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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레에 마을 인심이 차고 넘친다"
  • 전순란
  • 등록 2016-03-11 12:15:30
  • 수정 2016-03-11 14: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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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0일 목요일, 맑음


간밤에 도착한 카톡 사진에 작은 손주 시우가 안경을 쓰고 있다. “웬 안경? 아범 꺼라도 썼나? 아닌데...” 내용인즉 애비를 닮아 난시가 심해 나이 다섯에 벌써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니! 앞으로 평생을 어찌할건가? “가엾어라, 내 새끼.” 보스코가 고1 때부터 안경을 썼다니까 할아버지 때부터의 대물림이다.



내가 할미가 되고 나니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귀하고 예쁘다. 오늘 임채우 시인이 보내온 시집(“토끼의 뽀얀 연분홍 발꿈치”)을 보니 그이도 손주를 보고 나서 나와 같은 맘이 샘솟나 보다. 아마 위층 아파트에 두 살짜리 꼬마가 살고 있나보다. 임시인의 마음쯤 되면 층간 소음으로 인한 불상사도 없으리라.


새털처럼 가벼운 아이가 뛰면 얼마나 뛴다고 염려 말고 열심히 뛰라고 하셔요.

쿵쿵쿵...

토끼 한 마리가 거실을 내 달린다.

멀리서 뇌성 치듯 아련히 들려오는

옥토끼 절구질 하는 소리

달덩이 같이 환한 얼굴이

초원인양 내달리는 기쁨이 있다.

콘크리트 벽 사이로

뽀얀 발뒤꿈치가 난타하는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라

내 몸에 키들키들 일어나는 것들

날개 같은 것 기쁨 같은 것

살아 있다는 느낌 같은 것         


(임채우, “토끼의 뽀얀 연분홍 발꿈치”)




8시도 안됐는데 목수 ‘무애’ 아저씨가 보일러실 지붕을 고치러 왔다. 뒤안에 있는 보일러실의 지붕이 내려앉아 물이 새면서 어지간히 애를 먹였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고쳐 주겠다고 말만 하더니 오늘 드뎌 일손을 만났나 보다!


그런데 무애 아저씨와 함께 온, 오늘 처음 본 ‘한비아빠’도 여러 해 전에 귀촌을 했다는데, 요즘 이 근처에서 가까이 보아온 젊은이들과 달리 내 맘에 썩 든다. 특히 귀촌을 하러 여러 해를 두고 아내를 설득해온 과정을 들어보니 참 인내롭고 슬기로운 남정네다. 무애 아저씨 역시 마치 조각을 하듯이(본직이 조각가다) 진지하게 일에 정성을 들여 믿음이 가고.



오전 간식, 점심, 오후 간식을 차려내면서도 기분이 좋다. 어떤 일이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한다는 일은 주부로서 참 흥겨운 일이다. 그들을 내게 소개해준 이웃사촌 도미니카씨도 같은 마음이리라. 그래서 다 함께 식탁에 앉아 점심을 나누었다.




오후에 드물댁이 찾아와 무가 필요하면 따라오라기에 내려갔더니만 어람댁이 커다란 상자 가득 담아준다. 겨우내 먹겠다고 구덩이에 묻었던 무들은 밭을 갈아 감자 놓을 무렵이 되면 모조리 캐서 나누고, 먹을 사람이 없으면 도랑가에 버려진다. 그러니 내가 농사지은 무를 누군가 먹어주면 되레 고마운 일이다. 엊그제도 보스코가 가동댁한테서 무를 얻어 왔지만, 드물댁의 열성이 고마워 오늘도 얻어 왔으니 하다못해 읍내 ‘빈둥’에라도 갖다 놓아 필요한 읍내 아낙들이 가져가게 할 생각이다.



동네 내려간 길에 냉이도 캐고 시금치와 씀바귀도 얻었다. 제동댁도 초석잠 심으라고 한 웅큼 주었다. 끌고 올라오는 밀차에 마을 인심이 차고 넘친다. 나도 오후 간식시간엔 호떡을 넉넉히 해서 유영감님과 드물댁에게도 간식으로 나누었다.



봄이 되니 땅도 녹고 이웃 사이에 오가던 길도 녹고 곱았던 손도 녹아 집집이 감자를 놓는다며 밭에 나와 꿈지럭거리는 걸 보고는 길가 매화도 신이 나서 활짝 웃는다. 점심 후에는 보스코까지 배밭에 내려가 배나무 밑에 괭이질을 하여 한 봉지씩 날라둔 퇴비를 뜯어 묻었다. 역시 봄은 땅으로 부터 불끈 솟아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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