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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13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7-03 11:01:59
  • 수정 2015-08-20 12: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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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입니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25 내가 참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습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습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가 4,14-30)




14-15절은 마르코 1,14-15; 마태오 4,12-17에 있다. 16-30절은 마르코 6,1-6; 마태오 13,53-58에 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에서 예수의 나자렛 설교(마르코 6,1-6; 마태오 13,53-58) 이전에 예수가 겟네사렛 호수 주위에서 오래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루가는 예수 활동 초기에 나자렛 설교를 등장시켰다. 그만큼 루가는 나자렛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일 루가가 마르코나 마태오를 따랐다면 나자렛 설교는 루가에서 8장과 9절 사이에 배치되었어야 했다.


마르코는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을 강조했다면, 루가는 예수의 예언적 선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의 두 차례 발언(루가 4,18-21; 23-27), 그리고 청중의 반응(루가 4,22; 28-29)이 뒤따르고 있다. 마지막 구절 30절에서 두려운 문장이 나온다. 예수는 고향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갈릴래아로 갔다고 소개되었다. 예수의 행보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일정이란 뜻이다. 갈릴래아는 단순한 지리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 개념이다. 예수의 사명이 시작된 곳이요,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한 곳이 갈릴래아다.


성령이 예수 혼자가 아니라 즈카르야(루가 1,67), 요한(루가 1,15), 엘리사벳(루가 1,41), 마리아(루가 1,35), 시메온(루가 2,25)에게도 내렸음을 루가는 강조한다. 이제 변혁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단락 첫 구절인 14절에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주변 지방에 퍼졌다는 언급은 특이하다. 그런 표현은 보통 단락 끝에 나왔기 때문이다.(마태9,26; 루가 7,17) 예수는 공식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사실을 루가는 말하고 싶었다. 예수는 안식일에 유다교 회당을 가르침 장소로 선택한 사실이 주목된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구원 활동은 시작된다. 유다교에서 평신도에게 설교할 기회는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은 이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었다.(사도행전 13,15) 그런데 성직자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설교 권리를 언제부터 독점했을까.


왜 루가는 ‘그들의’ 회당이라고 말했는지 우리가 알기는 어렵다. 루가는 유다인의 회당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사도행전 13,5; 14,1; 17,1) 예수는 정기적으로 회당에 다닌 경건한 유다인으로 소개되었다. 안식일 예배는 1부에서 유다인의 기도 쉐마, 기도, 축복이 있었다. 2부에서 모세오경 낭독이 있다.


당시 상황을 보자. 예수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기 전에 다른 사람이 모세오경을 낭독한 것 같다. 앉아 있던 예수는 일어섰고,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두루마리 성서를 건넸으며, 예수는 두루마리를 펼치고 성서구절을 찾아 읽고, 다시 성서를 돌려주고 자리에 앉은 것 같다.


나자렛은 여기와 마태오 4,13에서만 nazara라고 표기되었다. 공통년 70년 이전 해외에 살던 유다인들은 안식일(토요일)에 회당에 모여 모세오경을 낭독하고 해설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예언서를 읽었다는 기록은 루가복음 이전 기록에는 보기 어렵다. 전례 달력에 따라 모세오경이 어떤 순서로 읽혀지는지 알아내려는 성서학자들의 노력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예수는 책 모양의 성서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태의 성서를 손에 들었다. 아직 종이가 유럽에 전래되지 않았다. 예수가 읽었다는 구절은 사실 루가가 이사야 예언서 61,1-2와 58,6을 편집한 것이다.


쿰라 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예언서 필사본에 따르면, 이사야서 61장은 학교와 회당에서 읽고 해설된 것 같다. 예수는 세상에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말로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예수의 첫 설교요, 출사표요, 선언인 셈이다.


19절 은혜로운 해(희년)에서 우리들이 흔히 잊는 사실이 있다. 희년과 고향 사이의 관계다. 죄의 용서(레위 25,10), 축복(레위 25,21)이 주어지는 희년에는 누구나 자기 고향을 방문해야 한다.


고향을 떠나거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향을 다시 찾는 기쁨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산가족, 난민, 이주 노동자들의 아픔을 기억해야 하겠다. 25년 주기의 희년 선포라는 관례를 깨고 올해 12월에 가톨릭에서 희년이 시작된다.


20절에서 설교는 앉아서 한 것으로 전제되었다. 22절에서 청중이 예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왜 놀라워하였는지 성서학자들은 궁금하였다. 시골교회 교리교사 정도의 예수가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더구나 어릴 적부터 목수의 아들로 동네사람들에게 다 노출된 예수 아닌가.


평범한 사람의 비범함을 눈치 채기도 어렵고, 비범한 사람의 평범함을 인정하기도 어려운 법이다. 오래 알아왔던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말씀을 예수의 동네 선후배들이 깨끗이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3절에서 예수가 의사를 비유로 든 것은 특이하다. 유다교나 초대교회에서 의사를 예로 든 문헌은 드물었다. 23절에서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발언을 동네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루가복음이 대목까지 예수는 가파르나움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예수의 활동을 모르는 나자렛 동네사람들에게 예수의 첫 설교는 의아했을 것이다.


예수는 엘리아 시대의 삼년 육개월 동안 가뭄을 예로 들었다.(열왕기상 17,7-24) 그러나 삼년 육개월 동안 가뭄이 든 사례를 공동성서에서 찾기는 불가능하다. 3년째 비가 내렸다고 보도되었다.(열왕기상 18,1)


28절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에게 화를 낸 사실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예수에게 화를 냈을까. 예수가 기적을 행하고 가르치려 들어서 그랬을까. 예수가 기적을 일으킬 능력이 있느냐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이방인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에 그들은 분개한 것 같다. 예수가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행동이 아닐까.


29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벼랑 끝에서 떨어뜨리려 시도한 부분은 지리적으로 과장된 표현이다. 옛날 나자렛은 산 위에 있는 마을이 아니고 고지의 골짜기에 있었다. 예수의 첫 설교, 그것도 고향에서 첫 설교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예수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반대 받는 표적임을 루가는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나자렛 일화는 마치 이스라엘의 축소판 풍경이다.


가난한 이들은ptokoi은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라는 경우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정치권력에 의해 고통 받는 희생자들이다.


부자, 권력자, 언론, 종교에 의해 현실과 역사를 정직하게 알지 못하는 ‘눈먼 이들’은 예수에게 가난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부자 정당에게 투표하는 사람들, 가난으로 서럽고 가난한 탓에 또 놀림 당하는 사람들은 성서적 의미에서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첫 설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관심이 드러났다. 예수의 복음선포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성서학자 에레미아스 말이 생생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르면 성서를 모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르는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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