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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사람이고 또 한 세상
  • 전순란
  • 등록 2015-08-20 1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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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7일 월요일, 맑음. 저녁엔 한바탕 소나기


10시 반에 관자테를 떠나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려 열흘 만에 그랄리아에 돌아왔다. 가을처럼 시원한 날씨에 둘이서 오붓한 하루를 보냈다. 나는 책을 읽고 보스코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펴들었다.


지금은 천둥번개에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드럼 연주자 곁에 앉아 있는 기분을 주지만 긴 여행이 끝나고 덧문까지 굳게 닫힌 밤에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참 평온하기도 하다. 밖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무슨 포탄도 떨어지지 않는 참호 속 깊숙이 들어앉은 느낌이랄까? 성모경당 종소리가 자정을 알린다.



관자테 성당과 빵고신부의 사제관 



오늘 아침엔 늦잠까지 자고나서 8시 45분에 드리는 빵고신부의 미사에 참석하였다. 내 앞에 젊고 예쁜 수녀가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미사 후 많은 할머니들한테 인사를 받는 품이 이 동네 사람 같았다. 곁에 앉은 아줌마가 나처럼 자랑스럽고 든든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게 수녀의 엄마임에 틀림없고... 그토록 사제성소 수도성소가 드문 나라이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수녀가 나왔다는 사실에 저 할머니들에게서 대견함과 존경심이 한데 묻어난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축일이어서 빵고신부가 그 성인의 ‘순교’를 엮어 강론을 하였다. 미사 후 아주머니들이 빵고신부의 강론이 좋다고, 훌륭한 이탈리아말이라고, 그런 아들 둬서 좋겠다고 인사를 걸어오면 이 어미의 마음은 겸양을 모르고 붕붕 떠오르기만 한다.


빵고가 아침에 바에서 사온 코르네토를 아침으로 먹으면서, 작은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어젯밤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키면서 밑바닥에 약간의 슬픔을 느낀다. 조금 있으면 보스코랑 비엘라로 돌아가야 하는데, 보름 후는 제네바로 떠나는데 작은아들을 한 번 더 보러 올 수 있을까? 거기서 열두 시간을 비행해서 귀국을 하고 나면 큰아들과 두 손주를 보려면 또 몇 해가 흘러야 할까? 봉지 속에 몇 개 남지 않은 사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자꾸만 봉지 바닥을 들여다보는 계집애의 심경이랄까?




빵고신부는 아침마다 아래층 노인신부님에게 봉성체를 해드린다


어제 알프스에서 밀라노까지 가는 길을 내게 꼼꼼히 일러주면서 자기가 그 길을 얼마나 많이 달렸던가를 강조하던 마리오의 말투에 깔려 있던 아쉬움과 서글픔! 10여년 사귄 그녀는 코모 호수가 집이었고 그는 알프스 트란스악콰에 사니까 그니를 보려고 거의 주말마다 300여 킬로를 달려다녔을 마리오! 마침내 여러 해 동거까지 했으면서도 결혼으로 맺어지지 못한 사랑! 먼 훗날 지금 작은아들이 머무는 이탈리아 코모호 가까이로 다시 올 때에도 지금처럼 내가 악셀을 마구 밟으면서 속도를 내고 있을까? “그대가 있기에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든 곳일레라...”


우리 없는 열흘 사이에 들의 벼가 익기시작했다 



상처한지 15년만에 결혼으로 맞아들인 이레네에게 쏟는 마리오의 사랑은 이문재 시인의 “어느 경우”라는 시구가 고스란히 반영하지만 사랑에만은 들어맞는 수학공식도 과학공식도 없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는 동안은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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