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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성찰
  • 이기우
  • 등록 2023-10-24 20: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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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수요일(2023.10.25.) : 로마 6,12-18; 루카 12,39-48 


서양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해서 귀족들이 솔선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조선 왕조 시대에는 신분상 특권을 누리던 양반들이 오히려 병역도 세금도 면제받았습니다. 이 야만적이고 비공동체적인 전통이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해치고 있습니다. 


많이 배웠거나, 많이 가졌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이 병역이나 납세 등의 의무에 있어 더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부동산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고 주택 가격을 올려 놓는 등 반사회적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가 빈부 양극화 추세를 부추키고 있어서 매우 심각하고 중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믿는 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믿음에 따른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신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이것이 더 근본적인 믿음의 원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갈 은총을 받으며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간 다음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까지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세속적인 어느 특권보다도 더 귀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라고 먼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특권이자 혜택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고귀하게 살아가는 삶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책임으로 남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관건이자 특권인 신앙인의 의무(Fideles Oblige)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책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된 존재로서, 그 뜻에 따라 행한 결실을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이고도 사회적인 책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도 하느님이셨지만 여느 사람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비우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세상의 죄를 없애 주시기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제자들에게는 스승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까지 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의 발 씻김을 사양하려 하던 베드로에게는, “만일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런 인연도 없게 된다.”(요한 13,8)고 말씀하심으로써, 서로에게 봉사하는 사회적인 책무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입증하는 종교적 책무의 선결조건임을 강조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고 책무를 다하는 삶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으면, 그리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보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게 됩니다(마태 5,16). 


사도 바오로도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처신에 입각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즉, 오늘 독서에서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우리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야 할 인간의 기본적 의무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신자의 의무, 제자로서의 본분을 넘어서서 인간 존재의 기본 의무를 천명한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신자는 믿음으로 인해 인간 본연의 자세를 회복한 존재입니다. 사실 바오로도, 제자로 삼았던 티모테오, 루카, 티토 등을 자신이 개척한 공동체의 지도자로 천거하여 사목하게 했지만, 자기 자신은 제자들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몫을 자청하여 맡았습니다. 


즉,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어렵사리 공동체를 개척하면서 찾아가는 선교를 했고, 또 대단히 힘든 수고를 하면서 천막을 만들어 팔아 생활비와 활동비를 충당함으로써 현지 교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동하는 선교를 했으며, 그러면서도 개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신자 수를 늘리기보다는 자신의 삶과 일에서 감화를 줌으로써 신앙을 성숙시키고자 함으로써 공동체를 건설하는 선교를 하였고, 공동체의 지도자를 세워놓고 선교하러 떠나간 뒤에도 인격적 유대를 통해 공동체들이 가톨릭교회의 큰 유대 안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등 지속적으로 유대하는 선교를 하였습니다. 이런 선교적 희생이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하는 근본 이유는 우리 자신도 예수님처럼 제사를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사회적 책무와 도덕적 의무이며, 복음화는 이를 충실히 이행한 결과로 얻어질 덤입니다. 제사는 올바른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며, 이 봉헌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비록 희생을 수반하기는 하겠지만, 그 희생이 우리를 유혹하려는 마귀의 계략에서 지켜주는 고마운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복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로마 6,12).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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