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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이후의 민주주의
  • 지성용
  • 등록 2026-11-06 20:23:30
  • 수정 2026-11-06 20: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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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4일, 브라질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향했다. 개표율 99.99% 시점에 브라질 고등선거법원(TSE)이 발표한 수치는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자유당(PL)의 플라비우 보우소나루 상원의원이 유효투표의 47.03%, 현직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가 45.16%를 얻은 것이다.(브라질 고등선거법원 TSE 발표, 2026.10.5) 플라비우는 쿠데타 모의 혐의로 연방대법원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장남이다.(브라질 연방대법원 판결, 2025.9) 헌정 질서를 위협한 지도자가 단죄된 지 1년 남짓 만에, 그의 아들이 1차 투표 1위로 결선에 오른 것이다.


이 글이 독자에게 닿을 즈음이면 10월 25일 결선 투표의 결과가 이미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기든 질문은 남는다. 처벌로 막을 내린 줄 알았던 정치가 왜 이토록 빨리, 이토록 강하게 돌아왔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지금 한국의 정부와 개혁진영에게 남의 일이 아닌가.


지도자는 갇혀도 정치는 남는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브라질에서 벌어진 일은 극우의 ‘귀환’이라기보다, 극우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확인에 가깝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과 보우소나루주의(Bolsonarism)의 정치적 생존은 처음부터 별개의 문제였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자유당은 이번 총선에서 상·하원 모두 최대 정당의 지위를 굳혔다.(Reuters, 2026.10.5)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인기가 아니라, 지역 정치와 의회를 잇는 권력 기반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


이 구조가 위험한 이유는 분명하다. 보우소나루 진영은 2023년 1월 8일 의사당 난입 사태 관련자들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amnesty)을 줄곧 요구해 왔다. 그 요구를 내건 세력이 행정부와 의회를 함께 장악한다면, 선거로 얻은 권력이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사법적 조치를 되돌리는 데 쓰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스스로를 허무는 경로, 정치학자들이 오래 경고해 온 바로 그 경로다.


여기에 종교라는 변수가 더해진다. 칠레 테무코 가톨릭대학교의 브루나 폰세카와 마카레나 발렌수엘라는 보우소나루와 복음주의 유권자의 결합을 추적하면서, 그 지지가 일방적인 선거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도덕적 의제로의 담론 재배치, 종교 지도자들과의 연결, 기성 정당 체제의 위기가 맞물려 형성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Fonseca & Valenzuela, “From Opportunity to Alignment,” Social Sciences 15(7), 2026) 이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회 네트워크가 정치인과 신자를 이어 주는 ‘종교적 중개(religious brokerage)’의 역할이다. 물론 모든 복음주의 신자가 극우라는 뜻은 아니다. 핵심은 극우가 불만을 표현할 언어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연결하고 동원할 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한국에도 그대로 겹친다. 내란의 책임을 묻는 일과 권위주의 정치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앞의 것은 수사와 재판의 과제이고, 뒤의 것은 정당·언론·교육·지역사회·종교 공동체의 과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그 정치를 떠받치던 정서와 네트워크가 함께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만으로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불안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그렇다면 브라질의 결과를 ‘룰라 정부의 민생 실패’로 설명하면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로이터는 룰라 정부 아래서 실업과 불평등이 줄었는데도 높은 생활비와 가계부채, 범죄에 대한 불안이 현직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었다고 보도했다.(Reuters, 2026.10.4) 정책 성과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거시 지표의 개선과 가정의 식탁에서 체감하는 삶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간극을 극우가 차지한 이유는 경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불안을 두고도 누구를 탓할지, 누구를 믿을지, 어느 공동체에 속할지는 저마다 다르게 결정된다.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당(PT)에 대한 오랜 반감, 종교와 문화를 둘러싼 갈등, 부패 논란, 그리고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여든 살 지도자에 대한 피로가 겹쳤다. 그러므로 “결국 이념이 아니라 삶의 체감이 문제였다”는 진단은 절반만 옳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불안이 이념과 정체성이라는 번역기를 거쳐 정치적 선택이 된 것이다.


심층심리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해소되지 못한 불안은 반드시 대상을 찾는다. 그 불안에 이름을 붙여 주고 탓할 대상을 지목해 주는 정치가 먼저 도착하면, 불안은 그쪽으로 흘러간다. 개혁 세력이 시민의 불안을 ‘오해’나 ‘선동의 결과’로만 치부하는 순간, 그 불안의 해석권은 고스란히 상대에게 넘어간다.


표의 행방을 함부로 읽지 말 것


개혁진영 안에서는 이번 결과를 두고 상반된 해석이 오간다. 하나는 룰라가 너무 온건해서 졌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거칠게 밀어붙인 개혁이 반발을 불렀다는 주장이다. 둘 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룰라가 너무 온건했다면 실망한 표는 왼쪽으로 갔어야 한다”는 반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실망한 진보 유권자는 더 왼쪽의 후보를 찍을 수도 있지만, 기권하거나 마지못해 룰라를 찍을 수도 있다. AP통신은 이번 1차 투표의 기권율이 21.08%로 28년 만에 가장 높았다고 보도했다.(AP, 2026.10.5) 다만 이것이 진보층의 이탈 때문인지는 별도의 자료로 확인해야 한다. 전체 득표율만으로 유권자 개개인의 이동 경로와 동기를 확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중도우파 정치인 출신의 제랄두 알키민 전 상파울루 주지사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세웠다고 해서 중도 유권자가 충분히 설득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TSE 후보 정보) 정치인들 사이의 연합과 시민들 사이의 신뢰는 다르다. 지도부가 손을 잡아도 그 아래의 유권자들이 함께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다.


한국의 거울 : 지지율이 묻는 것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 보자. 리얼미터가 9월 둘째 주에 실시한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33.8%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부정 평가는 63.3%에 달했다. 같은 주 정당 지지도에서는 국민의힘(42.1%)이 더불어민주당(36.1%)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리얼미터·에너지경제신문, 2026.9.7~11 조사) 조사기관은 개각 인선 논란과 부동산 정책의 불확실성, 그리고 진보층과 20대의 이탈을 배경으로 꼽았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부정 평가의 이유로 부동산(24%)에 이어 인사(16%)가 두 번째로 지목되었다.(한국갤럽 2026년 9월 둘째 주 조사, 경북매일 2026.9.11 보도)


물론 이는 조사기관의 해석이며, 각 요인이 지지율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입증한 결과는 아니다. 여론은 매주 출렁이고, 조사기관마다 결과가 엇갈리기도 한다. 몇 차례의 조사로 한국 정치 전체의 방향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정부가 피하지 말아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시민은 “민주주의를 지켰는가”와 함께 “권력을 맡긴 뒤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묻는다. 특히 개혁을 약속한 정부의 인사가 그 약속과 어긋나 보일 때, 문제는 인기 하락을 넘어선다. 시민은 정부의 판단 기준과 개혁 의지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를 설명 없이 지지자의 인내로 메우려 하면 불신은 더 깊어진다.


주목할 대목도 있다. 같은 시기 한국갤럽 조사를 분석한 보도는,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분이 곧바로 제1야당으로 옮겨 가지 않고 상당 부분 관망층에 머물렀다고 짚었다.(경북매일, 2026.9.11) 이것은 위험이자 기회다. 떠난 마음이 아직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남긴 교훈은, 그 빈자리를 먼저 채우는 쪽이 불안을 ‘정치’로 만든다는 것이다.


비판과 배신 사이


개혁진영 내부에도 책임이 있다. 다른 의견을 곧바로 배신으로 규정하고, 정책 논쟁을 인물에 대한 충성과 적대의 문제로 바꾸면 연합은 좁아진다. 그러나 반대편의 잘못만 강조하며 우리 편 정부의 문제를 덮는 태도 역시 연합을 약화시킨다. 비판을 배신으로 몰아서도 안 되고,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사실과 책임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정부에게는 설명하고 수정할 책임이, 비판자에게는 근거와 대안을 내놓을 책임이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이 긴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민중의 이름을 독점하며 자기 권력을 위해 민중의 정서를 이용하는 포퓰리즘을, 민중과 더불어 공동의 기획을 일구어 가는 참된 민중적 지도력과 구별한다.(교황 프란치스코, 회칙 『모든 형제들』 Fratelli tutti, 2020, 155~160항 참조) 진영의 결속을 위해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정치는, 그것이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이 경계를 위태롭게 한다. 수난의 기억을 함께 지닌 공동체일수록 그 기억을 적대의 연료로만 쓰지 말고 연대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


속도가 아니라 정당성


“거칠게 밀어붙이는 개혁은 실패한다”는 명제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 필요한 개혁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추진하는 것과, 반대자를 모욕하고 절차를 건너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개혁의 지연 자체가 지지자의 이탈과 기득권의 재결집을 부를 수도 있다. 문제는 속도가 빠르냐 느리냐가 아니다. 목표가 분명한가, 수단이 정당한가, 결과를 책임지는가이다.


한국과 브라질을 겹쳐 볼 때도 절제가 필요하다. “경로는 같고, 한국에는 시간만 남았다”는 식의 비유는 경고로서는 강렬하지만 분석으로서는 지나치다. 한국의 주거비·자산 격차·고용 불안·노후 문제와 브라질의 치안·범죄조직 문제는 서로 다른 정책을 요구한다. 정당 체제의 구조도, 종교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다르다. 두 나라에서 비슷한 위험 신호를 읽을 수는 있지만, 동일한 인과관계가 입증된 것은 아니다.


보수 진영은 아마 브라질의 결과를 좌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정당한 심판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에도 귀 기울일 대목이 있다. 실제로 많은 유권자는 이념이 아니라 생활의 실패를 이유로 표를 옮겼을 것이다. 정권에 대한 심판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이다. 다만 그 심판이 헌정 질서를 위협했던 세력의 복권과 사면으로 이어질 때, 문제는 정권 교체를 넘어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가 된다. 선을 그어야 할 곳은 보수와 진보 사이가 아니라, 헌정을 존중하는 정치와 그것을 허무는 정치 사이다.


세 갈래의 과제


그래서 필요한 전략은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다. 첫째는 헌정 책임의 확립이다. 위헌적 권력 행사와 폭력에 대한 책임을 적법한 절차로 묻고, 재발을 막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 일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서두르거나 늦추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생활 변화의 증명이다. 주거·부채·돌봄·고용에서 시민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고, 누구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거시 지표를 홍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브라질이 보여 주었듯, 통계와 식탁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성과는 성과로 인정받지 못한다.


셋째는 개혁 연합의 재구성이다. 반대세력에 대한 적대감만으로 결속하지 말고, 함께 이룰 과제와 우선순위, 그리고 이견을 조정할 절차를 내놓아야 한다. 적의 존재로만 유지되는 연합은 적이 약해지는 순간 함께 흩어진다.


이 과정에서 보수 유권자 전체나 정부에 실망한 시민을 극우로 묶어서는 안 된다. 헌정 파괴를 정당화하는 정치에는 분명한 선을 긋되, 그 정치 쪽으로 옮겨 가는 시민의 불안과 불만은 들어야 한다. 그래야 책임 추궁과 다수 연합의 확대가 함께 가능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선을, 집단과 그 구성원 개개인이 더 충만하고 더 쉽게 자기 완성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체로 이해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Gaudium et spes, 26항) 그 조건은 진영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공동선의 정치란 상대를 지우는 정치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넓히는 정치다.


교회와 시민사회의 자리


폰세카와 발렌수엘라의 연구가 보여 주듯, 종교 공동체는 사회의 불안을 특정한 정치적 방향으로 번역하는 강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브라질 복음주의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깊고, 때로는 같은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이 흐른다. 교회가 특정 정당의 동원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원칙이 침묵과 방관의 핑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와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편을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함께 세우는 일이다. 본당과 수도회, 교회 단체와 시민단체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닌 이들이 한자리에 앉아 말하고 듣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안을 적대로 번역하는 정치에 맞서는 가장 근본적인 대항력이 될 것이다. 공론장(public sphere)이 알고리즘에 의해 잘게 갈라지는 시대에, 얼굴을 마주하는 공동체는 점점 드물어지는 자산이다. 극우가 조직으로 사람을 잇는다면, 민주주의도 조직으로, 관계로 사람을 이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는 성과의 언어로만 말하지 않는 증언을 할 수 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사회교리의 원칙은, 통계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이의 식탁에서 정책을 평가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개혁 정부의 성과를 묻는 질문도 결국 여기로 모인다. 누구의 삶이 나아졌는가, 그리고 누가 여전히 그 바깥에 남겨져 있는가. 이 질문을 정부보다 먼저, 그리고 정부보다 끈질기게 던지는 것이 교회와 시민사회의 몫이다.


맺으며 : 두 개의 날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짚고 싶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삶이 나아질 때에만 지켜진다”는 말은 경제적 성과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민주주의를 성과만으로 정당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 권위주의 정부도 성장과 치안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가치가 없는 민주주의는 쉽게 공공연한 혹은 위장된 전체주의로 변한다고 경고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Centesimus annus, 1991, 46항)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체제인 것은 효율의 경쟁에서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엄과 권력의 제한이라는 가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두 개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 삶을 개선할 능력, 그리고 권력을 제한하고 잘못을 스스로 고칠 능력이다. 브라질의 경고는 극우가 강하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민주주의를 지켜 낸 세력이 그 승리를 시민의 생활과 신뢰로 이어 가지 못할 때, 헌정을 위협했던 정치가 다시 ‘변화의 대안’으로 포장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데 있다. 지난 겨울의 광장을 함께 건너온 우리가, 그리고 그 광장의 힘으로 세워진 정부가 지금 가장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에도 실렸습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 가톨릭관동대학교 중독재활상담학과 교수, (사)다시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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