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세 달치 농사를 사흘에 해치우고서...
  • 전순란
  • 등록 2015-09-11 15:53:58
  • 수정 2015-09-15 12:51:08

기사수정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맑음


햇살은 따갑지만 전형적인 가을하늘이다. 새벽에는 부부가 테라스에 나와서 ‘별이 쏟아지는’ 가을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동쪽으로는 카시오페아 아래로 페르세우스와 그 왕자가 구출하러 온 안드로메다도 한 눈에 보였다. 남쪽으로는 궁수(弓手, sagitarius)의 현란한 위용이, 머리 위에는 여름밤의 대 삼각형(백조좌, 독수리좌, 거문고좌)이 빛나고 있었다. 휴천재의 특전이기도 하다.


체칠리아씨가 전화를 해 와서 자기 남편은 절대로 우리 집 밭까지 내려와 농사지을 생각이 없다고 버틴단다. 하지만 여자가 보기에 비옥한 우리 땅에 올가을 양파도 심고(사먹는 동네 양파에는 성장촉진제를 얼마나 많이 뿌리는지 눈으로 보아서 안다) 마늘도 심고, 내년에는 감자도 놓아 두 딸네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심기만 하면 손질이 안 가는 작물들이다.




밭에 거름 부대를 마저 옮기고, 거름을 마저 뿌려 밭을 뒤집고, 비닐로 멀칭을 하는 일이 보통 아니다. 보스코는 부정맥이 도져 (같은 병을 앓는 진이엄마 표현대로는 “심장 한 사라!”) 힘을 못 쓰고, 체칠리아씨는 거름부대 나를 체격이 아니고, 나 혼자서 감당을 해야 할 처지였지만 “에라, 모르겠다. 이왕 망가지는 김에...”라는 뱃장으로 밭에 내려갔다. 그 20kg짜리 거름을 몇 포 끙끙 나르는데 드물댁이 지나간다. “아줌마, 나중에 맛있는 거 사드릴 게 이것 좀 같이 들어 줄라우?” 그니는 말없이 밭으로 내려와 거름부대를 함께 들어준다. 혼자서 용쓰던 힘이 반감된다. 보스코에게는 풀밭에 예초기 좀 돌리라고 부탁했다.


뒤이어 체칠리아씨가 내려와 퇴비를 밭이랑에 뿌리고 괭이로 거름을 섞어가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녀서 보스코가 연신 감탄에 감탄을 보낸다. 나와 체칠리아씨가 멀칭을 시작한 후 드물댁이 다시 지나가다 우리 일하는 꼴을 한참 지켜보며 “참, 못도 한다!”는 얼굴이더니 밭으로 들어와 한 수 가르쳐준다.





비닐을 두룩 위에 올려놓고 차츰 펴가면서 두 여자가 양편 고랑에 앉아서 흙을 덮어가란다. 그 요령대로 하니 비닐이 펄럭이지도 않고 힘도 덜 들고... 밭고랑의 직접 실습은 시골살이에 큰 보탬이 된다. 두 고랑을 마치고 허기져서 점심을 먹었다. 보스코는 예초기를 돌리지만 석 달 웃자란 배나무 쪽 잡초를 두고선 낫으로 베내야 한다면서 손을 들고 만다.


어차피 인생은 실전! 점심 후 체칠리아씨를 도정으로 데려다 주고서 돌아와 드물댁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살인적 더위에서 보스코를 밭으로 다시 불러내는 일은 자칫 살부행위(殺夫行爲)다. 토요일과 화요일 행할 수녀원 강연을 준비하는 중이기도 하다. 드물댁은 이 동네 아줌마들 가운데 ‘아르바이트’가 적은 편이어서 기꺼이 응한다, 나랑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그러고서 피나는(땀나는) 천리마운동이 시작되었다. 네 두럭의 멀칭을 마치고, 배밭 주변에 한 길 넘게 자란 잡초를 낫질하여 베어내고, 체칠리아씨가 자기 밭에 심다가 방금 가져다준 배추 모종을 심고, 어제 새로 만든 애기이랑에다 로메인상추, 양상추, 쑥갓, 무, 적상추 씨앗을 뿌렸다.


물까지 주고서 뒷마무리를 하고나니 세상이 캄캄하다. 하기야 열흘 후면 추분. 보스코 말로는 내가 세 달치 농사를 사흘에 다 해치웠단다(저녁에 다녀간 미루 말로는, 이탈리아에서도 내가 노는 품이 삼 년 치를 석 달에 해치우더란다). 몸이야 천근이지만 이렇게 해치워야만 내일 서울길이 맘 편하지...





미루가 ‘오랜만에’(우리 사이에 한 주간만이면 무지무지 오래) 이사야씨와 휴천재를 찾아왔다. 산청에서 마르가리타 피자 한 판을 사들고서. 보스코는 입이 헤벌어져 핸드폰의 온갖 문의사항을 다 풀어놓아 그니가 밤늦게까지 핸드폰을 똑딱거리게 만든다. 그니와 함께 있으면 나도 도무지 피곤을 모르겠으니 그니에게는 꼬리가 아홉인지 잘 세 보아야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