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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교우촌’을 늘려나가야
  • 이기우
  • 등록 2023-09-08 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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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토요일(2023.9.9.) : 콜로 1,21-23; 루카 6,1-5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 1,21-22).


이 선언은 그동안 로마 제국이 조장했던 우상숭배 풍습에 물들어 악행을 저지르며 살던 콜로새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나서 이룩한 변화를 사도 바오로가 인정하고 칭송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오로 사도의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 지나쳐서 애꿎게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는 악행을 저질러 하느님과 원수로 지내던 자로서, 벼락을 맞은 다음에야 가까스로 하느님과 화해한 처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원수로 지내느냐 아니면 화해하느냐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는 신자들을 박해하러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그는 사실상의 우상숭배자였고, 벼락을 맞고 그 박해자의 길을 멈추어 선 다음에 십사 년 동안 숙고한 끝에 예수님을 하느님이시오 메시아로 믿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가 자칭 사도요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파견받은 선교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셨고, 그분보다 ‘더 큰 일’ 즉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서방 세계의 복음화 과업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한때 한국교회는 나라의 조정과 유림과 백성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처지였습니다. 조상제사 금지령이 북경 주교 구베아로부터 내려진 이후에 조선의 조정과 유림들은 이를 핑계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모진 박해를 백 년 동안이나 지속했습니다. 조상제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중인 이하 낮은 신분이었던 신자들에게도 임금과 부모를 몰라보는 금수(禽獸) 같은 무리라고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며 아예 천주교의 씨를 말리려고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박해시대 우리 신앙 선조들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하느님 제사는 교우촌을 방문하는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여 드리고, 조상에 대해서는 교우들끼리 연도를 바치는 기도로 공경하였습니다. 연도는 참회의 시편들과 성인호칭기도 그리고 죽은 부모를 위한 기도 등으로 구성된 기도로서, 조선 천주교회에서 독창적으로 창안한 조상 공경 기도입니다. 


박해가 종식된 지도 백 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에는 아무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조상과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죽은 이와 그 유족을 돌보는 선종 봉사 덕분에 입교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선교의 수훈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야말로 하느님을 올바르게 흠숭하며 조상들과 죽은 부모에게도 제대로 공경하는 종교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하느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겨레 앞에서도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흠숭하는 최고선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겨레와 나라의 공동선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아시아 복음화를 향하여 이웃 교회의 어려움을 돌보는 사랑의 길로 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와 조상을 공경하는 예절 풍속에 있어서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가 되었으니만큼, 우리 민족의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어렵고 가난한 이웃 나라, 이웃 교회의 공동선도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처음 아시아에 선교 노력을 시작했던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이웃 사랑을 전하려고 하기보다는 유럽 백인들이 중세 천년 동안 토착화시킨 교회 모델을 아시아 대륙에 심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을 근본적으로 알아들은 한국교회 초창기 평신도 유학자들이 개척해 놓은 토착화 작업은 지금도 눈부실 정도로 독창적이었습니다. 이벽의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 정약전의 ‘자산어보’,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등이 정신적 토착화 산물로서 대표적이고, 신유박해 이후 전국 189군데에 세워진 교우촌은 교회적 토착화 산물로서 독보적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두고 꾸르실료(Cursillio) 용어로서는 ‘울뜨레야(Ultreya)’ 한다고 말합니다. 저어기 눈에 보이는 고지를 향하여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룸코에서 성공한 소공동체를 모델로 삼았던 노력은 이제 코로나 냉담 사태를 이겨내기에 역부족임이 드러난 이상, 박해시대 교우촌을 모델로 한 토착화된 기초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성경과 교리에 충실한 ‘말씀의 교우촌’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 새로운 교우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과 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성사생활에 충실하고 성사의 사회적 실천도 균형을 이룸으로써 ‘성사적 실천의 교우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와 겨레의 공동선에 헌신할 줄 알고, 하느님께서 시대 상황과 사회 현실을 통해 말씀하시는 징표까지도 식별할 줄 아는 ‘사랑의 교우촌’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이야말로 진정으로,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일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최근의 한류 현상에서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지금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여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마음만 먹으면, 어느 새 민족의 복음화 목표도 아시아의 복음화 목표 역시 다음 세기는 물론 다음 천년, 즉 제삼천년기를 바야흐로 비상하려 하고 있는 통일 코리아의 운명을 선도하는 우리 교회에 의해 촉진될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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