒤로는 가만히 앉아 수백 권의 책을 번역을 해내는 번역작가로 변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맏형 보스코와 더불어 가톨릭 유명인사가 되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는 보좌 정비오 신부님은 부친(정영복)이 보스코의 중학교 동창으로 오랫동안 완도 섬지방의 공소회장과 선교사를 했던 분이다. 딸 셋 다음에 태어난 외아들이지만 사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간혹 보스코에게 털어놓았다는데 그 아들이 이렇게 착하고 훌륭한 사제가 되었고 60여 년 전의 동창의 앳된 얼굴을 젊은 사제에게서 보는 보스코의 감격도 컸다.



미사 후에는 가까운 식당에서 본당 식구들이 축하오찬을 하는 자리에 우리도 함께 초대받아 맛있는 회 정식을 먹었다. 바닷가에 왔으면서도 회를 못 먹고 산으로 돌아가나 서운하던 차에 이렇게 성찬을 받고 가게 되다니...


점심 후 ‘내 칭고’는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하고 섬사람들에게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운 ‘왕인 박사(王仁博士)’ 탄생 유적지를 안내해 주었다. 월출산 자락에 널따란 땅을 다듬어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할 만한 시설을 만들고 박물관과 사당을 마련한 문화복구사업이 대단했다. 특히 수석박물관이 볼만했다. 



한·중·일 세 나라 서예가들이 한자씩 적어남겼다는 천자문 비석 



백제시대 32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사회에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게 한 인물의 거창한 유적지를 돌아보다 “왕인 박사께서 그토록 가르쳤는데도 쟤들(일본사람들)은 왜 여태 저 모양이래?”라는 내 뜬금없는 물음에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나마 저만큼이겠지”라는 리타의 슬기로운 대꾸가 나왔다.



리타와 헤어져 지리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니가 ‘강추’하는 순천 ‘낙안읍성(樂安邑城)’에 들렀다. 고려 때부터 있던 읍성으로 1908년까지 존속했던 낙안군의 중심지로 임경업장군이 쌓았다는 성곽과 성안이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보스코는 들 가운데 성벽이 축조되고 더구나 해자(垓字)까지 둘러쳐진 유적에 퍽 놀란 듯하다. 


전통 초가지붕을 한 집들이 정겹게 자리 잡고 고샅마다 돌담으로 꾸며져 있고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 용인 민속촌보다 더 조용하고 친근했다. 동네 구경을 다하고 ‘객주집’에서 칼국수 한 그릇씩 먹고 나니 저녁 7시. 그곳을 떠나 2박 3일의 ‘생일여행’을 마치고 휴천재에 돌아온 시각이 9시 정각! (일주일에 주말에 한 번 보는) 연속극을 틀어놓고 낙안에서 떨이로 사온 딸기로 (잼을 담기로) 꼭지를 따는 중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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