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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치장과 입고 신는 명품과 아이들 과외비 자랑이 전부인 여자들
  • 전순란
  • 등록 2016-03-09 09:59:04
  • 수정 2016-03-09 12: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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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8일 화요일, 맑음


여보, 내가 라틴어를 잘해서 당신이 힘들어 하는 문장을 척척 해결해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감기로 고생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떤 문장에서는 몇 시간이나 끙끙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는 그를 보다 못해 내가 하는 말이다. 여보, 적당히 번역해요. 대한민국에서는 라틴어 번역에 관한 한 당신이 모르면 아무도 몰라요. 틀려도 모른다구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러니까 더 정확해야지. 란다.



그러다가 어떤 은퇴사제처럼(그 신부님은 심심한 끝에 국민학교를 겨우 나온 도우미 아줌마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더란다) 마누라인 나한테 라틴어 가르치겠다고 덤벼 둘 다 고생을 하는 건 아닐지....


감기기운인지 며칠 전부터 목이 아프다는 보스코더러 ‘선내과’에 가자 해도 시간 없다며 마다하더니, 목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지 12시가 다 돼서 병원가자며 자기발로 앞장선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는지 환자대기실엔 사람이 가득하다. 선내과 원장님은 아무리 환자가 많아도 환자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분이다. 손님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들이어서 몸보다 마음의 병이 더 깊은 처지임을 잘 알고 계신다.


점심 준비가 늦을 것 같아 ‘서당골’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들어갔는데 조그만 골방에 두 테이블이 있어 한 상을 차지하고 옆테이블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앉았다. ‘꼰대’로 불리는 노인들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종편방송에 세뇌된 보수꼴통들에다 귀가 잘 안 들리는 늙은이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밥맛이 뚝 떨어지곤 하는 까닭이다.


딴 여자들 흉을 봤지만 나는 꽃가게만 보면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만난 그 여자들은 정말 ‘밥맛’이었다. 밥먹을 때 제일 조용한 부류가 부부간이다. 할 말을 다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투로, 우리 얘기를 남이 듣는 걸 원치 않는 보스코로서는 남의 얘기도 가급적 안 들으려 하는 성미다. 그런데 두 여자는 시종 큰 소리로 몇 백만 원의 애들 과외, 몇 백만 원의 성형 수술, 친정식구 모셔가는 몇 백만원의 관광여행(시부모는 절대 안 된단다)얘기가 전부였다. 밥을 먹었는지 고문을 당했는지 정신도 없이 식당을 나왔다. 


저런 여자들이 한국 평균치의 중산층일까? 생각이란 게 전혀 없이 세계나 타인이나 사회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제 얼굴치장과 입고 신는 명품과 아이들 과외비 액수 자랑이 화제의 전부인 여자들이라니.... 그것도 강북에서!



3시 30분에 서울을 떠나 5시 30분에 원주에 도착했다. 원동성당에서 보스코의 강연이 있어서다. “자비의 희년과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제목이다. 민실비아와 교육담당 심신부님이 교구청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교구청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으로 ‘곤드레밥’을 대접하였다.


원주교구는 워낙 지학순 주교님 때부터 좋은 사제들이 곧바른 생각으로 사목을 하는 모범적인 교구이기에 평신도 중에도 민중 운동의 선구자들이 많이 나온 곳이다. 신도 한 분은 오랫동안 주교관 일을 돌보며 적은 월급으로 가난한 학생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봐 여러 명의 의사들을 길러내기도 했단다. 퇴직 후에도 70이 넘은 그분에게 교구청에서 일하며 함께 생활하도록 배려한다니 교구 역시 얼마나 인간적인가?


주위를 돌아보면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왜 나왔는지 알 만하다. 대구의 어느 사제가 성경을 사회복음의 빛으로 해설하여 가르치면 교우들이 죄다 실눈을 뜨고 구시렁거리는데,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가락으로 광주에 가서 강연했더니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더란다.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는 말씀을 하신 분의 심경을 이 나이에 와서 새삼 깨닫는다.


보스코는 오늘도 교황님이 선포하신 ‘자비의 해’에 개인의 신심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교회내의 사고방식은 얼마나 자비로운가(예를 들어 혼배조당에 걸린 교우의 영성체 허가), 그리고 지금의 북핵사태를 바라보는 신앙인의 눈은 얼마나 자비로운가를 일깨워가며 조용조용 청중을 설득해갔다. 그의 어조는 가랑비에 속옷 젖게 만드는 식으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가는 특성이 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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