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고-김웅배) 남북 간의 ‘묵계(默契)’
  • 김웅배
  • 등록 2018-05-25 17:53:53
  • 수정 2018-05-25 18:22:40

기사수정



동질적 삶을 사는 집단에게는 대부분 ‘묵계’라는 것이 있다. 이를 사전적 의미로 풀이한다면 ‘말없는 가운데 서로 뜻이 맞아 문서 없이 약속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한편 신뢰(信賴)란 ‘굳게 믿고 의지함’을 말한다. 믿는다는 뜻보다 의지한다는 뜻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농경사회의 신뢰(信賴)는 묵계(默契)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목민족은 가차 없는 법의 시행으로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 바벨탑 사회에서는 절대로 ‘묵계’에 의한 ‘신뢰’가 이루질 수 없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 배경이 전혀 다른 집단이 모여 사는데 묵계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확실한 예이며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만 하는 미국의 예를 보면 더더욱 확실하다. 


신뢰는 암묵적 믿음을 기저에 둔 ‘묵계’와 칼 같은 ‘계약법’ 준수와 병행하면서 집단 속에서, 혹은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이러한 신뢰를 쌓아야만 할 시점인데도 그 마땅해야 할 기반이 자꾸 무너지고 있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남북한이 문서에 의한 계약 이전에 묵계에 의한 신뢰는 쌓을 수 없는 것일까? 


그래도 과거 수구 정권에 의해 남북 간의 거리가 멀어져 그 괴리가 깊어진 현상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하여 좁혀진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가감 없이 노출된 두 정상이 서로 소소한 예의를 갖추는 모습과 아주 작은 행동에서도 우리만의 ‘묵계’가 있는 듯한 느낌까지도 읽어냈었다. 그런데 남쪽의 홍준표류는 철저하게 우리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근간을 공유하는 동족 사회의 기본적 ‘묵계’조차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신뢰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일본이 남북한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각은 나름 이유가 있다. 대륙에 진출하고는 싶은데 방해물이 될 강력한 나라가 버티고 있다면 몹시 불편할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 속에는 섬나라 특유의 풍토와 근성에서 나오는 뭔지 모를 두려움과 함께 가까운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질시도 포함된다.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미국의 네오콘도 분에 넘치는 세계의 경찰 완장은 내팽개치고, 공연히 제3세계의 갈등을 유발, 조장하면서 보유 핵을 더 키우는 군사적 패권으로만 평화의 가치를 재단한다. 그들은 복잡한 무기체계를 쓸데없이 바꿔가며 대부분 서구인들이 점유한 다국적 군산 복합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개인적 의지도 숨기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는 트럼프도 있지만 미국 건국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건전한 시민 사회도 있다.


중국은 우리 민족과 수 천 년 간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그 문화권이 동일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으며 현재도 한반도에 미치는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옛 부터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반도는 늘 변방에 있는 자기네 속국쯤으로 여겨왔고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정벌할 생각도 갖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가끔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중원에 집권 세력이 약화되면 변방국들의 굴기가 항상 있어 왔고 그 틈새 틈새마다 주위의 변방소국들은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지금 중국은 미일 세력의 교두보인 한반도 남쪽과 자신들의 교두보인 북쪽을 대치시키는 일이 당연히 그들 국가 안보의 이익으로 간주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바라지는 않겠지만 현 상황의 안정적 고착도 내심 바라는 바 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남북 한민족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할 때


▲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될 때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임진각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문구와 한반도기가 그려진 플랜카드를 걸었다. ⓒ 문미정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타산이 이러할진대 저급한 안보 논리에 휘둘리는 수구집단들은 지금 무엇을 희망하고 무슨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모르고 있을리는 없다. 이젠 역사적 실존적 존재로서 동북아에 위치한 남북 한민족의 위상을 서로 점검하고 바로 세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홍준표류는 우리가 북쪽에게 항상 속아 살아왔고 지금도 속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러한 거짓을 버젓이 시전 하는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다. 6‧25 동란의 배경이 2차 대전 종전 후 냉전시대 초기, 동서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비롯된 미소간의 암투였다는 사실은 이미 사실로서 규정 된지도 한참 지난 ‘사실’이다. 


빨갱이 김일성의 개인적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켜 자유 민주주의자인 이승만이 미국에 도움을 받아 죽기 살기로 싸워 이긴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무수히 간첩을 만들어 낸 박정희 시대를 거쳐 아마도 전두환 정권까지는 이 가짜 뉴스가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팩트체크’가 전혀 없던 시대, 일방적 정보만 듣고 살아온 세대에게는 당연한 상황인식이었을 것이고 그 상황은 김일성의 북쪽도 대동소이 하다. 


전쟁의 참화는 그 사상자의 많고 적음에 따른 숫자적 결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인륜적인 처참한 행태가 전쟁 중에 가장 극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영역을 섭렵하지 않더라도 체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안이다. 여기에 토를 달 사람은 홍준표류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전쟁 중에 쌍방이 저지르는 극한의 몹쓸 짓은 그 경중을 가리기 힘들다. (광주에서 발생한 전두환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무도한 진압은 실제 전쟁 상황이 아님으로 제외하고) 쌍방이 장악한 주도적 권력이 전쟁의 원인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일 또한 쌍방이 똑 같다. 이러한 일방적 주장에 남북한 백성 모두가 각기 세뇌되고 스스로 경도(傾倒)되어 버렸다. 


6‧25 전쟁 전후에 남한에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은 피아의 구별이 없을 정도로 빈번히 일어났고, 북에서도 역시 피아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학살의 선혈이 난무했다. 거기에는 이념 갈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부추겨졌던 계급투쟁까지 겹쳐 동족끼리의 상잔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인간 내면의 야비하고 야만스러운 최종적 심상까지 전 세계에 보여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아직 그 헐렁한 이념의 찌꺼기를 인간 정신의 맨 위에 둔 듯한 김문수류가 존재한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들이 '무찌르자 공산당'을 되 뇌이며 ‘종북좌파 빨갱이 척결’ 운운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덜 떨어진 이념 논쟁을 부추기며, 북한 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다면 복잡한 은원관계로 벌어지는 ‘복수혈전’ 중국 무협소설류는 차라리 ‘전원일기’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최고 종교적 이념인 율법주의로 동족인 유다인들을 겁박하며 쓸데없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게 한 수구 바리사이 기득권 세력을 향하여 이렇게 일갈 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 27)


▲ ⓒ 가톨릭프레스 DB


이념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이 이념을 위해 존재하는가!


홍류에게 묻고 싶다. 수구세력이 종교적으로 섬기는 우파적 이념이(옳은지 그른지는 둘째로 치고)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 이념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가?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좌파에게 나라를 통째로 넘기면 김정은이 대통령이 되고 대한민국은 지금의 패망한 베트남처럼(지금의 베트남이 뭐가 잘못됐나?) 될 거라고. 


이런 황당한 주장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둔한 수구 정상배들의 그 헛소리, 그리고 그들이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내지르는 이간질에는 도대체 무슨 절박한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에 몰아넣고 죽일 것이다. (마태24, 6-9)


결국 북미간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설전 끝에 싱가포르에서 예정되었던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의 일방적 거부 서한으로 폐기되었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아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끼리도 얼굴을 마주 하면 손짓발짓을 통해서라도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 소중한 기회를 날린 북미 당국의 처사가 남쪽에서 보면 허탈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남한의 중재 노력이 헛되 보이지만, 그러나 그 진정성만큼은 아직 뜨거운 온기를 유지하고 있다. 북미 간의 쉽지 않은 대화 기회가 사라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두 걸음을 가기 위한 한 걸음의 후퇴라는 도움닫기로 여기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북정상 만남의 결과물인 ‘판문점 선언’의 시효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민족만의 ‘묵계’는 다른 어떤 외세도 갈라놓을 수 없는 지정학적 영토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 목표가 전쟁의 방지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쟁의 방지가 확실한 평화를 보장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적대적 공생관계가 아닌, 실제적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만으로도 남북한 백성들은 안도의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국내외의 일부 몰지각한 반평화 집단이 준동하지 않는 한!


북미 간의 신뢰가 ‘묵계’를 바탕으로 쌓이고 이루어질 리는 결코 없겠지만, 남북 간의 신뢰는 동족이라는 유전학적 사실에 기반 해서 ‘묵계’에 의해 쌓을 수 있으며, 남북 간의 흔들림 없는 상호신뢰는 비지니스맨 트럼프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남북은, 이렇게 쌓여가는 신뢰로 더 원대한 협약을 일궈내고, 종국에는 한반도의 평화가 결국 세계 평화의 대들보가 된다는 세계사적 사명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백성들 안에서 흐르는 여론의 물결은 흘러가는 냇물을 막기보다 어렵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북 간 민족 대통합의 입구에 서서도 백성들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국회’라는 곳에 기생하며,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서 요리조리 빠지며 희희낙락거리는 수구정상배들의 근거 없는 ‘남북대화 훼방 모략질’만 없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