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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잎 두 잎 갈바람에 업혀가는 노인들
  • 전순란
  • 등록 2015-11-05 16:48:24
  • 수정 2015-11-05 16: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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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4일 수요일, 맑음


아래층 마루 창밖으로 담쟁이가 커튼처럼 둘러쳐 있다. 고운 단풍이 아침햇살에 투명하여 더 아름답다. 몇 해 전 구청에서 정원 가꾸기를 배운다던 이웃 부부가, 우리가 집을 자주 비운다는 걸 알고서 정원 가꾸는 실습 차 우리 정원을 손봐주겠다고 나서기에 덜컥 대문열쇠를 맡긴 적 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정원을 배우기 시작한 초짜라는 사실을 간과한 게 실수였다.


30년 넘게 벽돌집 전체를 감싸고 집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온 담쟁이, 굵은 줄기는 내 팔뚝만큼이나 실하던 담쟁이를 톱으로 자르고 가위질해서 건물에서 모조리 걷어내고 말았다. 더구나 주목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실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가지쳐 우아한 드레스를 깡동치마로 만들고 말았다. 바위를 기던 주목들도 안가지들을 모조리 쳐내서 부스럼난 시골 아이 상고머리처럼 해놓았다.




축대 아래로, 담 밑으로 가득 자라던 더덕마저 덩쿨도 꽃도 다 사라졌다. 그렇게 해놓고서 석달 만에 소리 소문 없이 이사를 가버려 더 이상 사고가 안 난 것만도 다행이었다. 보스코는 어떻게 무작정 집열쇠를 맡겼느냐는 한심한 표정이었다. 벌써 10여년전 일이다.


겨울이면 눈이 쌓이고 그 눈이 녹다가 얼다가를 거듭해서 손바닥만한 마당의 잔디가 얼어 죽고 이듬해면 봄이면 다시 잔디를 사다 심기를 수십년 거듭해오다 몇해전부터는 그냥 풀밭으로 버려두고 있다. 이젠 다 귀찮아서 저 풀밭을 파내서 채소밭을 만들어 상추 쑥갓 아욱이나 파를 심겠다고 했더니만 보스코가 “여보, 정원 좀 그만 괴롭혀요.”란다.


아마 10여년 뒤, 아니면 그보다 일찍 지리산 휴천재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살이로 돌아오면 그땐 저 빈터에 삽질과 호미질을 해가며 텃밭을 가꿀 것 같다. 옛 내시무덤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 마당 구석에서 이끼를 뒤집어 써 부처님처럼 치장을 하고서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다.



쓸쓸할 때는

왜 마음이

이다지도 맑아지는가

 

눈도 없는

저 석불의 적막한 귀에

홀연히 때까치 울음소리 들리듯

 

내 사랑 하나

사뭇 멀리서도 아른거려

이 가을 햇빛으로 믿고자 하네. (강정중, “이 가을 햇빛을”)

 

3시에 우이동을 떠나 엄마가 계시는 미리내 ‘유무상통’에 왔다. 내일 이곳 어르신들에게 보스코의 특강이 있다. 가을이 너무 가물어선지 오는 길의 은행나무들이 단풍도 들기 전에 지레 돌돌 말려 떨어지고 말았다. 이 집에서는 바삭 소리를 내면서 한 잎 두 잎 갈바람에 업혀가는 노인들을 본다. 


한 달에 한번 올 적마다 누가 치매가 심해져 효도병원에 입원했고, 누구는 넘어져서 뼈가 다쳤고, 누구는 큰아들이 돈 땜에 엄마의 양로원 보증금을 빼내려고 모셔 나갔고, 누구는 병원에 들렀다 세상을 떠나 엊그제 이 집 납골당 '하늘문'에 유골을 안치했다는... 삭풍에 낙엽 구르는 소식들이다. 이모 말씀으로는, 13년전 함께 들어온 노인들이 4분의 일도 안 계신단다.





엄마를 언니처럼 따르던 지집사님도 치매가 드러나 삼성병원에 입원했다는데 문선생님 모친은 맑은 정신에 건강도 좋아서 걸음도 똑바르시다. 엄마 얼굴에 뽀얗게 살이 올랐고 밤에는 내 잠자리도 펴주실만큼 정신도 맑아지셨다. 


엄마의 보호자격인 이모가 오히려 덜 좋으신 것 같은데 성격 탓이리라. 엄마는 갈수록 긍정적으로 변하시면서 하늘가는 입장권을 손에 쥐신 초연한 표정이다. “댁네 모친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양반이야.” 한 상에 밥을 잡수시는, 무뚝뚝한 아주머니가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참 듣기 좋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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