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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살게 된다”
  • 전순란
  • 등록 2016-01-22 16:4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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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0일 수요일, 맑은 후 흐림


지리산 하봉의 눈


해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손등에 따순 손을 얹는다. “손이 차구나! 아침부터 웬 부지런을 그리 떨었누?”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면 벽난로 장작이 잘 타는데 중구난방으로 불어 난로 속을 한 번씩 뒤집어놓으면 시커먼 재와 연기를 난로의 모든 틈새로 쏟아낸다. 꼭 나 같다. 착한 사람들 곁에서는 나도 그림같이 조신할 수 있지만 수가 한번 틀리면 속을 다 뒤집어 내놓는다. 그래선지 “여보, 나는 왜 이렇게 착할까?”라는 아양을 떨면 보스코가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면서 “대한민국 착한 여자들 다 죽고나면...”이라고 대꾸하는가 보다. 지리산 속에서 살아온 지 10여년이니 도를 조금은 닦았을 법한데 몸만 산에 와 있지 산처럼 도통하려면 한참 멀었다.


나는 그 '승질'을 못 참고 이 추운 날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제끼고 무릎으로 기면서 방방이 먼지를 걸레질하고 있다. 보스코만은 서재에서 방문을 꼭 닫고 미동도 않는다. 우리집에서 먼지가 젤 많아 보이는 방이 서재인데.... 살림하는 내 눈에는 방바닥 먼지만 보이고 공부하는 그의 눈에는 제대로 분류되어 있지 않는 살림살이들만 보이는지, 나는 곧잘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기고 그는 곧잘 내 살림을 정리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릇을 찾는데 있던 곳에 없다. 찬장을 열어보니 컵은 컵대로, 접시는 접시대로, 유리병은 유리병대로 칸칸이 가지런히 나란히 깔끔히 정리되어 있어 주번사관 검열을 막 받은 내무반 같다.



지리산은 눈꽃으로만발하고 양지바른 함양은 눈이 다 녹았다


그래서 주부들이 남편에게 세워둔 금기 하나가 “냉장고 문을 열지 말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도 비슷한 불평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남편에게 냉장고 검열을 받는 일이 주부로서는 가장 ‘존심 상하는’ 부끄럼인가보다. “우리 냉장고 안에 있는 반찬 다 먹고서 새로 하면 안 될까?”라든가 “여보, 앞으로 석달간 새로 반찬 말고 냉장고 반찬만 비우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느티나무 독서회에서 내가 당번을 맡는 날이 오늘이어서 아우들 먹인다고 케이크를 굽고 과일을 준비하고 차와 커피도 마련했다. 남해 형부가 갖다 준 피조개(왕꼬막)는 진이네도 주고 우리도 먹었는데 하도 양이 많아서 서너 명 친구들에게 조금씩 나눠주었다. 나눠줄만한 사람들과 나눠줄 게 있다는 건 늘 즐거운 일이다.


정옥씨를 오랜만에 만났다. 공부하느라 어려울 테지만 그만큼 내공을 쌓아가면서 자기 가족에게도 우리들에게도 당당한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우리처럼 부모가 교육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런 당연한 혜택을 못 받은 이웃을 보면, 달리기 경주에서 누구는 출발선에서 뛰고 누구는 중간쯤 가서 뛰는 불공평한 경기 같은 게 인생이다. 다만 인생이 장거리 '말아톤'이기에 마지막에 웃는 사람에게 진짜 월계관이 주어지는 게 다행이다.



저녁 7시에 느티나무독서회 모임을 가졌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읽고들 왔다. 아우들 얘기가 인생을 하루하루 숙제처럼 해내고 있는데, 그래서 인생이 무겁고 싫증난 짐처럼 느껴지는데, 오늘이 내겐 ‘최고의 날’이고 ‘가장 젊은 날’이고 ‘아마도 유일하게 남은 하루’라는 생각으로 살아야겠다는 얘기며, 지나고 나니까 예전의 내 모습이 머리와 옷매무새만 촌스러웠던게 아니라 생각까지 촌스러웠더라는 한탄이며,어떤이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살게 된다”는 교훈을 얻으니 자기 삶이 참 기특하더라는 얘기도 나왔다.


어느 친구는 이 책과 「의자놀이」를 함께 읽었는데 개인의 절망에서는 주변의 사랑과 관심으로 일어서기가 그래도 가능 하겠지만 「의자놀이」에서처럼 사회적 절망이 주는 완전한 고립감, 어디에서도 닿지 않는 도움의 손길에서는 절망한 28명이 아까운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한문 앞 미사 이후에는 "누군가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연대가 그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했다며, 우리도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절망한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깨닮음을 나누기도 했다. 


요즘 뜻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 여자의 광란의 춤판을 구경하면서 참담한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기가 더욱 힘들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래도 희정씨 말마따나 “때로는 버티는 게 답이다.”라는 말로 오늘 독서회는 결론을 지었다. 버틴다는 것은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도 기다림이란 희망을 놓지 않는 말이니까....민초들이 거친 비바람에 쓰러져도 그게 끝은 아니다. 다시 일어날 때를 위해 버티는 것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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