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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콩까는 철학자
  • 전순란
  • 등록 2015-11-12 10: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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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맑음


어제도 오늘도 보스코는 틈틈이 울콩을 깐다. 그제 배나무에서 꽁깍지를 따온 바구니를 내밀면서 나더러 까라기에 내 대답이 “그건 당신이 할 일이지.”였다. 그래서 콩바구니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며 하루를 넘겼다.


오늘 아침에 “콩을 왜 내가 까야 해?”라고 묻는다. “당신이 콩 까는 덴 명인(名人)이니까. 우리 집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일을 하잖아요? 밥을 내가 잘하니까 밥을 내가 하고, 빨래도 내가 잘하니까 빨래도 내가 하고, 아우구스티누스 번역이나 강연은 당신이 잘하니까 당신이 하고, 운전도 내가 잘하니까 내가 하고...” 이렇게 조목이 늘어나자 한참 듣고 있던 그가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콩바구니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긴다. 올해도 울콩은 보스코가 따와서 보스코가 깐다.


그런데 철학교수답게 콩을 까면서 콩에 대한 관찰이 감탄사로 연달아 터져 나온다. “여보, 이 깍지를 봐요. 좌우 엇갈려 다른 쪽으로 젖을 물고 있지 않아?” “콩마다 얼마나 매끈한 이불을 덮고 있는가 봐요. 그것도 홑겹이 아니라 여러 겹 이불이요.” “한 깍지 안에서도 콩마다 칸칸이 따로 방을 만들어 따로 키우는 까닭을 알겠소? 벌레먹고 병들고 못자라 찌그러지더라도 옆방 동기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는 거야.” “... ...”





콩깍지 까는 시간보다 어미 콩깍지의 지혜와 깍지의 구조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감탄하면서 일을 해나가니 철학은 콩 까는 데도 퍽 유용한 학문이다. 아우구스티노회 멘델 신부가 유전의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해낸 것도 수도원 텃밭에서 완두콩을 키우고 관찰하면서였으니 콩은 몸에만 좋은 게 아니라 인류의 과학에, 보스코의 경우 철학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게 틀림없다.


11시경 잠시 들르겠다던 ‘빈둥’의 은진씨가 12시가 다 되어 왔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재미있어 하겠지?”라는 생각을 화두로 함양읍에 자그마한 카페를 살롱처럼 열고서 살아가니까 본인의 삶도 즐겁기만 할 게다. 점심을 함께하면서 최근에는 ‘바느질모임’, ‘글쓰기모임’ 등으로 주변의 인물들에게 ‘재능봉사’를 부탁하는 모임들을 만들어 가는 얘기를 들었다. 할머니부터 어린이까지 함께하는 모임을 구상하는 일은, 우리사회가 횡으로는 연대가 가능한데 종으로는 의사소통이 워낙 안 되니까, 그니의 작은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내리라 믿는다.


그니의 작은딸 시우가 다니는 학교에 70대 영감님이 1학년에 입학했는데 공부도 재밌어하고 읽기를 배우자 교실 앞에 나가서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도 한단다. ‘엄마까투리’를 읽어드리면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하고 아이들 노는 시간에는 애들이 벗어놓는 옷과 양말이며 신발을 지켜주기도 한단다. 오카리나는 배우기 싫다면서 글 배우러 왔는데 쓸데없는 것 배우란다고 짜증을 냈다가도 이튿날 교장님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기도 한단다.




워낙 사람 모일 공간이 귀해서 은진씨는 ‘빈둥’에서 가까운 성당이 공간을 제공해 준다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단다. 정상적인 사제가 와서 성당이 지역사회에도 이바지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금산 사는 춘희씨가 4시경에 도착하였다. 작년 대전 정하상관에서 있었던 미루의 효소단식피정에서 만난 친구다. 지리산 단풍이라도 보러 오라 했는데 금방 날이 어두워져 도정 스.선생댁과 운서 용식씨네를 차로 둘러보고 온 게 전부다.




하룻밤 묵으러 온 친구여서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길어져 무릎을 맞대고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역사를 쓰면서 살아간다. 여인들이 서로 나누는 ‘허스토리’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역사들이다. “내 얘기를 소설로 엮으면 실히 열권은 넘을 거야.”라는 말은 시골 할머니들도 예사로 할 만큼 각자가 살아온 삶은 소중한 기억으로 엮어진다.


자기가 살아온 흔적을 싹 지우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사회와 역사에 책임감을 도통 안 가진 사람일수록 그런 얘기를 쉽게 한다. 각자의 인생은 창조주께서 그 사람과 함께 적어오신 역사서인데 말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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