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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감동 먹고 학꽁치 먹고 감격 먹고 감탄 먹고
  • 전순란
  • 등록 2016-04-20 10:11:01
  • 수정 2016-04-20 10: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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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9일 화요일, 맑음


요즘 지리산 기슭에서는 나무의 새순을 꺾어서 밥상에 올리는 가짓수가 참 많다. 아직 두릅은 좀 이르지만 엄나무, 가죽나무, 옻나무에서 한여름이면 커다랗게 그늘을 드리울 가지로 자랄 새순이 데쳐져 접시에 얌전히 담겨 밥상위에 올라온 걸 보면 십여 년 후면 멋진 청년이 되어있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가를 어떻게 하는 것 같아 먹기도 죄송하다.



이장님이 논가에서 며칠 걸려 못자리판을 마련하여 볍씨를 뿌리느라 정성을 다하고 있다. 모판에 팥거피 가루 같은 황토를 체 쳐서 깔고, 고무양푼에 붉은 약을 타서 며칠 담갔던 볍씨를 뿌리고, 그 위에 다시 황토를 덮는다.


모내기는 시골의 바쁘고도 아름다운 절기였다. 모를 쪄서(뽑아서) 단으로 묶어 나르고, 못줄을 잡고, 못줄에 붉은 끈으로 간격을 표시해 놓고 남녀가 주욱 한 줄로 서서 모심기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저렇게 모판을 해서 키우다 모판째 들어 올려 콤바인에 싣고 논으로 간다. 모심는 날엔 못밥을 얻어 먹으러 다녔고 논 두럭에서 얻어먹는 벌겋게 끓인 돼지고기찌개나 고등어자반은 꿀맛이었지만 기계가 한 나절에 다 해주는 지금은 그런 낭만도 추억도 없다.


이장님네 부부의 모판작업을 구경하고 있는데 남해 파스칼 형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해 첫 학꽁치가 나왔으니 회로도 먹고 초밥도 해 먹자며 지리산으로 오겠단다. 산속에서 내가 준비할 것은 가죽나무 순(뒤란의 나무가 너무 웃자라 아예 보스코가 가지째 잘랐다, 내년에도 그냥 손을 뻗어 순을 딸 수 있게)을 따서 데치고 텃밭의 방풍과 참나물과 부추들 꺾어 나물과 겉절이를 하고, 곰취를 따다 쌈을 준비하는 일이다. 달래도 캐다 된장찌개를 해야지... 텃밭으로 달려 내려가 낫을 날려 나물꺼리를 마련하고 부엌으로 달려와 다듬고 씻고 데치고 무치고... 어제 김치동 교수가 전화에서 나더러 ‘지리산 하이디’라 했는데 아직도 산속에서 육순 나이에 뛰어다니는 여자라고 놀리는 말 같다. 



산청에 들러 ‘귀요미' 미루를 싣고 도착한 형부는 휴천재에 들어서자마자 자해공갈단이나 소지할 법한 날렵한 면도날을 꺼내더니만 능숙하게 학꽁치의 뼈를 발라내고, 언니는 비늘을 긁어 남편을 돕는 환상의 회치기 콤비를 연출했다.



귀요미는 식당에서 부엌으로 난 창에 서서 ‘포토존’을 외치며 찰깍찰깍. 보스코와 미루에게 달래 다듬는 숙제를 줬더니만 둘은 일에 열중하지 않고 불량하게 커피까지 마시며 낄낄거리고... 어떻든 손이 열 개여서 점심 준비는 30분도 안 걸렸다.


새로 나온 학꽁치를 우리에게 먹이겠다고 남해에서 그 먼 길을 달려온 형부네 지성에 회보다 먼저 감동을 먹었고, 맛난 학꽁치 회와 전어 무침을 그 다음에 먹었고, 스물네시간 종편방송만 틀어놓고 사는 남해 바닷가의 노인들이 박근혜 대신 안철수를 찍더라는 선거 얘기에 감탄까지 먹고, 형부가 그동안 속 끓이던 본당신부가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졌다는 말에 감격까지 먹었다!




사제들은 역시 바탕이 착한 사람들이어서 본인이 작심하면 크게 바뀔 수 있고, 고약한 성미나 미숙함은, 보스코 말마따나 ‘쌀 속의 뉘만큼’ 드물고, 한 본당에서의 아픈 경험이 평생에 영향을 미쳐 좋은 사제 생활을 하게 될 테니까 신자들은 본당신부 험담보다는 ‘사제를 위한 기도’에다 시간을  더 내고 본인에게 충고를 드릴만한 용기가 더 필요하다는 게 이 ‘무식한 프로테스탄트’의 생각이다.



형부네와 미루가 세 시경 떠나고서 얼마 뒤 휴천면 여자면장님과 직원 두 명이 옆을 지나가다 휴천재를 방문했다. 예전엔 동네에서 면장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여자면장님이어서 섬세한 발걸음으로 동네와 면민들을 자상히 보살피는 듯하다. 커피를 한 잔씩 하고 집을 둘러보고서 일행이 떠났다.


늦게까지 못자리를 하는 이장님네에 새참을 내가니 “하루 종일 손님을 받으면서 우리까지 챙기냐?”고 묻는다. “내 눈에 가장 가까이 보이는 사람이 이장님 부분데 내가 제일 잘 지내야 할 사람도 이장님네죠” 앞산의 산벚도 그새 지고 연초록 숲들이 벌써 진초록으로 바꿔 입을 채비다. 모처럼 황사 없이 맑은 하루여서 이 밤도 온달로 커가는 달빛이 대낮처럼 밝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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