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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 침묵의 미궁 속 나치와 협력자
  • 이정배
  • 등록 2015-12-31 12:10:40
  • 수정 2015-12-31 13: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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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독일로부터 해방된 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나치청산 작업을 펼친다. 레지스탕스에 의해 교전 중에도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처형이 지속적으로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세 개의 전담위원회가 구성되어 시민들로부터 고위층에 이르는 모든 나치협력자들을 조사하여 재판에 넘겼다. 전국적으로 32만 명 이상이 협력자 조사대상이 되었고, 그 중 125,000명 이상이 재판에 넘겨져 95,000명 정도가 실형을 받았다.

나치협력자 중에서 특히 지식인에 대한 처벌은 더욱 엄중하였다. 나치에 협력한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작품 활동을 금지시켰고,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들은 폐간시켰으며 언론사의 경영자들은 재판에 넘겨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들에게 선거권 박탈은 물론 모든 공적 지위를 박탈하고 임용에서 배제하는 강력한 처벌을 시행하였다. 이들 나치협력자들은 국가의 수치스러움이라는 의미의 ‘국치죄(國恥罪)’로 처벌받았다.

이들의 나치협력자에 대한 처벌이 일차적으로 1951년 즈음 일단락되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와서도 새롭게 친(親)나치 경력이 드러나면 대상자를 고발하고 재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나치청산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범국가인 독일은 어떠했는가? 정작 독일인들은 1958년까지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몰랐다. 유대인 대량학살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를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수감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독일인들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제작한 영화 《나치는 살아있다, Labyrinth of Lies》(2014)는 이러한 독일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에 한 젊은 검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독일 내 나치와 협력자들을 조사하는 일을 맡는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여 나치와 협력자들을 색출해내어 재판에 넘기는 일을 한다. 나치와 협력자들은 자신들의 과거 들추기를 싫어하여 검사를 위협하거나 업무를 방해한다.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 때문이라는 더러운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외압에도 불구하고 검찰총장에 적극적인 지원과 검사의 소신 그리고 언론인의 열정이 맞물리면서 나치와 협력자에 대한 색출작업과 독일인이 저지른 부끄러운 사건들이 독일 전체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196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20개월 동안 진행되면서 관련자들이 처벌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을 본격적으로 장악하였다. 그 후 50년 동안 일본제국은 조선을 점령했다. 그로인한 거대한 산물 중의 하나가 친일협력자이다. 단 5년 동안 나치에 점령되었던 프랑스는 10만 명 정도의 나치협력자에게 실형을 내렸다. 그들의 10배인 50년 동안 일본제국에 점령되었던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협력자에 대한 실형선고가 거의 없다. 반민특위에 의해 300명가량이 대상자로 체포되었지만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다.

일본 내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반성은 아예 없다. 오히려 그들을 추앙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침묵의 미궁에 들어앉으려던 독일인보다 일본인과 친일협력자들이 훨씬 추악하고 극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개봉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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