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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식사에 누가 오는 거야?”
  • 전순란
  • 등록 2015-12-31 13: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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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아침에는 해, 저녁에는 이슬비


손님들이 저녁에 오면 준비하는 마음이 덜 바쁘다. 그래도 점심에 오는 편이 더 좋은 이유는 손님들이 가고 나서 설거지와 뒷정리를 끝내더라도 밤이 깊지 않아서다. 오늘도 설거지를 루시아씨가 거의 다 해주었는데도 남은 정리와 설거지, 청소, 그리고 식탁보와 냅킨 빨래까지 마치니까 자정이 넘었다. 빨리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며 채근을 하는데 보스코는 40년하고도 수년을 더 살고서도 “다 끝나야 그만두는” 내 성미에 학습이 덜 됐나보다.




아침부터 “오늘 저녁식사에 누가 오는 거야?”(Guess who is coming to dinner)라고 물어오는 보스코에게 비밀이라고,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점심 후 열 명의 식탁을 세팅해주고 이층서재로 올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 뚱하지만 끝내 일러주지 않았다.


얼마 전 친구 장례식장에 갔다 온 날 무척이나 우울하기에, 그동안 지리산에 산다는 핑계로, 집필과 강연에 바쁘다는 이유로, 동창들을 만나는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는 보스코에게 올해가 가기 전에 친구 몇 명이라도 함께 만날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종수씨에게 만남을 주선케 하고 보스코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다섯 시가 넘어 친구들이 쌍쌍이 도착하고 어제 하루 종일 함께 지낸 영준씨 부부마저 도착하자,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그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게 퍽 재미있었다.





보스코의 친구들이 부인을 동반해서 한데 만난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결혼 초(1973~1976)에는 광주에서, 그 다음 서울로 이사와서도(1976~)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일년에 몇 차례씩이나 서로 돌아가며 집으로 초대하거나 함께 유원지로 놀러가서 아이들도 어울려 놀게 하곤 했는데...


그 어린애들은 자라서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들을 낳았고, 함께 만나던 부인들 중에서도 몇몇은 하늘나라로 떠났으며, 남편이 죽으면 부인과는 연락이 두절되기 때문에 간간이 얼굴이 떠오르면서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는 사람들도 있고...


오늘 온 부인들도 거의 비슷한 처지다. 남편 친구는 고사하고, 자기 친지들마저도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전무하여 밖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거나, 아주 가까운 사이라면 식사후 집에 와서 차 한 잔 들고 헤어지는 게 요즘의 ‘도시문화’다. 영상매체로는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지만 밥상을 함께하는 인간관계는 그만큼 멀어진 세태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들은 아래층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고, 부인들은 이층으로 올라와 따로 담소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침에 보스코가 SIRCEO라는 곳에서 행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강연이 영상으로 다듬어지고 공개되어 부인들끼리 감상했다.


가까이 보는 여인들의 얼굴은 거울에 비춰본 내 얼굴처럼 일흔에 다가가는 흔적이 역력하다. 늙은 여자들이 서로 만나 쪼글거리는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어머, 빵기엄만 옛날하고 똑 같아 하나도 안 변했네! 어쩌면 그대로에요?” 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서로를 위로해주지만 곁에서 들으면 참 가여운 인사치레일 뿐, 성형수술로도 보톡스로도 희어지는 귀밑머리 막을 장사가 없다.




서교수는 뒷머리를 가리려 모자를 쓰는데 그대로의 맨머리가 퇴직교수다운 풍모를 드러낸다며 동창들이 모자를 쓰지 말라지만 소용이 없다. 부인 얘기로는, 며칠 전 병원에 함께 가서 제각기 검진을 받으며 한 바퀴 돌다 자기 앞에 저만치 보이는 남자의 뒤통수가 참 밉더란다. 그러고서 눈여겨보니 자기 남편이더라나. 횡 해진 뒷머리를 보자 마주하고 말을 나누기조차 싫어서 핸드폰을 걸어 용건을 얘기했다나?


보스코 역시 뒷머리가 횡 하지만 거울에서는 자기 뒤통수가 안 보여선지 가릴 생각을 않는다.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잔설거지를 하는 보스코의 입가에는 한참이나 만족한 미소가 남아 있다. 70대 중반 어린아이의 미소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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