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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성씨 집안의 ‘송양사(松陽祠)’ 제사
  • 전순란
  • 등록 2016-04-18 09: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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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7일 일요일, 맑음


전라도 말 중에 애교 섞인 욕이 많은데 ‘뭐야?’ 하는 뜻으로 ‘지랄하네!’와 ‘염병하네!’, 이말 저말 되는대로 지껄이면 ‘연설하고 자빠졌네!’가 각별히 귀에 들어온다. 서울 여자로서 광주에서 신혼 초 3년을 지낸 세월에는 말끝마다 욕설이 애교처럼 붙는 그곳 언어문화에 적응이 안 되고, 그런 욕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너무 화기애애해서 어리둥절하곤 했다.


그러나 광주 남자(그는 거의 사투리를 쓰지 않지만) 곁에서 40년을 살다보니, 더구나 ‘내 칭고’ 리타에게 억세게 ‘전라도사투리 듣기' 훈련을 받다보니 내게도 그 말들이 찐한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됐다. 미운 데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에게 건네는 ‘썩을 놈’도 그렇다. 더구나 잡지 「전라도 닷컴」에 맛을 들이면서 입에 붙은 욕설들에 담긴 따스한 연대의식도 익히게 됐다.




얼마 전 서울 가는 길에 우리 동네 유영감님을 함양읍까지 태워간 일이 있었다. 어딜 가냐고 물러오시기에 “남편이 연설하러 서울 간다”니까 혼자 낄낄 웃으신다. 왜 웃냐니까, 이웃마을에 당신의 갑장 친구가 있단다. 마누라가 얌전해, 남편이 한복을 대령하라면 한복을, 양복을 대령하라면 양복을 잘 손질하여 내놓는데 그때마다 멋지게 차려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어딜 가냐는 인사말에는 으레 “서울에 연설하러간다”고 했단다. “지가 무슨 연설은. 그냥 옷 뻗치고 입고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 우리가 모를 줄 알고?”라고 수군거리던 생각이 나서 웃었노라는 유영감님의 변명. 근년에 사방으로 강연을 다니는 보스코를 차로 모셔갈 적마다 “연설하고 자빠졌네”라는 전라도 말에다 이제는 백연 사는 그 영감님의 자랑까지 떠올라 나 혼자 웃곤 한다.





오늘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라는 곳의 선영에 세워진 ‘송양사(松陽祠)’라는 사당까지 가서 시제와 종회행사에 참석하는 보스코를 태우고 아침 일찍 지리산을 떠났다. 성씨 집안의 6대조 문효공(文孝公) 사달(士達)이라는 선조부터 14대조까지 위패를 모시는 사당에서 고창의 유림들이 항교제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지사공파(知事公派)가 주관하는 행사에 경향 각지에서 정장을 하고 모인 100여명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7, 80대 노인들이다. 건물 세 채에 높다란 담장이 둘러쳐진 사당 주변을 둘러보니 한때는 멋진 건물이었을텐데 이젠 낡고 바랜 단청이 쇠퇴해 가는 종친들의 소홀한 관계와 뿌리에 대한 회귀를 구하기에는 너무 바삐 사는 젊은 세대들임을 얘기해준다.




제복을 갖춰 입은 향교 제관들이 두어 시간 정통 유교식 제사를 올리는 동안, 비각 안에는 얼씬도 못하는 여자들은 제각 관리인의 허물어져가는 집 옆에 가져다 놓은 콘테이너 박스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 성씨냐고 묻기에 아니랬더니 여자들이 섭한 표정이다. "성씨집에 시집와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니 진짜 유공자는 우리 며느리들이죠!"라고 응수하니까 오라버니들을 따라 왔다는 성씨집안 딸들이 입이 비쭉 나온다. 얼른 "시집가서도 친정 시제를 찾아오니 기특하네요!"라는 말로 다독여주었다.


제사가 끝나고 뷔페 식사를 시작하는데 참석자들을 문중별로 소개하고 종중회장, 문중회장마다 한마디씩 ‘연설을 하는’ 바람에 우리 여자들은 지겨워 ‘자빠질’ 뻔했다. 26대손인 보스코는 15대에서 갈라져나간 삼서(森西)의 진명공파(震明公派) 소속이다. 엊그제 문중회장직을 내놓았지만 최근에 벼슬(대사)을 높이 한 인사여서 그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 해야만 했다.



여흥과 사회를 위해 각설이도 불렀고 가수도 왔는데, 성삼문의 반역 이후로 벼슬을 별로 못하고 주로 학자들로만 풀린 성씨 집안 내력인지 도무지 흥미를 안 보여 각설이도 가수도 일찌감치 작파하고 말았다. 이런 자리일수록 서둘러 자리를 뜨는 보스코를 얼른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담양에 사는 ‘성삼의 딸들’ 수녀원에 들렀다. 담양 불태산과 병풍산이 만나는 발치에 어렵사리 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얻은 수녀님들의 살뜰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늘 저녁은 함양본당에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이 우리 문정공소에 처음 오시는 저녁미사다. 전임신부의 심술로, 지난 3년간 한 달에 한 번 하는 공소미사가 폐지되어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신자들은 새로 오신 신부님의 겸손하고 조용한 모습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한 사제가 신자 공동체에 일치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양떼를 흩어버릴 수도 있음이 한 눈에 보인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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