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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귀를 열고, 입을 여는 소통의 길
  • 이기우
  • 등록 2023-07-11 14: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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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기념일(2023.7.11.) : 창세 32,23-33; 마태 9,32-38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축복은 이사악을 거쳐 야곱의 대에서 실현됩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하란 땅에서 사는 동안에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서 열한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를 이겨내야 했고, 친자매 사이인 두 아내 사이의 질투를 견뎌야 했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서 살 때 아버지 이사악과 형 에사우를 속여 장자권을 얻어낸 후 하란으로 도피해 온 처지라서 20년 내내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하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야곱은 과연 형 에사우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인지 몹시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야뽁 나루에서 겪은 체험은 파란만장 했던 그 동안의 하란 생활 역시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타고난 그의 집념으로 어거지로 얻어낸 축복이기는 하지만 축복은 축복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만큼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도 파란만장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온 벙어리가 치유를 받아 말을 하게 된 사건 역시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이고 집단적인 처지와 운명을 나타내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표징적입니다. 사람이 듣지 못하면 말을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많은 예언자들로부터 숱한 기회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업적을 찬양하지도 못했고 그분 자비에 의탁하지도 못한 채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귀머거리요 영적인 벙어리 신세였던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야뽁 나루에서 만난 천사 덕분에 비로소 하느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표징을 얻었습니다만, 그 표징은 다친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리는 걸음걸이였으므로 매우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야곱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기적을 본 군중도 하느님께서 찾아오셨음을 깨닫고 찬양함으로써 말문이 트이고 입을 열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양심으로 듣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면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말문을 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기도 하여 귀를 열 수 있고, 그분께 찬양도 드릴 수 있는 입을 열 수 있는 실마리가 오늘 전례 지향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서방 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수도자로 알려진 성 베네딕도의 삶입니다. 그의 생애는 매일미사 책 오늘 날짜 해설에 잘 나와 있으니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주목하여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은 바는 이것입니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동굴에서 3년 동안이나 고행스럽게 수행한 은수 생활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신의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끊고 나서, 오직 하느님과 기도하는 일에만 몰입하는 생활을 3년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은수 생활에서 풍기는 향기가 퍼져나갔는지 그의 성덕에 매료된 성소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서 조용히 사는 은수 생활이 어려워지고 같은 뜻을 가졌지만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공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는 은수 생활에서 지켰던 원칙을 글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네딕도의 수도생활 규칙서’입니다. 


첫째, 재물과 수입을 공유화를 지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의 모범을 따라서, 돈으로 말미암은 분쟁과 갈등을 원천적으로 예방한 것이지요. 둘째, 공동생활을 지향했습니다. 공동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갈등을 감내하고 끝내 화해와 일치를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짊어지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베네딕도의 수도생활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 여전히 교회의 역사 안에서 기준이자 모범이며 목표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재물과 수입에 대한 독점적 욕심이 사람들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이를 공유화해야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여분의 몫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인간관계 역시도 십자가를 받아들여 함께 살게 된 이들이 누구이건 간에 하느님께서 주신 인연임을 명심하고 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재물과의 가치관이나 인간관계의 가치관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야뽁 나루에서 씨름한 야곱이 가까스로 한 일이 귀 열고 입 여는 일이었는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살이에서 하느님께 귀를 열고 입을 여는 소통의 길에 대해서 위와 같이 베네딕도 성인이 검증해 놓았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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