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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 전순란
  • 등록 2015-09-26 16:50:03
  • 수정 2015-09-30 11: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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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5일 금요일, 맑음


장내시경을 받으려면 먼저 의사와 면담을 해야 한다기에 30일의 내시경 시술을 위해 오늘 9시에 면담이 잡혀 있었다. 한일병원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집을 나와 걷다보니 아침에 뭘 했는지 아침기도도 티벳요가도 보스코에게 아침을 챙겨주는 일도 생략한 길이다. 밤에 생각이 나서 아침으로 뭘 먹었느냐니까 떡 한 조각에 막대 커피 한 잔에 과일 한 조각을 먹었단다. 마누라가 챙겨주지 않으면 그럭저럭 그의 배가 저절로 빠지겠구나 싶다. 그의 인품을 나타내는 배야말로, 홍해리 시인의 말씀대로, 내가 대역죄인이다.


병원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옥련씨의 VIP가 되어 모든 도움을 다 받고 내 시경 전날 먹을 약(보스코에게는 일명 ‘물고문약’)의 설명까지 듣고서야 병원을 나왔다. 의사는 내 여러 해 진찰 기록들과 내시경 사진을 보고서 그다지 염려할 일은 아닌 성싶다고 안심시킨다.



수유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보니 우이천에 내 팔뚝만한 잉어들이 노닐고 해오라기가 살생을 할까말까를 망설이는 표정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흐르는 맑은 물이며 천변으로 이어진 산책로와 운동시설이 지방자치에서 얻어진 소득이다. 천년을 흐르는 우이천에 닦인 자연석을 다 걷어다 팔아먹고서는 이에 항의하자 천변엔 그물망을 씌우고 바닥엔 시멘트를 깔아버리던 공무원들이 어디 가고 지금은 수변에 풀이라도 자라고 물고기라도 노니는 광경이 뿌듯하다.





수유역 가는 길에 ‘다꼬르부원’이라는 이불집이 있다. 20년 넘게 우리 집 이불을 책임져 온 가게다. 부부가 억척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한때는 만들기 무섭게 팔려나갔지만 요즘은 불경기가 하도 심해 손님 구경마저 힘들단다.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지하철 입구에서 푸성귀 몇 가지를 벌여놓고 파는 아줌마 고단한 얼굴에서도 생생하다.


오늘도 이력서를 들고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찾아가는 젊은이들이 전철 안에서 눈에 띈다. 3포세대(三抛世代)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 전 얘기고, 뒤이어 5포세대가 ‘대인 관계’와 ‘내 집 마련’을 아울러 포기하더니, 요즘의 7포세대는 ‘하고 싶은 일’과 ‘꿈’마저 버렸다니...


하지만 며칠 전 만난 이병철 선생은 사태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정치가들이나 기득권 세대에게 일체의 기대와 희망을 포기한 지금 세대는 기존 사회가 몰고 가는 방향을 단념하고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삶을 창조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엿보인다는 설명이었다. 그의 혜안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이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문병란, ‘직녀에게’에서)


김원중씨의 노래로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을 절절한 그리움으로 들려준 문병란 시인이 타계했다는 뉴스가 떴다. 오늘 유엔으로 간다는 여자는 대북협박이나 일삼으면서 북한의 자동 붕괴나 기다리고, 선거철마다 북한군의 무력 준동이라는 협력을 얻어내는 세력이니 시인이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민중 시인으로, 전교조 교육자로, 호남의 민주투사로 겨레의 고난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온 문시인이 하늘에서 남과 북이 연인처럼 반겨 만나는 날을 멀리 내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카메라를 수리 받았다. 보스코가 뷰파인더를 고장낸 게 아니고 우리 둘 중의 누군가가 무슨 단추를 잘못 눌러서 촬영시 영상이 안 보였단다. 그 동안 보스코는 4.19국립묘지 근처로 나가서 정지영 감독과 점심을 하고 들어왔다. 정감독이 제작하는 다큐영화에 나올 어떤 문헌을 두고 의논을 한 듯하다. 기득권세력의 금기사항을 노골적으로 다룬 '천안함프로젝트'나 '남영동 1984' 등 현정권의 죄악상을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열정이 놀랍다.


어제가 작은손주의 생일이어서 둘에게 줄 가방을 추석빔으로 샀다. 아빠가 유엔총회에 출장가고 없어서 형 혼자 동생에게 불러주는 축하노래 영상에 할미의 가슴이 조금 아렸다.


저녁에는 나물반찬을 마련하고 전을 부쳤다. 내가 단식 중이선지 기름 냄새가 유난히 느껴지지만 집안이 한데 모이는 자리에 내놓을 음식이어서 기분이 좋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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