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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밤길'
  • 전순란
  • 등록 2015-09-09 15:49:08
  • 수정 2015-09-15 13: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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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7일 월요일, 맑음


밤새 선잠을 잤다. 엄마의 숨결은 고르디 고른데도 언젠가 저 숨을 멈추실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듯하다. 화장실을 가시면서 휘청휘청 옷장 문을 붙잡더니만 다음 손잡이를 찾아서 다음 벽으로 갈 화살표로 삼으시는 동작이다.


몇 주 전까지 계시던 방은 옷장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화장실로 가셨는데 이번 3층 방은 왼쪽으로 돌아 더듬어 가셔야 화장실 문이 손에 잡힌다. 지난 12년간 밤마다 눈을 감은 채로 익히던 손놀림이 방향을 잃자 두 발이 서로 꼬인다. 지켜보던 내가 가슴이 철렁하는데 엄마는 용케도 평형을 되잡고서 화장실로 들어가신다. 하룻밤에 네댓 번 되풀이되는, 엄마의 힘겨운 ‘밤길’이다.


일을 보고 나오시면서 정성스레 ‘똑!’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으신다. 혼자 계시는 방이니까 화장실 문을 열어두시라고, 그래야 손잡이를 찾느라고 헤매시지 않는다고 호천이가 누누이 일러드렸지만 얌전히 문을 닫아두신다. 나가실 때면 방문도 꼭 닫고 춤에서 열쇠를 꺼내서 착실히 잠그신다.


내 신발도 이모 신발도 방밖에 있는데 엄마 신발은 입실과 더불어 신발장 속에 고이 모셔진다. 지팡이도 방 앞에 두시면 짚고 나가기 쉬울 텐데 신발장 문을 열고 그 안에다 고이 모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켜본 엄마는 쓸고 닦고 치우고 정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분인데... 엄마 속에 있던 다른 자아가 되살아나서 활동하는 것 같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치매가 오기 시작하면서 평소와 전혀 다른 언행을 곧잘 해서 사람을 당황케 한다는데... 예컨대 보스코처럼 평소에 말수가 적고 착하고 유순한 성격에다 내 말에 고분고분했던 사람은 이제 차차 수다스럽고 사납고 욱하는 성미로 변할까? 늙어가면서 그의 내심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온다면 큰일인데....


유뮤상통을 떠나 휴천재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우리 둘은 안락사가 살인이냐는 법률문제와 자살이냐는 신앙문제에 관해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마감하는 법, 어느 고승처럼 배낭에 돌을 메고 호수로 보트를 몰아가 물속으로 사라져 다비식마저 생략하고 물고기들에게 살보시를 하는 방법 등을 얘기하였다. 그럴 용기가 우리에게 있을까를 얘기 나누었다.



안나 원장님의 초대로 방원장님이랑 함께 가서 점심을 먹고서 과분한 선물들을 받고서 떠나오면서, 노인들에게 한평생 헌신하는 두 분의 명랑하고 꾸준한 삶에 경탄을 보내면서, 적어도 우리 둘은 그런 희생을 저분들에게 돌리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우리가 오늘 본 요양원의 ‘코끼리 할머니들’(아무런 의식이 없이 코에 낀 튜브로 음식과 물을 공급 받으면서 몇 달 몇 년을 버티는 생명들)을 보고서 저런 마지막은 맞기 싫다고 확인했다.


병에서 회복한다는 의학적 가망이 없는 한 “인위적 생명연장을 위한 일체의 기구 사용을 거부한다.”는 유언장 내지 각서를 쓰고 공증을 받아 여러 군데 보관하기로 다짐하였다. 더구나 우리처럼 두 아들이 먼데서,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경우라면 아들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될 테니까.....



석 달 만에 돌아온 휴천재는 진이엄마의 반가운 음성과 집안의 가지런한 모양이 그대로다. 다만 내가 정성을 다한 꽃길과 채소밭은 잡초 속에 흔적도 없고 아직 살아남은 화초들이며 채소들은 저 밀림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주인한테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형세다.


“누구 이 초가을에 휴천재를 찾아와 사흘 쯤 낮에는 풀 매는데 땀 흘리고 밤에는 쓰르라미 소리를 들으며 별을 헤아리고 싶은 사람 있으면 선착순으로 접수합니다!”라는 방을 붙이고 싶다. 밤바람이 제법 차다. 한낮에 익느라 고생한 벼이삭도 살랑대는 서늘바람에 한숨 돌리는 시각이다. 휴천재에서도 일기장을 덮고 보니 자정이 넘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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