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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교회, 웰빙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최진 기자
  • 등록 2015-09-21 18:39:30
  • 수정 2015-09-21 2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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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호인수 신부(인천교구),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배형진 신부(말씀의 선교수도회),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 최진 기자


천주교 마산교구는 19일 경남 밀양시 명례성지에서 ‘현대 사회에 던지는 교회의 메시지’를 주제로 제5회 명례성지 심포지엄을 열고, 세상에 소금이 되기 위한 교회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와 배형진 신부(말씀의 선교수도회)가 발제를, 호인수 신부(인천교구)와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가 각각 논평했다.


▲ 9월 19일(토) 오전 10시 30분 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 제5회 명례성지 심포지엄 ⓒ 최진 기자


강 주교는 ‘한국교회는 어디로? 중앙에서 변두리로!’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주의하십시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웰빙 교회, 그런 교회가 돼서는 안 됩니다”고 강조했다.


강 주교는 역대 교종들의 사회적 회칙이나 선언들을 인용하면서, “명례성지의 소금의 영성이란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사라지면서 대상을 더 풍요롭게 하고 오염을 정화하는 것”이라며 “한국교회가 앞으로 나갈 미래에 대한 물음도 결국 예수님의 강생에 닮아가려는 신비의 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과 행동은 가톨릭교회의 역사, 역대 교종들의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맥락 안에서 서서히 성숙하여 온 것”이라며, 최초의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교종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1891)부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의 문헌까지 가톨릭교회가 사회에게 던진 윤리적 판단과 가르침을 설명했다. 


강 주교는 “이런 역대 교종의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이 지역 교회 안에 소금처럼 녹아들어야 하는데 아직도 녹아들지 않았다. 작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르침을 주셨지만, 한국 교회가 얼마나 실천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피상성이란 ‘진리가 무엇인가?’, ‘정의가 무엇인가?’ 등 인간의 삶에 있어 실질적이고 사는 데 있어 필요한 질문이나 판단은 피하고, 대신 최신 유행이나 오락에 빠지는 것이다”라며, “교종이 아시아 주교들에게 교회에 중대한 위기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피상성이다”고 강조했다.


강 주교는 “복음이란 가난하게 사신 예수께서 동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들려주신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힘을 갖게 되면서 가난한 이들과 갈수록 멀어졌다”며,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돼,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이다. 교종은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한국 교회의 ‘웰빙’을 지적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이제 한국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느꼈던 것을 느낄 수도, 나눌 수도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교회가 복음을 살고, 복음이 제시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 한다’는 교종의 말씀을 교회는 잘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종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오는 ‘웰빙’의 원어 베네 에세레(bene essere)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것이다. 교종은 한국 교회에 이토록 신랄하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우리 한국 교회에서 얼마나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마무리했다.


강 주교의 발제에 대해 인천교구 호인수 신부는 논평에서 성직자 중심적인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소통이 가능한 교회, 담이 없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 신부는 건축가와 나누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교회가 사회에 열려있지 않고 담을 치면 안 된다. 교회는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9월 19일(토) 오전 10시 30분 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 제5회 명례성지 심포지엄 ⓒ 최진 기자


그는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이 아무리 의견을 내고 시위까지 해도 주임 신부가 결정한 것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여전히 성직자 중심의 교회이기 때문이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한국 교회가 아직도 수직 사회이고, 그래서 명령과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가 왕이고 교구에서는 교구장이 왕이다. 현실이 그렇다”고 밝혔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교구장 주교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뀐다. 교구장은 교구의 법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안 됩니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수정되지 않는다”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하다. 닫혀있는 교회, 나밖에 모르는 교회, 주차장에 담을 치는 교회는 열린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부는 굽실거리는 신자들 덕분에 편하다. ‘마리아처럼 순종해라’고 하면 교우들은 ‘아멘’을 외친다”고 덧붙였다.


말씀의 선교수도회 배형진 신부는 ‘잠자는 의식에서 깨어난 의식’이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법과 형식, 외형과 선교 중심의 ‘잠자는 의식’과 자비를 베풀고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믿는 ‘깨어있는 의식’을 비교했다.


배 신부는 “교회 내부가 잠자는 의식 속에 있어서 교회 내부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를 비방하고 분열을 일으킨다”며 “가톨릭 신자라면 예수의 깨달음의 단계로 돌아가 영성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회의 의식이 종합적으로 잠자고 있으므로 신앙이 가슴과 생활에 있지 않고 입술에 있다”며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을 중요하게 느끼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잠자는 의식은 서양의 백인 중심 교회가 가르친 집단적 선교의 개념을 쫓고 ‘우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시작됐다”며. “신자를 늘리고 세례를 많이 받는 선교 중심의 집단주의는 교회를 사람보다는 ‘고양이 전례’와 같은 잠자는 의식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밝혔다.


배 신부는 “천국은 여기에 있고,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며 “예수님은 가르칠 때 말고는 잘난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 항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속에 있었고 그것이 깨어난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논평으로 김정용 신부는 제멋에 취해 본질을 잃어버리는 신학의 위기를 언급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다시 중심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신부는 “신학을 하다 보면 정말로 중심으로 간직해야 할 것을 천대하고 변두리로 밀어내는 경우가 많다”며. “눈물 흘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전례가, 신학이, 사목이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우리가 중심으로 되돌려놓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공적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하느님의 나라이다”며.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이들에게 기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의 신학과 신앙, 전례와 사목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학이 고급스럽고 학문적이고 멋지다는 이유로 근본을 망각하게 하면 핵심에서 벗어나게 된다”며, “우리가 변두리로 치워놓았던 하느님의 나라를 중심에 모시는 것이 이 자리의 의미다”며 논평을 마쳤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를 포함해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심포지엄 이후에는 한국 교회가 자신을 녹이는 값진 소금이 되기를 희망하는 미사가 봉헌되었다.


명례성지 출신의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는 소금과 누룩 장수로, 1866년 병인박해 때 대구에서 순교했다. 그는 순교 직전에도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며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3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다음은 강우일 주교 발제문 전문이다.



< 한국교회는 어디로? 중앙에서 변두리로! >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에 오셔서 우리 사회에 큰 반향과 감동을 남기고 가셨다. 국민 대다수가 교종의 발자취와 언행에 깊이 감동하며 위로를 받았다. 특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보여주신 자애롭고 애틋한 공감의 자세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위안을 주었다. 교종이 4박 5일 동안 여러 곳을 방문하며 남기신 메시지를 다시 더듬어보면, 그 핵심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펴내신 당신의 가르침을 한국이라는 현실 속에 적용하여 강조하고 되풀이해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역사, 역대 교종들의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맥락 안에서 서서히 성숙하여 온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살았던 남미 대륙의 가톨릭교회가 형성해 온 토양에 뿌리를 박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면서 돋아난 열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제5회 명례성지 심포지엄에서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 최진 기자


세계는 19세기 말부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대두되면서 과거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사회문제, 경제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농경문화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하여 노동 대중으로 바뀌면서 자본가들 밑에서 노예적인 노동을 강요당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많은 이들이 고통당하며 이렇게 불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가톨릭교회는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윤리적인 판단과 가르침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레오 13세가 이러한 사회적 가르침을 편친 첫 교종이었다.


레오 13세 ‘새로운 사태’(1891년)

가톨릭교회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펴낸 노동문제지침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공동선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의 역할과 노동조합의 역할, 가톨릭적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제시함으로써 후대 노동문화 발전의 원천이 되었고 그래서 ‘노동헌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오 11세 ‘사십 주년’(1931년)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지 40년 후, 1931년 비오 11세는 ‘사십 주년’이란 타이틀의 새로운 회칙을 발표하였다. 


사회와 경제 현안이 단순히 사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임을 강조한다. 윤리가 개인 차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사회 차원에도 윤리적 사고와 판단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1961년)

‘사십 주년’ 반포 30년 이후 즉 ‘새로운 사태’ 반포 70주년을 기해 이 두 회칙을 전제로 하여 그 후 새롭게 변화된 상황과 문제점에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을 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산업 분야 간의 균형적인 발전과 국제적인 불균형 극복, 저개발 지역에 대한 원조, 국가 간 경제 격차에 대한 정의의 요구를 제시한 가르침이다.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1963년)

‘어머니요 스승’ 반포 후 2년밖에 안 되었지만, 이 시기에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패권 다툼으로 동서 진영의 냉전 사태가 격화되었다. 쿠바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가 미사일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새로운 세계 대전이 곧 터질 것 같은 위기가 조성되었다.

세상에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개인들 사이에서의 질서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질서, 정치 공동체 간의 질서, 국가들 사이에서의 질서를 확립하여야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르쳤다.


바오로 6세 ‘사목헌장’(1965년)

이 문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중의 하나로 반포되었지만 그전의 역대 교종들의 사회적 가르침을 집대성한 내용이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 문화, 경제, 사회, 정치 문제를 전반적으로 폭넓게 성찰하면서 ‘지상의 평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적인 가치를 구현하며, 국가 간에는 전쟁을 회피하고 국제적인 협력을 통하여 평화를 실현하도록 호소하는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1967년)

‘사목헌장’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인간의 완성, 인류 공동체의 발전이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참 발전이란 무엇인가를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인간 개개인이 그 존엄과 품위를 갖춘 가운데 완성으로 나아가는 참된 발전이 이어져야 세계의 평화가 도래함을 가르쳤다.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의 가르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연합회(셀람, CELAM)는 총회를 통하여 두 차례 아주 중요한 문헌을 발표했다. ‘민족들의 발전’이 나온 바로 이듬해에 셀람은 ‘메데인 문헌’(1968년)을 발표했다. 그 후 11년 뒤엔 ‘푸에블라 문헌’(1979년)이 발표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단은 이 두 문헌 안에서 남미 여러 나라에서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다국적 복합기업이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공통된 사회경제 상황을 직시하였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힘없는 자들의 인권은 유린당하는 노예적 상황이 확대되니, 이런 사악한 구조로부터 시민들이 해방되고 인간의 존엄한 인권을 되찾도록 교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2007년 셀람은 Aparecida 성모성지에서 총회를 열고, Aparecida 문헌을 발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단순히 교회가 사회적 현실 속에 참여해 들어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구조, 정부의 구조와 업무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이 최우위에 놓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한 것이다.


‘기쁜 소식’의 기쁨을 되찾고자 하는 교종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종은 현대인들이 극심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의 포로가 되고 그 결과 오로지 안이한 탐욕과 피상적인 쾌락과 고립된 정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며 진정한 기쁨을 상실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안이한 탐욕, 피상적인 쾌락, 고립된 정신이란 오늘의 물질주의가 기반이 된 서구문명의 열매다.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식은 피상성(superficiality)입니다. 피상성은 무엇이 옮은 지 분별하기보다는 최신의 유행이나 기기, 오락에 빠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복음’이란 가난하게 사신 예수께서 동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들려주신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힘을 갖게 되었고 가난한 이들과 갈수록 멀어져 버렸다. 유럽의 모든 도시에 가보면 예외 없이 마을 한복판에 국가 기관의 청사나 공관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웅장하고 거대한 주교좌성당이 있다. 이 공간적인 위치와 크기 자체가 교회의 힘의 상징이고 역사적 실체였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국가, 그리스도교 문화를 이어받은 제1세계에서 교회 리더들이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사회의 주류의 일원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자연히 가난한 이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종은 ‘복음의 기쁨’ 7항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기술 사회가 쾌락의 기회를 증대시켜 왔지만, 기쁨을 낳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은 가진 것 없는 매우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려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서 그들로부터 기쁨을 배우고 복음의 열정과 기쁨을 되찾자고 호소한다.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가난한 이들을 떠나 세상의 중심부에 머물렀기 때문에 변방으로 가라고, 주류에서 밀려난 작은이들이 있는 외각으로, 산동네로 떠나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의 일상생활에 뛰어들어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인간의 삶을 끌어안고 다른 이들 안에서 고통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집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들의 냄새’를 중기고, 양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과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

“한국 교회의 삶과 사명은 궁극적으로 외적, 양적, 제도적인 잣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중산층의 공동체가 되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그 안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또한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입니다.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맨 처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을 꾸짖어야만 하였고, 야고보 사도는 더욱 강하고 더욱 분명하게 그들 부유한 공동체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들을 꾸짖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지는 않지만, 가난한 이들이 감히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또 제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을 잘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을 꾸짖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 안에서 제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어야 할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선교하는 훌륭한 교회이고, 커다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가라지를 심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바로 교회의 예전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하나의 췔빙 교회, 그런 관계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 언론 매체가 어떤 소식을 주로 많이 자주 전하고 있나 살피면, 한국교회의 생태환경을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관심의 대부분이 교회 내부 집안 살림 이야기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이스라엘 전국 방방곡곡 동네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세상을 대상으로 일하셨다. 시선이 밖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시선은 자꾸 교회 안을 향해 오그라들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하였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도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목 패러다임 성찰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목 패러다임을 잘 성찰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해마다 반복하는 우리 교구나 본당 사목의 목표와 지향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나?


본당 사목자가 해마다 본당 사목계획을 세우면서 제일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본당 예산에서 주로 어떤 부분에 지출을 많이 하고 있나?


우리가 교회 공동체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지역 사회의 문제, 지역주민의 고충, 어려움, 아쉬움이 무엇인지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관여하거나 지원하려고 하는가?


교종께서 변방으로 가라는 말씀은 우리의 관심과 행동이 이러한 교회 공동체 바깥에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과감히 옮겨져야 된다는 말씀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오늘의 세계 교회가 몸담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가 구조적으로 큰 결함과 불의를 안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이러한 사악한 구조를 제대로 인지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교회는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시행착오를 반복한다고 본다.



다음은 배형진 신부의 발표문 요약이다.


< 잠자는 의식에서 깨어난 의식으로 >


1. 들어가면서

이 세상에는 약 70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이나 사고방식은 크게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을 무조건 싫어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을 죽어라 싫어합니다. 보수·진보 간에는 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나 의식은 우리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병폐를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할 종교마저도 보수·진보로 갈라져서 편안하게 종교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은 보수·진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람들의 의식을 두 가지로 분석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일깨는데 있습니다.


▲ 제5회 명례성지 심포지엄에서, 배형진 신부 (말씀의 선교수도회) ⓒ 최진 기자


2. 잠자는 의식

가. 보통 의식: 사울(개종 전)과 대사제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의식

사람들의 의식이 잠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두뇌가 잠자고, 사람들의 마음이 잠자고, 사람들의 종교심이 잠잡니다. 많은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랑이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무한한 감정들이 그저 잠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예수님만큼이나 영성적인 단계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으며, 불교 신자라면 부처님처럼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은 광신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폐쇄적이고 집단 이기적인 모습으로 종교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종교심, 영성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지금부터 잠자는 의식 속에서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 신념 중심(마태 7,21-23)

신념중심이라는 종교의식은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교리입니다.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다음 생애 구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교리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냉담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다. 집단 중심(요한 4,20-24)

종교생활을 맹목적으로 할 때 종교집단을 활성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잠자는 의식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세상의 종교들은 자기 종교집단을 너무 강조합니다. 종교 때문에 싸우고 경쟁하고 시기·질투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실천하지 않고 자기 집단에 이득이 되는 교리와 격식을 활성화 시키려고 하는 것은 잠자는 의식이 가지는 종교 흐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라. 제도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 맹목적인 신념 중심으로 종교집단에 들어갈 때 종교집단을 전문적으로 유지, 발전, 활성화하기 위해서 철두철미한 제도로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제도 없이 종교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제도 중심적인 흐름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냉담자들이나 이혼한 사람들에게나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의 제도, 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도와 법을 초월해서 예수님의 자비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 법 중심(마태 12,1-14)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위해서 맹목적인 종교를 가지고 종교 집단에 들어갈 때 종교 제도를 잘 지켰고, 또 그것을 활성화하가 위해서는 법이 절대적이라고 강조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법이 중요하고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람보다 법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종교생활을 할 때가 흔히 있습니다. 법은 필요하지만, 사람이 더 우선이고 절대적이라는 식으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바. 형식중심(마르 7,1-23)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할 때 전례, 예절, 의식, 격식 중심으로 하는 성향이 발생합니다. 종교생활을 형식 중심으로 할 때 기복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 형식 중심적인 종교의식은 사람을 그 종교원리에 마음을 가지는 데에서 방해되거나 부족합니다. 한국가톨릭교회는 형식을 많이 강조하는 편입니다. 성당에서나 수도원에서 신심 단체에서 여러 가지 종교 활동을 하면서 마음보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을 강조할 때가 많습니다.


사. 외형 중심(루카 9,57-62)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를 실천할 때 겉으로 보이는 건물, 의상, 신자 수 중심으로 하는 성향이 생깁니다. 사람이나 종교에 내적인 면보다 외적으로 보이는 장식, 화려한 것을 활성화 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외적인 것을 활성화하는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성당교회 건물, 복잡한 전례, 격식 중심적인 신심, 겉으로 보이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의상, 신자 수 등 외형적인 것을 활성화 시키는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전교 중심(루카 11.52)

잠자는 의식 속에서 교회의 전교 흐름을 살펴보면, 먼저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 아닌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그다음에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전교는 겉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 교회에서 교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회심을 심어주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일반적으로 맹목적으로 서양의 백인 중심 전교 흐름을 따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전교는 전통적인 개념의 개종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회심입니다.


자. 목적(마태 25,31-46)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맹목적으로 위의 7단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교리, 전례, 제도 등을 일반적으로 강조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먼저 예수님처럼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일을 하지만 제도 중심 속에서 안주하는 성향을 또 가지고 있습니다. 


3. 깨어난 의식

가. 사도 바오로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의식(요한 3,19-21)

깨어난 의식 속에서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의식 속에 있는 단계와 비슷하게 7가지 단계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신앙 중심(요한 3,21)

신앙을 신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탐구, 그리움, 목마름입니다. 교리와 전례가 나쁘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으뜸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다. 개인 중심(요한 8,12; 9,48-59; 11,25; 14,6-7)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조직중심이 아니라 한 개인이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자들에게는 개인 중심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 복음 중심입니다. 그래서 교회 집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성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라. 우주 중심(마태 5,43-48; 19,21-22)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제도를 초월하여 온 우주가 중심이 됩니다. 하느님이나 예수님만큼 넓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도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 모든 생명에 넓은 마음, 너그러운 마음,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해 주셨습니다. 종교 때문에 경쟁하고 벽을 쌓고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 자기 자신(루카 17,20-21, 요한 10,28-30)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개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깨어난 의식 속에서 법은 양심의 법으로 변화됩니다. 양심의 법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중심은 배려하는 법, 존중하는 법, 그리고 베푸는 법입니다.


바. 마음 중심(마태 6,5-8)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모든 종교 실천의 흐름은 마음이 됩니다. 모든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침묵기도, 관상기도 그리고 알아차림의 기도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진정한 관상과 마음의 기도는 아직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가 중심이 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 내면 중심(요한 3,18-22)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를 드러내는 모습이 일반적으로 외적인 중심이라면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그 모습이 내적인 중심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종교 진리를 의식하고 깨닫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종교라는 것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의 중심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 전교는 자기 자신의 성화와 세상의 성화입니다(마태 7,15-20)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신자 수나 종교 집단의 확장보다는 각자의 마음을 성화하는 데에 힘쓰게 됩니다. 종교는 입으로 전파한다고 해서 진정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의 원리를 실천함으로써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전교는 사람이 종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그 자체만으로 참다운 전교가 됩니다. 


4. 나가면서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구원을 통해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난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과 종교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영성, 의식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그 자체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종교적인 진리와 깨달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마음, 한 공동체, 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많은 종교집단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모습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초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모습처럼 진정한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성은 한 신앙, 한 공동체, 그리고 한마음입니다. (사도 4,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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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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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mrdkim2015-09-28 15:30:48

    본당에서는 주임 신부가 왕이고 교구에서는 교구장이 왕이다. 현실이 그렇다”고 밝혔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교구장 주교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뀐다. 교구장은 교구의 법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안 됩니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수정되지 않는다”며 “이것은 굉장히 심각하다. 라는 말씀이라던가,
     가난한 이들이 감히 교회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또 제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번영에 대한 유혹입니다..라는 우리교회가 앞으로 가야할방향과 고쳐야할 폐단들이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주 성령님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지상천국을 선포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그 천국의 시민이 되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보며 영광 감사 드리며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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