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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 1 (유대칠)
  • 유대칠
  • 등록 2015-04-21 14:41:46
  • 수정 2015-05-31 12: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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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울어야 한다! 분노해야 한다!

: 왜 우리에겐 우리의 철학이 없는가



결국 죽는다. 병들어 힘든 몸으로 싸우다 결국은 죽는다. 헤어져 울다 결국 죽는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잔혹한 현실 앞에서 운다. 그리고 분노한다.


이 공허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더 ‘소유’(所有)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결국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죽을 뿐인데, 이 모든 싸움이 무슨 의미인가? ‘소유’로는 이룰 수 없는 행복 앞에 울고 분노한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에 집착하는 덧없는 발버둥에 아파한다. 이 슬픈 현실, 결코 다르게 될 수 없는 이 잔혹한 현실 앞에 울며 분노한다. 이러한 울분과 분노는 그를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하나의 철학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닌 잔혹한 현실을 마주할 때, 생기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우리에게 절실하다. 그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던 신분제 사회에서 '우는 이'와 '웃는 이', 이 모두의 덧없음을 마주했다.


그는 자신의 수행으로 얻은 지혜를 '공유'한다. 철학자에게 지혜의 공유는 곧 자기 존재의 '실천‘이다. 그는 수행자에게 삭발을 명한다. 당시 각자의 신분을 나타내던 머리 모양을 지우라고 한다. 어떤 신분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 그것이 아집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삭발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산 속으로 들어가 현실과 거리둠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삭발이 그땐 신분제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분노한 싯다르타의 한 실천이었다. 이렇게 그의 분노에서 그의 철학은 시작되었다.


플라톤을 보자. 그가 그저 초현실적 존재인 이데아만을 외친 인물이라면, 철학사의 거봉(巨峯)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그의 철학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문제에서 시작했다.



어린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마주한다. 잔혹한 현실이었다. 왜 진리를 추구한 스승은 죽어야 했을까? 왜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플라톤은 울며 분노했다. 이 분노와 울분에서 그의 철학이 시작된다.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답을 얻는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게 철저하게 현실적인 인물이다. 몽상가가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찰나(刹那)의 기쁨만을 주는 감각적 대상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까지 추구해야할 우리 삶의 이상향, 지금 우리가 그것을 향하여 살아가는 바로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우리 삶의 목표이다. 즉 이상향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움직인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그 이상향을 향하여 살아간 인물이다. 찰나의 기쁨에 만족하지 않고, 이 세상에선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그래서 영원히 추구해야할 바로 그 이상향을 향하여 살아간 인물이다.


이루어지고 나면 그저 사라지는 헛된 찰나의 목적이 아니라,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영원히 추구하며 따라야 한 그 이상향 말이다. 그 이상향을 따른 인물이다. 스승은 헛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이상향을 추구한 철학자 그 자체였다.


오히려 찰나의 기쁨에 만족하던 이들, 즉 스승을 죽인 이들의 삶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이상향, 즉 이데아가 참된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의 철학이 꼴을 갖추게 된다.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이란 현실 앞에서 시작된다. 그 잔혹한 현실 앞에서 울고 분노하여 자기 철학을 일구어갔다.


싯다르타도 현실 앞에서 고민했다. 플라톤도 다르지 않다. 그 현실이 공허하고 허망하며 화나게 하는 것이라도, 그들은 피하지 않고 그들의 현실, 그 현실 앞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고개 돌리지 않았다. 이것은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역시 다르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유해지지 못하는 노동자의 아픔을 보면서 '같이' 울고, '같이' 분노한 그는 그 울분과 분노에서 자신 신학을 시작한다. 그는 잔혹한 현실 앞에서 고개 돌리지 않았다. 이는 마주하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울분과 분노가 그의 철학이 되었다.


2015년 우리는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한 철학이 없다고 한다. 그것이 아쉽다고 한다. 왜 지금 우리를 위한 철학이 없을까? 왜 지금 우리를 위한 신학이 없을까?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다. 2015년 이 땅의 철학자와 신학자는 현실 앞에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있다.


신분제 사회와 같은 공허함 현실 속에서 싯다르타와 클레멘스가 울고 분노하듯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가 없다. 2015년 지금 여기의 가장 큰 현실은 ‘세월호’다. 수많은 생명이 이유도 모른 채 사라져간 아픔, 남겨진 가족들의 아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했던 언어로 표현할 수는 깊이의 아픔, 그 아픔 속에서 무력한 사회, 슬픔과 추모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잔혹한 현실, 지금 여기의 가장 큰 현실, 가장 큰 아픔은 ‘세월호’다.


그런데 이 ‘세월호’ 앞에 철학은 무엇이고 신학은 무엇인가? 세월호의 아픔을 마주하고, 그 아픔 앞에 울고 분노해야 한다. 지금 여기의 그 슬픔 앞에 울고 분노해야 한다. 그 울분과 분노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우리를 위한 철학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우리의 눈물에 답할 수 있다. 싯다르타의 분노, 그리고 그의 수행과 철학함, 삭발, 무소유의 삶은 그저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도전적인 실천의 삶이었다. 싯다르타는 과거 철학자들의 책을 들고 와서 글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현실 속에서 울고 분노하고 실천했다. 그 아픔이 그에게 철학의 토대였다. 그가 마주한 기원전 6세기 인도의 신분제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플라톤 역시 그렇다. 스승의 부당한 죽음이란 잔혹한 현실 앞에서 고개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맞섰다.


그런데 우린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있다. 혹시나 실눈을 뜨고 있어도 유명 철학자의 개념 속에 숨어 세월호의 아픔을 설명하려 한다. 아무리 플라톤, 칸트 그리고 들뢰즈가 대단한 철학자라고 해도, 지금 여기 아파하는 이들에게 찾아와 이들 철학자의 개념 속에서 이해하면 슬픈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들의 언어로 이 시대의 아픔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설령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의 아픔은 이곳에 존재하는 우리가 가장 잘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로 이 아픔을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쩌면 이러한 설명은 지식의 자랑으로 들릴지 모른다. 나는 철학자들의 개념을 이만큼 많이 안다는 식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이것이 과연 지금 여기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일까? 공유하지 않고 지금 여기 아픔에 다가설 수 있을까? 그 아픔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땅을 살아가는 글쟁이의 한계다. 글쟁이는 낚시를 위해 책을 산다. 옆집 할아버지의 오랜 경험보다 글이란 공간에 익숙하다. 그냥 소주 한 병을 들고 찾아가 같이 낚시하며 배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들고 강가를 찾는다.


그리고 책에서 이야기하는 낚시가 성공할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현실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고 현실에 그 책의 글에 구현되어 있으면 낚시에 실패한다. 그리고 투정을 부린다. 책에서 다루어진 이상향이 구현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낚시에서 진정한 현실은 책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의 경험이다. 그런데 글쟁이는 책을 든다. 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글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투정을 부린다. 세월호의 아픔도 부모님의 눈물을 마주하고 그저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 철학자의 개념으로 왜 이것이 슬픈지 파악해야 하고, 왜 분노해야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신문들을 들고 현실에 대한 무슨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심판자라고 되는 듯이 이야기한다. 심지어 슬퍼하고 분노할 것인지 이해시켜 보라고 한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듯하다.


진짜 현실은 책이 아닌 세월호의 아픔, 부모님의 슬픔, 그리고 우리 민중들의 염원이다. 그런데 책을 든다. 심지어 책조차 들지 않는다. 아예 그들은 딴 세상에 존재한다. 지금 여기 있는 잔혹한 현실에 침묵한다. 이것이 이 땅에 철학이 없는 이유다.


2015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를 위한 철학은 없다. 같이 울고 분노하는 철학에서 우린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벗을 얻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세월호’라는 아픔에 대해 말이 없다.


수행자 싯다르타도 서양 철학의 대가 플라톤도 그리고 교부 클레멘스도 분노하였다. 그 현실 속에 분노하고 울었다. 이들과 달리 2015년 이 땅의 철학과 신학은 현실을 마주해도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마주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께 아파하지도 않는 철학, 함께 분노하지도 않는 철학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겠는가?


철학은 글이 아닌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철학은 현실에 대한 학문이다. 글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글을 참다운 현실이라 생각하고, 그 속에 매몰되어 있는 학문이 아니다. 글은 도구일 뿐이다.


철학은 똑똑한 이의 지적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 속 지혜, 슬기로운 이를 위해 있다. 지금 여기 가득한 울음, 철학은 지금 함께 울어야 한다. 그리고 분노해야 한다. 거기에서 시작한다. 책을 보면서 왜 울어야 하는지 왜 분노해야 하는지 왜 슬픈지 합리적으로 이해한 이후 울고 분노하겠다고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철학자이기 힘들다.


지금 여기에서 철학을 하려 한다면, 지금 당장 책이 아닌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울어야 한다. 분노해라.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그것이 철학이 살 수 있는 길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불교 역경사 쿠마라지바는 말했다. 진정한 깨우침은 현실을 벗어난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화내며 번뇌의 공간 가운데 있다(煩惱是道場). 울고 분노하자.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그때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한 철학이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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