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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2016년도 봉헌(축성)생활의 날 담화문
  • 편집국
  • 등록 2016-01-27 11: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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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평화와 선!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의 빛과 손길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삶을 환히 비추어주시고 어루만져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2014년 11월 30일(대림 제 1주일) 시작한 축성생활의 해를 이번 주님 봉헌축일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축성생활의 해를 마무리 짓는 시기를 즈음해서 지난 12월 8일에는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얼굴’이라는 회칙과 더불어 “하느님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축성생활을 살아가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는 물론이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의 삶에 특별한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해주시려는 교황님과 교회의 의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축성생활의 해를 시작하며 내신 교서를 통해 ‘수도생활’이 우리 교회의 믿음의 기초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봉헌(축성) 생활은 교회에 주어진 선물로, 고립되거나 소외된 실재가 아니고 교회에 온전히 속한 것입니다. 봉헌 생활은 그리스도인 소명의 내재적 본질과, 신부인 교회 전체가 한 분이신 신랑과 결합하려는 갈망을 표현하기에, 교회 사명의 핵심 요소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 생활은 ‘분명히 교회의 생활과 성덕에 속합니다.’(교회 헌장 44항).”(봉헌생활의 해 교서 III-5)


교황님께서는 이 교서에서 다음의 세 가지에 주안점을 두어 권고하셨습니다. 


첫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바라보십시오. 둘째, 열정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셋째, 희망으로 미래를 끌어안으십시오.


이 세 가지 권고는 다만 축성생활의 해, 한 해 동안만의 권고가 절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는 축성생활을 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물론이고 모든 복음이라는 그래스도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만나며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온 생애에 걸쳐 적용되어야 할 지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이 축성생활의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 자비의 희년’이 함께 중복되는 시기를 갖게 된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바로 이 세 가지의 권고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심오하고도 확신에 찬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하느님 자비의 체험은 한 개인의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체험이 자그만 가정공동체에서부터 시작해서 더 큰 단위의 공동체들, 즉 교회와 사회,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될 때 그 의미가 충만히 실현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는 비록 하느님의 자비가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통해 체험되는 것일지라도 이 자비를 체험한 개인이 홀로 이를 움켜쥔 채 고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반드시 우리 모두가 동병상련의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자비를 보여주게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끌어주는 은총(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무관한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관점에서 축성생활의 해를 마무리 짓는 시기에 두 달여간의 시간을 중복해서 ‘하느님 자비의 희년’을 갖는다는 데 커다란 의미를 두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모상은 우리의 육체나 다른 피조물들의 외형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을 믿을 수 있고, 여기에 기초를 두고 가치관을 정립해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을 통해 인간에게 기억력과 상상력을 부여해주셨습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기억력과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교감해 오십니다. 모든 존재 깊숙이 들어 있는 당신의 자취와 그 존재들을 통한 당신의 말씀을 듣게끔 해주는 것도 바로 이 기억력과 상상력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선물인 ‘기억력’과 ‘상상력’이 인간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양면의 현실을 살게끔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억력과 상상력은 세상의 참된 현실을 보게도 하고 허구의 현실을 보게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인간 선의 참된 규합과 연대, 협력의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기도 하는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 허구의 현실을 지어내고, 이 허구의 확신 속에서 혹독하고 잔인한 증오와 인격학대, 학살 등과 같은 지옥의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성과 인간성을 잃어가면서 우리는 허구적 현실을 더 강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한 힘을 내고 있고, 그래서 세상 이곳저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도약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시대, 즉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 혹은 후기현대주의)에서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현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상대주의와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와 거대기업의 가치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의 강력한 힘, 즉 어둠이 절대 빛을 이겨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빛조차 깨닫지 못한다(요한 1장 참조)는 절대적 확신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의 규합이 이루어내는 힘은 참으로 대단하고 파괴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선의 규합이 이루어내는 힘은 악의 규합이 이루어내는 힘을 논리적 계산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엄청난 생명력과 창조적인 힘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수도생활을 통해 이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연대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함께 함의 삶을 통해 세상의 어떤 악의 규합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힘입은 자비와 사랑의 연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 가치관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서서히, 그러면서도 확신 있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추구해온 세상적 가치에 의한 피해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더 이상 피해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고통에 참여하는 참된 승리자들이 되게끔 하기 위해 우리의 연대하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수도생활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수도회들의 현실 속에서 힘이 약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주님께로부터 자비를 입고 있고, 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충만한 생명력을 전달해 줄 힘이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봉헌생활의 해 교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함께 저는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 봉헌 생활의 종말이나 무의미함을 선포하는 비관주의적인 예언자들과 함께 하지 마십시오. 바오로 성인의 권유대로(로마 13,11-14 참조), 오히려 깨어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빛의 갑옷을 두르십시오.’ 언제나 주님을 믿으며 계속해서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I-3).


오래 전에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 어린 딸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길가에서 죽어가는 참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집에 들어와 이 참새를 치료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그 흔한 참새 한 마리가 뭐 그리 소중한가 하는 생각이 있었기도 했지만 어린 딸 안에 있는 그 사랑과 배려의 마음을 아름답게 지켜주고 싶어 그 참새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 거금(?)을 들여 치료를 해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참된 복음의 가치,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고 살게끔 하기 위해 우리의 세상적 논리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희생은 사실 희생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강력한 “내려놓음”인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인류 전체가 승리하는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패배하지 않습니다!


교황님께서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 중 하나임을 분명히 인식한 채 우리 서로에 대해, 모든 피조물에 대해 존경심과 배려의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를 향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들을 자신에게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주 하자고 초대합니다. “사랑합니다!” “좋습니다!” “가치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경이롭습니다!” “친절합니다!” “온유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등등...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말하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말뿐인 가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모상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인간성을 이야기하자는 것이고, 그래서 참된 하느님의 모상과 참된 인간성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의 창고에 어둠과 냉소, 미움과 경쟁심을 집어넣지 말고, 오히려 빛과 끌어안음, 사랑과 받들어줌의 신념들을 집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은 인간성의 가치를 드러내는 장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도생활은 참 현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보게 해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사랑의 연대와 끌어안음의 연대가 개개의 수도회 안팎으로 참으로 필요합니다.


교황님께서 봉헌생활의 해 교서에서 말씀하시듯이 이것은 “우리 수도회” 등과 같은 자그만 연대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여기서 머물러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경계를 벗어나 더 커다란 “우리”의 연대, ‘우주적’ 연대를 추구해가야 할 것입니다.


본래 올해는 병신년(丙申年)으로서 ‘붉은 원숭이의 해’라고 합니다만, 역학에서는 병화(丙火)가 태양에 비유되고 신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펼 신(伸)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자비의 해’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동양의 역학에서 얘기하는 한 해의 의미하고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태양”에 비유되시는 분이시기에 태양이 펼쳐지는 해라는 의미에서 이번 해는 주님의 자비가 참으로 우리 형제자매들 마음속 깊이 비추어지는 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병화신년(丙火伸年)”을 하느님 자비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이는 한해, 그래서 우리 수도생활과 그리스도교 삶이 참으로 자비롭게 쇄신되는 한 해로 삼기 위해 인내하는 기도 안에서 함께 손을 꼭 잡고 자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레위기에 나오는 축복문(민수기 6,24~26 참조)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고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시고 자비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필진정보]
담화 번역문 출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미디어부(http://blog.naver.com/cbckmedi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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