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6일 화요일, 맑음
젊음이 좋기는 좋다. 간밤에 우리는 10시 반에 친교시간의 자리를 떠서 각자 방으로 흩어 졌지만 젊은이들은 그곳에 남아 그때부터 자기끼리의 친교를 시작했는지, 일기를 쓰다 들으니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우리 방 앞을 지나 자러갔다. 물론 6시 반 새벽 미사에는 단체결석을 했다. 나도 네 시간 밖에 못자서 안 떠지는 눈으로 성당을 향했다.
그래도 신학생들은 총장님 휘하여서 모두 참석한 걸 보니 책임감이 자신의 자긍심과 그 인격을 형성한다는 말이 맞다. 강론은, 어제 참석자 중 한 여교우가 “언젠가 배론 성지에 갔을 때 담당신부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강론을 하시는지 ‘저분은 천사임에 틀림없어!’라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그 신부님을 학회에서 뵈니 기쁘다”는 인사말에 기회와 찰나를 절대 안 놓치는 총무 노신부님이 “그럼 내일 아침 미사 강론은 이 신부님이 하시면 되겠네요.” 라며 부탁한 강론이다.
배론에서 온 이 신부님은 일본인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이어서 당시의 이야기를 소설화 한 엔도 슈샤크의 『침묵』을 얘기하였다. 하느님의 침묵, 종교 안에서의 침묵, 일본이 전쟁 당사자로서 책임져야 할 일에 입 다문 사회적 침묵을 얘기하셨다. ‘교부학을 연구하는 이들도 하느님 말씀과 자기 삶을 철저히 일치시켜온 교부들을 본받아, 교부신학이 공염불 아니라 책임 있는 사회적 행동으로 결실하는 삶으로 살아가자’는 훈유로 이어졌다.
그래서 하느님도 침묵 속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두고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와 참회의 질문을 던지고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할까?’하는 답을 스스로 찾아내길 기다리실 게다. 우리가 갈 지옥 역시 뜨거운 유황불이 아니라 사후에 자기 양심과 본심을 철저히 되새기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라고, 자기 삶과 이웃 불행과 역사적 과오를 책임지지 못한 그 후회와 자책이 다름 아닌 지옥불이라는 보스코의 설명이 설득력 있다.
정말 요즘 한국에서 살다보면 정치인 법조인들의 그 뻔뻔스런 모르쇠와 침묵에 억장이 무너진다. 어제 이재용 사건 재심판결을 내린 판사는, 경향만평에, 단연 개띠 해에 등장한 ‘황금개’로 그려져 자칫 사법부역사에 ‘삼성 판사’라는 별명으로 남겠다. 누구 말대로 ‘술에 만취해 큰 사고를 냈지만 음주운전을 한 것은 아니다!’는 역사적인 ‘명판결’을 남긴 까닭이다. 촛불시위로 혁명을 이룬 국민이 사법부에서도 얼마나 많은 개떼를 잡아내야 할까 가슴 답답하다.
오늘 오전 시간은 대부분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기에 나는 방에서 눈이 조금씩 뿌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책을 읽었다. 이층 홀에 세워진 성모자 목각상을 보면서 ‘성모님이 금계랍을 바르셔야겠어’라며 보스코가 낄낄거린다. 아들 예수에게 젖을 물린 성모상인데 아들이 너무 크게 조각되어, 유치원 다니는 늦둥이가 엄마 젖을 빠는 형상처럼 보인다.
점심을 먹고는 내년에 다시 만나기로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가 떠나 왔던 자리로 떠났다. 보스코가 오후 4시 반에 김대주교님과 의논할 일이 있어 광주로 대교구청을 찾아갔다. 지리산에는 눈은커녕 하도 가물어 양파 농사가 큰일인데 광주로 가는 길에 정읍 쯤부터 눈이 보였고 장성으로 넘어가자 백양사 일대 산자락이 온통 눈을 이고 있었다. ‘내칭고 리따’에게 전화했더니만 목포는 눈이 30센티쯤 와서 ‘완전 설국’이라는 자랑이다.
대주교님은 보스코와 늘 의기투합 하는 사이로 오늘 나눈 이야기도 소통이 잘 되었는지 두 사람 다 밝은 모습이다. 내게는 설날에 못 만난다고 미리 세뱃돈도 주셨다. 어른이나 아이나 돈이 많든 적든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일은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감동을 준다.
보스코가 대담을 갖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교구청 지하 ‘바오로딸 서원’에 계신 수녀님들과 인사를 하고, 전영금 수녀님이 없는 자리지만 식구끼리의 정을 나누었다. 마당에서 옥 주교님도 뵈었다. 쌩쌩 찬바람 속에 떠돌이개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시던 참이었다. 개가 새끼를 낳아 숨겨두고 키우는 중이더란다.
찬바람에 모두들 ‘방~콕’을 하는지 텅 빈 88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니 캄캄한 밤하늘에 주먹만 한 겨울별들이 쏟아져 내린다. 칼바람 부는 마당에 오랫동안 서서 혹시 떨어지는 별을 받으려고 팔을 폈지만 아직은 설익어서 별을 추수할 때가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