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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국민이 돌 한 개 한 개 쌓아 이루는 정치라야...
  • 전순란
  • 등록 2016-04-15 10: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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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4일 목요일, 맑음


한 밤을 자고 일어나보니 내가 백만장자가 되어 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느낀 기분에 맞는 비유일까? 적어도 국민의 곤고한 처지, 일자리없는 청년들과 가난한 약자들에게 뭔가 풀릴 듯해서라도 말이다. 어제만도 거의 자포자기상태에서 5시 40분에야 면사무소로 투표를 하러 갈만큼 기운이 빠져 있었는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나올 만하다.


아침에 득달같이 걸려온 말남씨 전화. “오세훈 이재호 떨어진 거 봤제?” 우이동 그린파크 자리에 자연을 훼손한 대형 콘도를 지어놓게 손 쓴 장본인들(서울시장, 강북구청장, 그리고 정치인들)이 그곳 무당터의 저주를 받아 하나씩 귀신에게 붙잡혀간다는 설명이다. 서울시민 모두 누리다 자손만대 물려줘야 할 북한산 절경을 파헤쳐 괴물 같은 건물을 십여채 들여지은 자들에게 십여년 맞서 싸워온 여인의 저주다.


우리의 반항이 하도 끈질기니까 쌍용이 공사에서 손을 떼고, 몇차례의 부도를 거쳐 지금은 ‘우이동 귀곡산장(鬼谷山莊)’ 흉물스러운 시설로 남아 있다. 중국 돈줄의 호텔업자들 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시가 매입하여 청소년 시설이나 국제회의장으로 이용하라고 보스코가 수차례 박원순 시장을 면담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새벽에 아들한테서 탄자니아로부터 건네온 카톡. “어무이, 아부지, 간만에 발 쭉 뻗고 편히 주무셨어요? 아님 넘 흥분돼서 밤 새셨나요?” 아빠의 별난 나라사랑 땜에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가서도 아빠 걱정을 하는 아들.


1997년말이었다. 안식년으로 로마에 가 있던 우리는 대선에 투표해야 한다면서 한국까지 와서 투표를 하고 돌아갔는데 로마공항에서 출구조사와 개표 초기에 야당후보가 젔다는 소식을 듣고서 지옥 같은 밤을 지새고 있었다. 그날밤 런던에 있던 빵기한테서 자정 넘어 전화가 왔다. “엄마 아빠 축하드려요. 김대중씨가 역전하고 있네요.” 그 전활 받고서 발뻗고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20년 지나서도 어젯밤 탄자니아에서 문자가 온 것이다. ‘엄빠’(엄마 + 아빠: 우린 두 아들을 ‘빵괴’[빵기 +빵고]라 부른다)가 정치문제에 좀 별나긴 하지만 작은아들도 부활절 임시사목지 밀라노에서 보낸 편지에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사회에서 정의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임을 절감할수록 그런 모습을 분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내고 계시는 부모님”이라고 봐주는 게 고마웠다. 막내서방님도 오늘 형님에게 축하전화를 해왔다.




소담정 도미니카가 오후에 우리집 TV를 보려고 올라왔다. TV도 컴퓨터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이 기도와 관상으로만 사는 그니가 어제 초저녁의 출구조사만 우리에게서 전화로 듣고 (출구조사가 거꾸로 결과를 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또 졌나보다!”하고 속상해 잠들었더란다.


그런데 아침에 성심원 새벽미사에 갔더니만 수사님, 수녀님들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영 생기가 없더라나? 총선 패배 때문이려니 했는데 웬걸, 야당이 이겨서 밤새 TV를 보느라 밤잠을 설친 결과였다나?


대부분의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들은 박근혜 정권의 오만방자함과 기득권 위주의 정책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차여서 이번 선거결과를 모두 반기는 태세다. 시국관이 같은 사람이 가까이 있어 서로 위로를 하거나 일상사에서도 희비애락을 나눌 수 있다는 게 큰 힘이 된다.


어제 ‘농땡이’들과 ‘빈둥’ 친구들이 실어다 준 돌로 휴천재 입구에 오늘 꽃담을 쌓았다. 오전에는 왼쪽을, 점심 먹고서는 오른쪽을 쌓아올렸다. 보스코는 영 감각이 없는 사람이어서(그는 어렸을 적 미술시간 성적표에 늘 美[‘아름다울’ 美, 하지만 秀優美良可의 美, 요새로 말하C 학점]를 받아온 사람이어서 내 곁에 얼씬도 않고 그냥 내게 맡겨 놓는다. 그대신 틈틈이 서재에서 내려와 잔디밭의 자잘한 잡초들을 뽑고, 남은 돌을 치워날랐다.




길옆에서 논에 못자리낼 모판을 준비하던 이장님이 “사모님께 석공자격증을 드려야겠네요.”라며 웃는다. 삐툴빠툴 우습게 보여도 내 손으로 쌓아올린 게 나 스스로 대견하다. 나라일도 국민들이 올바른 투표로 돌 한 개 한 개를 쌓아 이루는 정치라야 올바르고 정의롭다는 이치를 절감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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