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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산상에서 구름과 노닐고 밤에는 인가에서 만월과 노닐었노라
  • 전순란
  • 등록 2015-08-30 13: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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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8일 금요일, 맑고 높은 산은 구름


오로파 성모성지에 갔다. 성지 뒤에 있는 무크로네산(로마제국 시대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받아왔다)에 가는 길인데 오로파 성지에서 일하는 위신부를 한 번 더 만나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무도 모르는 산골짜기 성지에서 8월 한 달을 보내며 사목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탈리아 어디를 가든 소임을 다하고 성실하여 주변의 인정을 받곤 한다. 오늘도 종일 고백성사를 주고 나오다 우리를 반기는 위신부의 미소에 내가 저절로 행복했다. 관자테 본당신부가 주변에서 얻은 옷가지도 성지의 물품관리인에게 전하라고 건네주었다. 입던 옷들을 세탁하고 다듬어 건네주면 성지에 왔다가 갑작스런 기온변화로 사 입는 사람들이 있어 그 돈을 모아 선교지에 보낸단다.




무크로네산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올라갈까말까 했지만 그래도 꼭대기에 가면 2400m 이상의 고지여서 해도 보이고 산도 보인다는 위신부 말을 듣고 케이블카를 탔다. 처음 1900m 고지의 무크로네 산중턱까지 케이블카로 오르고 거기서 카미노산(Monte Camino 2400m)으로는 캐빈을 타고 오르는 길이다.


점심 전 마지막 캐빈을 타고 오르는데 까마득한 벼랑을 옆에 두고 구름 속에서 쇠줄 하나로 소쿠리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는 운명이다. 저 쇠줄이 끊어지면 천길 낭떠러지이지만 “에라, 서방하고 같이 있는데, 그리고 살만큼 살았으니 함께 죽어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그곳 산장에 오르자 날씨도 제법 따뜻한 햇살도 비치기 시작한다. 뒤따라오는 문선생 부부도 바이킹이라도 하다가 내리는 신나는 표정이다.





카미노산 정상은 햇빛이 들다가 구름 속에 잠기다를 거듭하고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몬테로사(Monte Rosa)의 흰 봉우리들만 구름 새에 보였다 가렸다를 거듭한다. 마타호른도 몽블랑도 멀리서 손톱만한 크기로 구름 속에서 희미한 자태를 드러냈다 숨었다를 하며 우리를 애타게 만든다.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것도 멋있지만 산의 자태를 보려고 구름 속에서 기다리는 기분,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모습을 보여 탄성을 자아내는 황홀경이 산사나이들을 미치게 만들어 목숨을 걸고 기어오르게 만드는가 싶다. 알프스를 오르내리다 보면 곳곳에 산비탈에서 목숨을 잃은 산사나이들의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곤 한다. “저런 미인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이 십년 전쟁을 치를 만하다.” 파리스에게 납치되어간 헬레네의 미모를 보고서 트로이아 노인들이 내뱉는 찬탄처럼... 


오로파 카미노산에서 보는 몬테로사(오른편부터 Gniffetti, Lyskamm, Breithorn) 




다섯 시경 하산하여 오로파 성지를 한 바퀴 돌고 특히 성지의 기나긴 복도에 가득 걸린 감사에물(ex-voto)들을 보면서 가난한 인생의 절망적인 순간들에서 절대존재에 운명을 맡기던 종교심을 무수히 보았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산속을 걷는 산사람들만 아니고 한낱의 햇살을 받으면서 지상의 인생 여정을 걷는 중생에게도 삶의 매순간은 어디서 동티와 사고와 죽음이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오리무중임에 틀림없다.




보스코가 여생을 다바쳐 번역에 몰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축일이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는 고백(보스코는 내게 이 헌사를 바쳐왔다)처럼 우리는 부처님 손안의 손오공처럼, 결국 “하느님 손 안에서 존재하고 살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실감한다.



출연을 기다리는 어린이들이 잠들지 않게 무대 뒤에서는 어른들이 말을 태워주고 



보름달 슈퍼문이 그랄리아 산악을 비추는 이 밤, 문선생 부부는 소르데볼로에서 공연되는 ‘그리스도 수난극’(La Passione di Cristo)을 보러 갔다. 자정 무렵에 끝나가는 공연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부부를 데리러 가서 출연자들과의 사진도 찍어주고 달빛을 받으며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돌아오니12시가 넘었다. "낮에는 산상에서 구름과 노닐었고 밤에는 동네에서 만월과 노닐었노라."며 행복해하는 두 사람...


"낮에는 산상에서 구름과 노닐고...


밤에는 인가에서 만월과 노닐었노라."는 문선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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