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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뼈와 내 살로 엮어낸 내 최고의 걸작
  • 전순란
  • 등록 2016-03-28 10:4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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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6일 토요일 맑음


우리 독서회에 어느 친구가 들어왔는데 2년여 좀 흔들린다 싶었지만 워낙 착한 사람이어서 그대로라도 함께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어제 밤 자기는 ‘논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그 시간과 겹쳐서 부득이 이 활동을 접는다며 채팅방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언제나 사람은 오고 온 사람은 떠난다. 그래도 올 때는 몰라도 떠날 때는 늘 가슴이 아프다. 떠난 사람도 상처가 있을지 모르나 남은 사람도 정든 사람을 떠나보낸 상처를 어루만져야 하므로 상처받을 게 두려워 아예 마음을 꼭꼭 빗장질하는 경우도 있다. 그 친구가 오롯이 자기 입으로 말한 이유로만 떠났고 그 이유가 없어지면 돌아오기 기다려진다.



점심을 먹고 함양 상립에서 토요일마다 열린다는 ‘프리마켓’에 갔다. 얼마 전부터 고미자씨가 한번 와 보라는 초대가 있어서 갔는데 7개의 가게가 고만고만한 어깨를 맞대고 고만고만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꽃과 나무 모종, 블루베리 효소와 감식초, 감 말랭이와 곶감. 된장과 고추장, 표고버섯, 야생 하수오, 옻 껍질, 우리밀 효모빵, 유정란... 시골에 들어와 나름 만들어낸 물건들을 유통시킬 수단이 별로 없다보니 이렇게라도 소비자와의 만남을 마련했나본데 날씨가 풀렸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없어 장사꾼들끼리만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



다행히 희정씨와 기숙씨가 산보하러 삼림에 나왔기에 나는 그니들과 어울려 상림을 한 바퀴 돌았다. 기숙씨도 예전엔 독서회에 나오다가 일 땜에 못 나오는 중이다. 희정씨는 어제 혜진씨 미혜씨랑 동갑내기 셋이서 ‘서울 나들이’ 간 이야기로 신났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거지 소년 네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루벤스의 그림들! (우리 독서회의 다음번 책 「그림은 위로다」에 나오는 "성모승천"과 "십자가에서 내림") 마침 서울에서 루벤스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에 세 여자가 새벽차를 탔단다.


간 길에 강신주박사의 상담 강의까지 듣고, 책을 사서 사인도 받고, 그 유명인사와 ‘가족사진’도 찍고 왔단다. 밤11시에 차를 하고 함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30분이더란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런 문화 활동에 도통 관심 없는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그 먼 길을 하루에 강행군으로 마음의 양식을 챙긴 아우들이 기특하다. 강신주 박사도 고향 동네 아줌마들의 열광에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내게도 저런 열정이 아직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빵기가 일주일의 미국방문을 마치고 어제 돌아왔다며 시아, 시우 그리고 지선이랑 스카이프 통화를 했다. 두 놈이 어찌나 까부는지 정신이 없었지만 두 애의 맑은 웃음소리만으로도 하루가 해처럼 빛난다. 올 겨울에는 가족 모두가 한국여행을 계획한다니 이 봄 다음에 여름과 가을은 빼고 곧장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내 새끼"라는 말은 내 뼈와 내 살로 엮어낸 내 최고의 걸작이어서 누가 뭐래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저녁 8시 성심원 부활성야 미사에 갔다. 소담정 도메니카도 함께 갔다. 미루네 부부, 모세네 부부, 그리고 봉재언니도 함께 미사를 드렸다. 현관에서의 부활초 축성, 서로 촛불을 밝혀 들고 행렬, 그리고 유신부님의 의기만만 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부활찬가’가 울렸다. 장장 신구약 일곱 편으로 구세사를 회고하는 말씀의 전례에서는, 신자들이 대부분 노인에다 환우들이어서 3, 5, 7로 넘어갔고 전례의 여러 부분이 생략되었다.




성베드로 대성전의 3시간 넘던 부활전야 미사며 그때 함께 했던 많은 외교관 친구들도 보고 싶어졌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는 오늘 함께 했던 친구들도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리겠지....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다는 꿈! 주일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하는 신앙고백으로 그 꿈을 다짐하지만, 그토록 선하게, 인류를 깨우치려고 그토록 동분서주하던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았지만 그게 끝장이 아니었다고, 선과 진리, 정의와 염원은 살아남는다는 신념이 절반 넘는 인류에게 태생적으로 새겨져 있으니 그게 허상일 수는 없으리라. 


죽어서야 확인할 일이지만 성찬에 함께한 모든 사람이 계란을 두 알씩 챙겨 들고 밝은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빗줄기가 마른 땅 적시듯 우리 가슴도 아득한 행복이 촉촉이 젖어온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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