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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청문회 참고인들, 성의없이 답변해
  • 최진 기자
  • 등록 2015-12-16 21:41:00
  • 수정 2015-12-17 19: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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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를 방청하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통곡했다. (사진출처=민중의소리 ⓒ 김철수 기자)


‘4·16참사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16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중구 서울 YWCA 대강당에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셋째 날 일정을 시작했다. 특조위는 이날 ‘참사현장에서의 피해자 지원조치의 문제점’을 주제로 청문회를 진행했으며 세월호 피해 가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여당 추천 위원 5명은 첫째 날,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청문회에 불참했다. 


이날 오전 제1부 참고인으로 세월호 피해자 가족인 고(故) 이준우 학생의 아버지 이수하 씨와 고(故)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 씨가 참석했다. 김선혜 상임위원과 최일숙 비상임위원은 참사 당시 수색 관련 피해자의 정보접근권과 희생자 수습·장례지원에 관한 내용을 참고인으로 나온 이수하 씨와 정성욱 씨에게 물었다. 


가족들, “초기 대처가 피해자 가족들 불신 키웠다”


피해자 가족들이 진도에 도착했을 상황에 대해 이수하 씨는 세월호참사 초기에 정부와 해경의 대처가 피해자 가족들의 불신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는 “내 아이가 생존자 명단에 있는지 살폈지만, 아이의 이름은 안보이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이후 관계자가 ‘80~90명의 아이가 더 나오고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후에 만날 수 있다’라고 해서 그 말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다시 물어보니 체육관에 있는 아이들이 전부라고 했다”며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팽목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성욱 씨는 “가족들은 아무나 붙들고 상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최고 대표자를 묻자 해경파출소장이 나왔고 사고경위에 관해서 묻자 아무 말도 못 했다. 이후에 해경청장부터 여러 사람이 왔지만, 사고경위나 가족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참사 초기에 시신 수습과정과 장례 과정에 대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성욱 씨는 “아이들이 올라오면 가족들이 가장 먼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기도하고 있던 아이도 있었고, 살기 위해 까치발을 든 아이도 있었다. 어딘가를 부여잡다가 피투성이가 된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기자들이 먼저 사진을 찍겠다고 천을 열어젖혔다”며 “초기에 해경과 해수부에 아이들이 올라오는 길을 기자들로부터 잘 단속해달라고 몇 번을 말했다. 가족들이 보겠다고 해도 그것을 막은 것이 기자들이고 해경이고 해수부다”고 규탄했다.


시신에 대해 예의 없이 무분별하게 진행된 취재 문제 이외에도 시신 안치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정성욱 씨가 “아이의 시신을 보는 것도 힘든 가족들에게 정부 관계자가 아이의 이름을 냉동고에 쓰라고 시켰다”고 증언하자, 유가족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졌다. 이수하 씨는 “아이들을 찾으면서 가족들이 개선을 요구하면 조금씩 바뀌었다. 팽목항에 공무원들이 내려왔는데, 매뉴얼을 정해서 이야기해줘야 하지만 가족들이 제시하는 방법에 끌려다녔다”며 “제가 보고 느낀 당시에 공무원들이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참사 초기에 언론에 발표된 정부의 구조인력에 대해 사실 여부를 묻자 이수하 씨는 “상당히 부풀려졌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밤을 새우고 새벽까지 수색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론에서 이야기했던 인원과 장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며 “현장에서 나오는 발표는 가족들의 불신을 일으켰고 정부의 부풀려진 발표는 가족들이 현장에 가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정성욱 씨는 “사고해역에 갔을 때는 선체가 보였는데 보이는 것은 고무보트밖에 없었다. 배를 망치로 두드려 생존자를 확인하는 것이 본 것의 전부였다”고 말했다. 


정부가 인력을 늘렸다고 보도한 내용에 대해서도 참고인들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수하 씨는 정부가 555명의 인력을 늘렸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당시 팽목항에 대기하고 있는 모든 인원을 다해도 그 정도 인원은 없었다. 국민을 기만하고 유가족들을 기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성욱 씨는 “17일 사고현장에 갔을 때는 주변에 잠수인력이 하나도 없었다. 망망대해에 뱃머리만 둥둥 떠 있었다. 처음에는 고무보트가 있었는데 17일에는 그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가 현장 상황과 다른 언론의 내용을 지적하자, 가족들에게만 다른 자료를 나눠줬다고 진술했다. 이수하 씨는 “정부가 말한 대로 항공기 32대가 떠 있었으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알았을 것 아니냐. 언론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가족들이 가보면 아무것도 없었다”며 “왜 실제 현장과 언론에 나오는 내용을 다르게 보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다음에 가족들에게만 나눠주는 자료에 ‘항공기 32’ 뒤에 괄호를 치고 횟수라고 적었다. 많은 국민은 정부가 많은 인력을 동원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성욱 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슴에 묻을 수 없다. 가족들이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왜 추워진 바다에 갈 수밖에 없었는지 꼭 진실규명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목포해양경찰서에서 준 내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정동수 학생의 시신 사신을 들고 오열했고 청문회장에 있던 많은 유가족도 함께 통곡했다. 


이수하 씨는 “불이 났을 때 소방 공무원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고, 그러기 위해서 평소에 연습한다”며 “그런데 해경의 안전 기준은 무엇인가? 재난 상황에서 역할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왜 있었나”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특조위는 세월호 피해 가족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만든 기구다. 목숨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이 특조위가 가족들의 마지막 끈이다. 가족들이 이 조사의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해 달라. 끝까지 믿고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민간잠수사, “한 번도 치료받은 적 없다”


이어진 민간잠수사 참고인의 진술에서는 수색현장 구조작업 지원과 희생자 수습과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제2부 참고인으로는 세월호참사 수색 작업을 진행했던 민간잠수사 전광근 씨와 김관홍 씨가 참석했다. 참고인들은 잠수에 필요한 바지선과 수색에 필요한 배의 도면이 제공되지 않는 등 구조작업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광근 씨는 “당시 현장에는 잠수사들을 지휘하거나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배를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었다”며 정부기관의 구조체계가 수색작업 당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가이드라인은 연결돼 있었지만 어디로, 어디까지 연결됐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뒤엉켜 있었다. 리베로 바지선이 도착하고 난 이후에야 체계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관홍 씨는 수색작업 환경에 대해 신체적·정신적으로 탈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 현장에서 매일 수십 구의 시신이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다. 처음에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며 “매뉴얼과 안전을 포기하고 들어갔던 것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를 수습하지 못하고 올라왔는데, 그 이후로 그 희생자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한 세월호참사 이후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광근 씨는 “전혀 없었다”며 “민간 잠수사들이 쫓겨난 이후, 누구 하나 치료하라는 연락이 없었다. 저는 지금까지 치료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김관홍 씨는 “광주병원에서 올라와 조사만 해갔다. 삼천포 병원에서는 와서 설문지를 작성하라고 했다. 우리가 무슨 마루타인가”라며 “1월 방송이 나가니까 2월 한 달만 병원비가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 번 약물치료를 받았다”고 밝혔다. 


정광근 씨는 “아직 세월호에서 못 올라온 9명의 실종자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마지막까지 다 수습하고 올라온다고 약속을 했고 유가족들이 저희보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 끝까지 못 찾아드려서 많은 유가족분들께 죄송하고 (세월호에 남아있는) 친구들에게도 미안하다”며 “재난은 예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저희는 앞으로도 이런 재난이 닥치면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관홍 씨는 “잠수사이기 전에 국민이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갔고 제가 가진 직업이 그 상황에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간 것이다. 애국자나 영웅이 아니다. 저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위 공무원에게 왜 우리가 나가야만 했는지 묻고 싶다”며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친다. 막노동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이런데, 왜 훌륭하고 머리 좋으신 분들이 기억이 안 나시는지 모르겠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김관홍 씨의 말이 끝나자 방청석에서는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박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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