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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들과 얘기나누다 자정이 다 되었다
  • 전순란
  • 등록 2015-08-18 16: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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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6일 일요일, 맑고 흐리고 소나기


빵고 신부가 20년 수도생활에 회원들을 떠나 이렇게 혼자서 있는 게 처음이리라. 늘 형제회원들과 함께 있었으니 외로움이 뭔지 모르고 지냈을 텐데 이곳 이탈리아 북쪽 끄트머리에 와서는 미사드릴 때와 성사 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혼자 있으니 그야말로 도시의 사막을 경험하고 있으리라. 동료 사제인 교구신부들이 본당에서 평생을 혼자서 지내는 고독을 실감하는 기회도 되리라.


오늘은 그래도 오전 11시 본당미사에 밀라노에서 일박한 형 빵기가 가족을 데리고 미사에 참석하고 점심을 함께 먹고서 제네바로 떠났다. 동생이 혼자여서 늘 마음을 쓰고 두 조카에게 쏟는 삼촌신부의 사랑이 각별하여 두 조카도 ‘빵고삼촌’을 참 좋아하고 따른다. 그래서 어느 놀이시설에 가는 것보다 두 녀석은 삼촌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



어미로서 두 형제가 저렇게 서로 아끼는 모습이 고맙고 행복하지만 작은아들에 대한 이 어미의 정에는 아릿함이 늘 밑바닥에 깔리곤 한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관자테에 들러 작은아들을 한 번 더 보고 아들한테서 자고 가자는 말에 워낙 염치와 체면을 중시하는 보스코는 손님으로 와서 본당사목을 돕는 신부에게 가족이 드나드는 일, 더구나 오전에 형네 식구가 다녀간 길인데 부모가 다시 들리는 모양이 좋지 않다고 마다한다. 하지만 산마르티노에서만 파는 토셀라(구워서 먹는 치즈)를 먹이고 싶다고 했더니 마지못하는 시늉을 하면서 함께 간다.


하지만 빵고 말에 의하면, 본당주임 마오로 신부님이 사제관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고, 가족의 연대를 사목의 큰 잣대로 보는 분이며, 이탈리아 교우들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는 사회여서 우리가 오길 잘했다면서 반긴다. 앞으로도 우리가 귀국 전에 한번이나 더 볼까 하는 기회이므로, 더구나 아들이 있는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함께 자는 행운은 좀처럼 오지 않을 터이므로 나로서는 기분이 더없이 흐뭇하였다.



▲ 트란스악콰의 아침


▲ 내가 프리미에로에 올 적마다 토셀라치즈를 사는 가게


아침에 피에라 디 프리미에로에 마리오를 두고 오면서도 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니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50도 안 된 아내를 먼저 보내고 몇 해를 혼자 살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한참 오래 동거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자기가 전적으로 돌봐줘야 하는 여자를 하나 만나서 (그의 연금이 여자에게 승계되는 일정을 맞추어)결혼을 감행하고 집안을 보살피며 아내를 돌보고 산마르티노 영산을 바라보면서 산다. 집 뒤에는 적어도 3년은 땔만한 장작이 쌓여있고, 조금 떨어져서는 10년은 때고 남을 통나무가 쌓여 있어, 아내가 일하러나간 사이에 집에서 무슨 노동에 몰두하는지 잘 보여준다, 왕년에 알리탈리아 항공사의 중견간부를 지낸 남자가 말이다....


우리가 찾아가면 자기 침실을 내어주면서 “세레나가 이 침대에서 앓다가 죽었어. 그 건강하던 여자가 체중 22kg이 되더라구” 하던 정성. 드디어 딸 같은 아내 이레네와 여생을 함께하고 있지만, 보스코가 세레나의 묘소 관리를 물으면서 짓궂게 “네 묫자리는 어디다 마련해 두었나?”를 물으니까 “죽음 뒤의 생각은 절대 않고 있다”고 대꾼하지만 그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오랜 슬픔과 아픔이 깔려 있었다. 아아, 조강지처(糟糠之妻)와 해로하며 아내의 팔에 안겨 세상을 떠나는 남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발수가나(Val Sugana)로 나와 밀라노로 가려면 트렌토로 빠지지 말고 파도바 쪽으로 빠지라는 마리오의 말대로 행선을 잡아 브렌타노 산을 끼고 달렸다. 기후의 급변 때문인지 이 산골에는 벌써 가을 단풍이 들고 있다.  솔라냐(Solagna)라는 동네로 들어가 ‘올리에로 동굴’(grotte di Oliero)을 관람하는 여유도 가졌다. 브렌타노 계곡의 마을과 도시 주민 전부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엄청난 수량의 지하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빵고신부가 산로렌조 성지에서 드리는 6시 주일미사에 겨우 시간을 대어 도착하고, 산에서 사온 치즈와 맥주와 라면으로 그의 사제관에서 저녁상을 차려 같이 먹고, 조수석에 타고 오느라 피곤했는지 보스코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작은아들과 둘이서만 환담을 나누다 보니 자정이 다 되었다. 뿌듯한 기분으로 일기장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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