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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편’에 서기를 망설이는 군중은 오늘에도 있다
  • 이기우
  • 등록 2019-04-05 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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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금요일 : 지혜 2,1ㄱ.12-22; 요한 7,1-2.10.25-30



오늘 독서인 지혜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를 아우르는 헬레니즘 세계를 이룩한 시대에 쓰여졌습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살던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 이래로 내려온 조상들의 전통에 담긴 히브리적 사유를 그리스식 사유인 지혜를 열쇠말로 하여 그 당시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기록한 성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 전통에서 지혜로운 사람의 대표격인 솔로몬의 이름을 내세우게 되었고, 창세기 이래 구약성서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를 요약하여 집대성한 성서가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독서로 들으신 본문은 히브리적 지혜의 전통에서 바라볼 때, 악인들이 꾸미는 악한 음모가 과연 어떠한 경위로 현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지 알려주는데, 악인들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서 악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구약성서의 형성사 안에서는 가장 나중 무렵에 쓰여진 지혜서에서 이러한 감정이입방식의 내재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역사를 권력의 이동이나 왕국의 흥망성쇠를 기억하는 외적 기억 수준을 넘어서서 선과 악의 윤리적 차원에서까지 성찰하는 내적 성찰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사색이 깊어졌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독서 본문에 나오는 성찰은 악인은 악으로 인하여 눈이 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악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쾌락과 현세적 편익조차도 거룩한 삶 대신에 받게 되는 지옥의 벌일 수도 있는데, 악인들은 이러한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악인들이 벌이고 있는 갖가지 악행들을 지켜보면서도 참으로 별스런 지옥 풍속도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묘사된 부유층의 초호화 사교육과 이로 인해 비뚤어진 가정사들이 그러하고, 언론사 사주 일가가 벌인 성폭력 및 살인 교사 의혹 사건이 그러하며, 전 법무부 차관이 불법 로비스트의 덫에 걸려 집단 성폭력 사건과 검찰의 은폐 조작 사건,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연예인을 고리로 환락을 즐기려고 만들어진 강남의 한 클럽에서 마약과 성과 폭력으로 얼룩진 해괴한 사건과 이들과 유착되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경찰의 범죄 등이 그렇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범죄 사건들도 대개 본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은폐하고 조작하려고 하지만, 죄악의 강고한 틀을 뚫는 예리한 송곳처럼 자신들의 죄책감을 못 이기고 정의감으로 악을 벗어나려는 존재들이 생겨나서 진상이 밝혀지곤 합니다. 이것이 지혜서가 말하는 악의 덫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던 예루살렘 성전은 악의 덫 정도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악이 몰려있던 복마전이었습니다. 열두 살 무렵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면서 이런 성전의 어두운 실체를 익히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성전정화사건을 일으키심으로써 성전을 둘러싼 악의 본산이 사두가이파 일당임을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폭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 지방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으셨고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성모님을 모시고 있던 친척 형제들은 사두가이 유다인들의 악한 실체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축제가 벌어져도 예수님께서 그들과는 함께 행동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따로 움직이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루살렘 주민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태의 추이는 관심있게 지켜보면서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긴가 민가 하는 심정으로 분명한 믿음을 미룬 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당신이 갈릴래아 출신이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공개적으로 밝히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가르침을 들었던 대상은 예루살렘 주민들과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온 유다인들이었을텐데, 이들은 사두가이들의 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악한 집단의 실체를 눈치 채고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선의 편에 서기를 망설이는 군중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다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하고 경고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의롭게 살기를 바라는 무신론자들, 믿기를 망설이는 불가지론자들, 세례를 받고도 미사에 나오지 않는 냉담자들,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신앙을 증거하기를 주저하는 신자들이 분명하게 예수님의 편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진실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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