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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은 뭘까?
  • 전순란
  • 등록 2016-04-13 11:10:26
  • 수정 2016-04-13 1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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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1일 월요일, 맑음


아차차! 치과 가겠다고 약속 했었는데 깜빡 했다. 보스코가 치과에 간다면 내가 꼭 기억해 두었다 그를 데리고 가서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려 데리고 오는데... 내 사정은 보스코는커녕 나마저 잊고 넘어갈 때가 많다.


몇 년 전 대상포진을 앓던 중 배가 너무 아파 직접 차를 몰고 한일병원 응급실에 갔더니만 급성 맹장이라고, 그대로 터지면 복막염이 되기 십상이라는 얘기에 그만 그 병원 수간호원이던 ‘천주 엄마’의 도움으로 우선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한 후에야 남편이자 보호자라는 보스코에게 연락을 한 적 있다. 퇴원해서 집으로 갈 때도 내가 직접 운전을 해갔고, 함양에서 받은 백내장 수술도 혼자 가서 혼자 하고 외눈으로 차를 몰고 왔다.



오늘은 보스코가 내가 데려갈까? 하고 묻는데 피식 웃고는 그냥 혼자 집을 나섰다. 내가 나를 건사하는 데는 이미 40여년의 이력이 쌓였고, 유일한 걱정이라면 나 없이는 아무것도 스스로 건사 못하는 그를 두고 먼저 떠나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다. 내 나이가 한참(여덟 살) 어리고, 여자의 평균 수명이 남자보다 길다는 확률이 일단 안도감을 주지만...


어제 친구 아들을 어떤 처녀에게 중매차 소개했는데 모든 게 좋은데 신랑 나이가 아홉 살이나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는 여자 측 답변. 키도 따진다.


사랑을 ‘먼저’ 하게 되면 모든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조건’을 갖춰놓고 사랑하기로 하면 온갖 잡음이 난다. 필요조건이 모두 갖추어진다고 꼭 사랑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주변에서 조건을 제법 맞춰 결혼을 시켰는데 얼마 안지나 이혼하는 젊은 커플들을 보면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이란 온갖 조건을 뛰어넘어 사랑하겠다는 저 눈먼 서약과 그 서약을 지탱하는 눈먼 사랑뿐이겠다. "눈먼 사랑만이 상대방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게 보스코의 지론이다. 



오후 3시에 친구를 찾아갔다. 1년 전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의 1년간 코마 상태로 있다가 한 달 전에 깨어난 루치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기에 나 빵기 엄마야. 알겠어요? 했더니 성염 교수님 부인이라고 대답한다. 며칠 전부터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의사의 귀뜸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이렇게나 아픈데도 남편이 안 찾아온다며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달라는 그니의 부탁에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당신 남편은 15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하니까 “그럼 노상객사?”라고 되묻는다. “아니? 아파서 죽었고 성당에서 영결미사 잘하고 선산에 잘 모셨잖아요?” 하니까 “혼자서 외롭겠다”라고 혼잣말을 한다. “제일 가까운 친구도 죽어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둘이 행복하게 함께 지낼 거에요. 나도 당신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 그곳에서 만나 옛날처럼 재미있게 살자구요” 하니 적이 안심한다는 표정이다.


조금 뒤 그니가 20여년 일해 온 회사 친구 둘이 문병 왔는데 전혀 못 알아본다. 아마 그 이전의 먼 기억은 떠오른데 그 이후의 일은 아직 기억의 세계로 못 돌아오는 듯하다. 또 10일 전에 문병온 친구들은 기억 못하지만 닷새 전의 일은 알고 있다. 오늘 날짜가 언제인가 묻기에 일러주니 “왜 선생님이 자꾸 옛날 얘기만 하나?”라고 묻기에 “지난 1년간 당신이 코마상태에 있다가 한 달 전에 깨어났다.”니까 “그 말도 처음 듣네.” 한다. “우리 아들이 너무 고생해요.”라는 탄식도 나온다. 한 해 꼬박 엄마를 보살핀 아들은 날마다 며느리와 손주까지 데리고 엄마를 찾아뵙는 효자다.








7시에 광화문으로 세월호 2주기 미사에 갔다. 세월이 가도 가족의 고통에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미사를 드리는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 모두가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이 이디 있느냐?”라는 하느님의 경고를 듣는 듯하다. 우리가 함께 있겠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맹세 드렸다. 


내 친구 상옥씨도 만났고 여러 페친들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타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저 많은 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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