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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지요하] “노란 리본 언제 뗄 거냐” 묻는 사람들에게
  • 지요하
  • 등록 2015-12-29 12:08:15
  • 수정 2015-12-29 12: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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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사제들 / 12월 7일의 광화문광장 시국미사는 수원교구 사제들이 주례와 강론을 맡았다. ⓒ 전재우


매주 월요일엔 서울로 간다. 내가 사는 고장(충남 태안)에서 서울에 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고, 목적지인 광화문광장까지는 3시간가량 소요된다. 


옛날에는 태안에서 서울에 가려면 7시간가량이나 걸렸다. 언젠가부터 4시간가량으로 줄더니 이제는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전용차선 덕을 보는 버스를 타도 그렇고, 승용차를 가지고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도 그렇다.  


임시 거처를 두고 있는 신림동에서부터 새벽길을 달리면 내가 사는 태안군청 바로 옆 아파트까지 2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승용차를 가지고 서울에 갈 경우에는 신림동 거처에 차를 대놓고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광화문광장을 가곤 한다. 신림동의 임시 거처는 2016년 2월까지 유지할 계획이다. 


광화문광장 ‘월요시국기도회’ 


임시 거처가 없어지는 내년 3월부터는 어떤 방법으로 매주 월요일 서울 광화문을 다닐 것인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금은 걱정도 된다. 어쨌든 광화문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월요시국미사’가 거행되는 동안에는(시국미사가 언제 종료될지 알 수 없지만 끝나는 날까지) 빠짐없이 광화문광장을 왕래할 생각이다.


지난 11월 16일부터 다시 시작된 일이다. 11월 16일에는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시국미사가 열렸고, 23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시국미사가 열린다. 23일과 30일의 시국미사는 서울교구 사제들이 주례와 강론을 했다. 12월 7일은 수원교구 사제들이 담당했는데, 14일은 인천교구, 21일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28일은 청주교구 담당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 시국미사 사제들 / 12월 7일의 광화문광장 시국미사는 수원교구 사제들이 많이 참례했다. ⓒ 전재우


그리고 2016년 1월 4일은 전주교구, 11일은 안동교구, 18일은 구속주회와 도미니코 수도회, 25일은 광주교구 순으로 주례와 강론이 예정돼 있다. 그 이후로는 여타 교구와 수도회들이 줄을 이어 주례와 강론을 담당할 터인데, 모든 교구와 수도회가 일순을 하면 또다시 같은 순서로 이어질 것이다. 


생각하면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이 그지없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11월 16일의 서울광장 시국미사에는 100명 이상의 사제들이 참례했는데, 매주 월요일 저녁 광화문광장 시국미사에는 매번 40명 이상의 사제들이 참례한다. 그리고 각 수도회의 수도자(수녀)들은 매번 100명이 넘는다. 


광화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지낼 때마다 미사에 함께 하는 사제·수도자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뜨겁게 끓어오르곤 한다. 요즘같이 한겨울의 찬바람 속에서 두 손 호호 불며 미사를 지낼 때는 감사함 때문에 가슴이 울컥하기도 한다. 


이때만큼 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이 다행스러워지는 때가 없다. 내가 천주교 신자인 고로, 정의와 평화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사람인 고로, 성전이 아닌 바람 부는 들판과 호숫가와 길거리에서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인 고로, 광화문광장에 서서 세월호 유족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등 수많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지내며 1시간여의 고생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 시국미사 장면 / 광화문광장 시국미사에는 매번 50명가량의 사제들이 참례하며, 신자들의 양옆으로 울타리를 치듯 자리한다. ⓒ 전재우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또 정의구현사제단이 없었다면,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마구 파괴되는 이 모멸의 시대에 어디 가서 나 자신을 위안할 것인가! 생각하면 절로 곱송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절대자를 향해 간절히 기원을 드릴 수 있으니, 그 기원하는 힘으로 오늘도 살아가는 셈이다.  

            

지난 2010년과 11년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4대강의 물결과 함께, 또 2012년은 대한문 앞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 저녁 미사를 지내며 눈비를 맞았다. 그런데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때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다. 이제는 그때보다 더욱 강렬해진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으로 훨씬 더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한다. ‘유신부활’을 막아내기 위한 기도가 더욱 절절해진 것이다.   


‘노란 리본’은 내 존재 증명


한해가 간다. 한해가 저무는 요즘 노란 리본이 달려 있는 옷깃을 여미며 더욱 비장한 마음을 갖는다. 지난 1년 동안 한 시도 내 몸에서 노란 리본을 뗀 적이 없다. 노상 노란 리본이나 배지를 착용하고,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내 승용차 뒷문 유리에는 지금도 큼지막한 노란 리본이 부착돼 있고, 자동차 백미러에도 목걸이 노란 리본이 묵주와 함께 걸려 있다.   


▲ 승용차 실내 백미러에 걸려 있는 노란 리본 / 내 승용차 운전석 앞 백미러에는 목걸이 노란 리본이 묵주와 함께 걸려 있다. 2010년부터 전국 각지에 20만Km 이상을 달리며 혹사를 면치 못하고 있는 내 애마다. ⓒ 지요하


어디를 가든 반드시 리본이나 배지를 착용하곤 했다. 양복을 입을 때는 배지를 달았고, 점퍼나 간편한 복장을 할 경우엔 리본을 달곤 했다. 리본과 배지를 구해다가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나눠줬는데, 지금까지 초지일관하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 그런 아내가 여간 고맙지 않다. 


아내는 직장에서 한때 ‘노란 리본을 언제 뗄 거냐’는 질의를 받곤 했단다. “바다 속의 세월호를 인양하고 아홉 명의 미수습자를 모두 찾을 때까지”라고 명확하게 못을 박아서 이제는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과 진실을 규명할 때까지’로 못 박고 있다. 


이곳저곳 움직이는 데가 많은 나는 지금도 종종 질문을 받곤 한다. “언제까지 그걸 달고 살 거냐”고 시비조로 따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언성을 높인 경우도 있다. 한번은 ‘존재 증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도 있다. “이 노란 리본은 내 존재 증명이야!” 내 답변을 들은 친구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 자네한테까지 이해를 받을 필요도 없어.”


태연하게 응대했지만, 슬프고 뼈아픈 마음이었다. 


▲ 승용차의 노란 리본 내 승용차의 뒷문 유리에는 큰 사이즈의 노란 리본이 부착되어 있다. 길거리에서 많은 운전자들이 쉽게 봂 수 있다. 유리에 나타나 있는 흰 무늬들은 얼마 전 사대강 파괴작업 중단을 촉구하는 손피켓들을 여러 장 투명 테이프로 붙였던 흔적들이다. ⓒ 지요하


그 후 노란 리본은 내 ‘존재 증명’과도 같다는 생각을 더욱 명료히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생각이 나서 시 한 편을 짓게 됐다. 명색 소설가로서 소설은 한 편도 쓰지 못하고(제법 고료를 많이 주는 문예지의 청탁에도 응하지 못하고) 한해를 보내게 돼 무안하고 아쉬운 마음 크지만, 시는 여러 편 지었다. 수십 편의 산문(주로 칼럼) 외로 시를 여러 편 지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요즘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울의 중앙보훈병원에 다닌다. 건강 문제 때문이다. 베트남전쟁 참전 덕분에 100% 무료로 진료 받고 있다. 보훈병원은 고엽제전우회 회원 등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주로 찾는 병원이다. 그 병원을 다니면서도 나는 한 번도 노란 리본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듯 착상을 얻어 시를 짓게 됐다.   


올해 지은 여러 편의 시들 중에서 최근에 마지막으로 지은 시를 독자 여러분께 선보인다. 


▲ 시국미사 참례 / 나는 매주 월요일 오후 충남 태안에서 서울 광화문광장 시국미사에 참례하곤 한다.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 회복을 갈망하며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그때마다 내가 그리스도임을 자각하곤 한다. ⓒ 전재우



내 가슴의 노란 리본


그날로부터 600일이 지났다 

저만치 700일이 오고 있고 800일이 오고 있다

1000일도 오고 2000일도 올 것이다


600일이 지난 오늘도 

내 가슴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미안하여 차마 뗄 수 없다

언제 떼게 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더러 내 가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시내버스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음식점 안에서도

한 번 보았다가 두 번 보는 사람도 있다


내 가슴을 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알 수 없다

누군가가 내 가슴을 보았다는 사실이 고맙다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본 사람은 더욱 고맙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몰라도 좋다

눈이 있으니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내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심장을 품고 있는 내 가슴의 작은 리본은

내 눈물이다

내 사랑이다

절규와 함성이며

간절한 기도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지향하는

생명이며 힘이다


그 힘으로 나는 오늘도 내 몫의 삶을 이어간다. 


▲ 시국미사 참례 /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광화문광장 시국미사에 참례할 적마다 나는 매번 맨 앞자리에 앉곤 한다. ⓒ 전재우





[필진정보]
지요하 : 1948년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추상의 늪>이, <소설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정려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지금까지 100여 편의 소설 작품을 발표했고, 1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충남문학상, 충남문화상, 대전일보문화대상 등을 수상 하였다. 지역잡지 <갯마을>, 지역신문 <새너울>을 창간하여 편집주간과 논설주간으로 일한 바 있고, 향토문학지 <흙빛문학>과 <태안문학>, 소설전문지 <소설충청>을 창간히였다. 한국문인협회 초대 태안지부장, 한국예총 초대 태안지회장, 태안성당 총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충남소설가협회 회장,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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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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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5-12-29 13:27:39

    슬프네요. 관심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가 양극화된 요즘이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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