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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태몽? 혹시 손녀딸?"
  • 전순란
  • 등록 2016-01-20 10: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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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8일 화요일, 눈 눈 눈




생전 안 가던 백화점엘 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고급 명품 귀금속 매장엘 돌았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예쁘고 멋지지만 “저런 걸 사서 어디에 끼고 다니지?” 워낙 보석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욕심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장을 나오는데 발에 채이는 게 있다. 얼른 주웠다. 번쩍이는 금시계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


세계 어디서나 관광지라면 제3세계 사람들이 만원짜리 시계를 늘어놓고 판다. 황금색이 진할수록 “나는 가짜에요!”라는 티를 내고 그럴수록 가격은 더 싸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주운 물건을 자세히 보니 진짜 금장 롤렉스시계! “억? 억! 억.” “이걸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모금에 갖다 줄까?” “아냐, 차라리 시계주인을 찾아가 돌려주고 ‘어차피 당신이 잃었다가 찾았으니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하시오.’라고 할까?” “그러다 이런 걸 차고다니는 사람이라면 나사가 전혀 딴 데에 박힌 사람일 텐데 모금하라는 말을 알아들을까?”



그러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밖은 온통 하얗게 눈이 덮히고 그 위로 무서운 회리바람이 눈가루를 사방으로 불어올려 우리 창문에다 몰아친다. 방금 꾼 꿈은 보스코가 어제 김선실씨의 요청으로 수락한 “정의와 기억 재단”('일본군성노예피해자' 문제를 위한 국민모금운동) 공동대표직을 두고, 100억 모금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나보다. 한국염 목사가 전화해서 “순란아, 성선생님이 큰일 맡으셨더라.”라는 인사까지 받은 터여서 주사야몽(晝思夜夢)이겠지...


아침에 빵기한테서 받은 카톡 사진에 시우가 나온다. 아빠가 유치원에 와서 어린이들에게 책읽어주기를 하는 사진인데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어색해하는 시우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아, 이젠 다 컸구나! 저 녀석 동생을 봐도 되겠는 걸!”하다가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엉? 그러면 그게 며느리 대신 꾼 태몽? 혹시 손녀딸?” 생각만 해도 좋아 혼자서 아침나절을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나 미쳤어, 미쳤어! 손녀딸! 생각만 해도 이렇게 웃음이 나오다니...”






11시에 점심을 당겨먹고 광주 매월동 살레시오수녀원에서 있을 보스코의 강연을 떠나려니 했는데 최미카엘씨가 폭설로 광주 교통이 완전 카오스라는 정보를 사진으로 보내와 아예 10시반에 서둘러 휴천재를 나섰다.


4차선으로 새로 뚫린 88고속도로(대구-광주 ‘대광고속도로'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졌다)로 주변은 온통 은백의 세상인데 매월동에 도착하니 의외로 12시 30분! 살레시오 수도회를 찾아갈 땐 내 밥 맡겨놓은 것처럼 “밥 좀 주슈!”라고 들이닥치는 버릇이 있어서 때마침 점심식사를 시작하려던 수녀님들에게 점심을 얻어먹었다. 몽골에서 선교중인 전직 관구장 수녀님들을 만나서 더 반가웠다.


보스코는 피정중인 수녀님들에게 2시부터 “사회복음의 영성”에 관해서 두 시간 강연을 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최미카엘 선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빵기네를 위해 함께 롯데 마트에 가서 컵떡국과 스넥을 샀다. 판매원도 ‘똥과자’라고 부르는 이 스넥은 초콜릿이 겉에 발라져 있어 이렇게 불리는데 그게 매진되고 없어 ‘피똥과자’대신 (버터만 바른) ‘맨똥과자’로 종목을 바꿔서 보냈다. 집에서 마련해간 쌀가루 등을 넣어 포장해서 EMS 우편으로 부쳤다. 2만원도 안 되는 물건을 세배의 요금을 내고 보내는 어이없는 우편이지만 그걸 받고 좋아할 손주들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면에 미소가 떠오르니 할미는 어쩔 수 없다.



4시에 강연을 마친 보스코에게 수녀님들은 궁금한 질문이 많았나본데 다시 눈이 내리고 있어서, 더구나 광주는 폭설주의보가 내려진 참이어서 서둘러 떠났다. 88도로를 타기까지는 앞이 안 보이게 큰 눈이 내리더니만 남원을 지나 경상도로 넘어오니 뜸해졌다.


이 밤에 위험한 산길 눈길을 달리는 명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면 도무지 없겠다는 게 우리 여자들 생각인데, 동지섯달같이 썰렁한 가슴을 타고나는 게 사내들이어선지 저 눈길마저도 쌩쌩 잘도 달린다, 더구나 밤길을!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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