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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의 눈길만으로도 산꽃들은 행복할 게다
  • 전순란
  • 등록 2015-10-06 16: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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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5일 월요일, 맑음


“마님, 뭐하셔유?” 어제 오후에 헤어진 미루의 전화다. “뭘 하긴... 남편 없을 때 할 일이 태산이지. 우선 배나무 밑 약초밭 풀매고, 무 순 옮겨 심고, 여름 내내 곰팡이 난 싱크대 밑 청소하고, 뒤꼍의 포인세티아 화분들 제멋대로 컸으니 손질도 하고...” 머리 속에서 DVD가 돌아가면서 한나절치 일을 순식간에 영상으로 돌린다. 이래서 여자들은 머리가 ‘멀티’다. 최신 버전의 최우수 멀티 머리를 주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까지 보태면 여자 일 하나 더 추가!


“그래요? 그럼 호박죽꺼리 갖고 휴천재로 건너갈 게요.” “요즘 독거노인 관리에 정신이 없다”던 그니의 '독거노인 장부'에, 남편 서울 간 지 하루 만에 나마저 등재되고 말았나 보다.




지리산과 가을하늘, 한가한 구름이 쉬어가는 휴천재 테라스에다 아침상을 차렸다. 둘이는 호박죽을 먹고 나는 오늘도 보식 중이어서 두유에 미루네 ‘생생투’를 먹었다. ‘팔보식품’ 회장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집 효소와 식품을 맛있게 먹어보이는 장면도 시연하고, 간식으로는 효소에 함초에 감잎차를 챙겨들고서 셋이서 산행을 나섰다. 두 시간 코스일 용유담까지의 왕복에다 이사야씨가 칠선계곡 산행을 슬쩍 끼워 넣었다. 기왕이면 이 가을 초입에 칠선계곡을 가 보잔다. 한라산 탐라계곡, 설악산 천불동 계곡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지리산 칠선계곡을 내가 마다할 리 없다.



추성의 마지막 민박집, 여름 장사가 끝나고 월요일 아침이라 사람들 발길도 끊겨 한가한 공터에 차를 놓아두고 가도 일 없을 것 같아서 슬쩍 자동차를 주차해 두고 ‘뒤지터’ 오르는 고개를 헐떡헐떡 올랐다. 그러자 시원한 물소리와 더불어 툭 터지는 세상!


하늘 위로는 나뭇사이로 멀리 천왕봉이 보이고 샛길의 가을꽃들이 발에 감겨온다. 꽃향유, 물봉숭아, 공작, 개미취, 큰씀바귀, 괴불주머니...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며, 그것들을 지우신 하느님의 시선을 흉내 내며 걷다 보니 산행에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간다.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아도 창조주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저 꽃들은 행복할 게다.


산사람 이사야씨는 우리 두 여자의 해찰에 속이 터져서 저만큼 휘적휘적 사라져 버렸다가도 행여 곰 같은 나무꾼이 나타나서 두 선녀의 옷이라도 감출까 걱정스러운지 다시 뒷걸음질을 해서 돌아오기를 거듭해야 했다.




몇 해 전 태풍으로 망가진 출렁다리도 손질되고(왜 하필 빨강색으로 했담?) 선녀탕 다리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왜 하필 이 계곡만 일년에 4개월만, 그것도 하루 40명씩만, 그것도 올라가는 날, 내려오는 날을 따로 정하는 등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유난을 떠는지... 하여튼 이러저러한 제한 덕분인지 선녀탕까지 등산객을 단 한 명도 못 만났다. 뒤지터에 너부러져 있던 아저씨 한 사람을 본 게 오늘 인적(人跡)의 전부였다.



‘귀요미’네 부부와 나 이렇게 세 사람만을 위해 열려진 산행길의 여유로움과 초가을의 햇살을 만끽하면서 날듯이 다녀온 선녀탕! 산짐승들 먹을 도토리가 사방에 수북한 것도 맘에 들었다.




발치료차 새로 주문한 신발을 신은 미루의 발도, 바닥에 보조기구를 깔고 걸어본 내 발도 이 정도면 설악산 대청봉은 물론 스페인 산티아고도 걸을 만하다는 자신감을 두 여자에게 주었다. 그래서 오는 19일에는 단풍이 한창일 설악을 걸어볼까 하여 강릉에 사시는 내 패친 김병주섐에게 카톡을 날렸다.




저녁 6시 30분. 어제 혼자 서울로 병원나들이를 간 보스코가 버스로 도착했다. 우리 주치의 곽선생님에게 가서 엊그제 빠진 이빨을 (13일의 강연 땜에 본격 치료를 못하고) 임시로 다시 붙이고, 14일에 올라가서 한전병원에서 오늘 붙인 이빨과 곁의 상한 송곳니를 빼기로 의사와 예약을 하고 돌아왔다. 하룻만의 재회를 반기는 남편을 싣고 돌아와, 차려준 저녁을 먹으면서 어제와 오늘 일을 신나게 얘기하여 모처럼의 홀로서기로는 퍽 양호한 성적을 올린 남편을 바라보는 일도 자뭇 흐뭇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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