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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집안에서 간간이 숨바꼭질
  • 전순란
  • 등록 2016-12-14 10: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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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흐림


해가 지고 달이 올라 밤늦게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텃밭으로 내려가는 데도 손전등이 필요 없다. 내일이 보름이라니 저 달이 한껏 부풀겠다. 저 달이 차츰 줄어 침침한 밤이 온다 해도 그때쯤엔 빵기네식구가 모두 온다니 하나도 어둡지 않다. 시아와 시우, 생각만 해도 우리 두 사람 맘에는 보름달, 아니 해님이 환하게 떠오른다. 두 손주를 만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 보고 싶어진다. ‘손주사랑은 내리사랑, 내리사랑은 짝사랑’이라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우리 둘이 우선 행복해지는데?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쿠키를 굽는다. 얼마 전에는 생강 계피 쿠키를 구웠고 오늘은 유자 쿠키와 아몬드 쿠키를 구웠다. 집안에 냄새가 가득하여 코끝이 괴로웠을 진이엄마에게 젤 먼저 갖다줬더니 “아니, 형님, 아직도 쿠키를 궈요? 젊어요, 참 젊어!”란다. 그렇다, 내가 뭔가 하는 것을 멈추는 날, 그날이 내가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점심을 먹고서 한참 지나 집안을 돌아봐도 보스코가 안 보인다. “어?” 그가 안 보이면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찾아다닌다. 보스코도 간혹 식당채로 내려와 살짝 들여다보고 소리 없이 돌아가곤 한다. 내가 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문 뒤나 가구 틈에 살짝 숨기도 하고… 집안에서 간간이 벌어지는 숨바꼭질이다. 그래도 없다! “감동 뒤 매실나무를 베겠다고 했는데 혹시 전기톱 잘못 쓰다 무슨 일 났나?” 괜한 걱정이 불현 듯 해서 뛰어가 보니 그곳에도 없다!


텃밭으로 내려가 보니 배나무에 쳐진 그물망을 위로 올려 배꽃 필 무렵 벌나비가 드나들게 걷어올리고, 텃밭에 태우고 남은 마른풀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배나무 밭에 수북하니 떨어진 배봉지(올해 배농사 망쳤다는 표)를 주워담고, 그 많은 지주대를 한데 모아 키대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저 사람은 맘이 내키는 날이 일하는 날이어서 잔소리 않고 그냥 둔다.


보스코의 하루 (점심, 텃밭 그리고 저녁)




밭일이 끝나고 올라온 보스코에게 밀크커피와 새로 구운 쿠키를 내놓으니 그 행복해하는 얼굴이란 혼자 보기 아깝다. 시아와 시우의 합성사진이 그의 얼굴에서 보인다. 늙어갈수록 아버님 생전 얼굴도 그에게서 선명해진다. 세월이 가면 빵기한테서도, 시아한테서도 나타날 얼굴이다. 40여년전 광주 전남대학병원에서 빵기가 태어나던 날, 보스코가 아기를 처음 보는 순간, “아버님이 타임머신에 들어가셨나?” 할 만큼 갓난아기가 제 할아버지 얼굴을 하고 안기더란다.


지난 토요일 오랜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에 도착했을 빵기에게서 연락이 없어 전활 했더니 두 달 가까운 여행에 너무 지쳐 이틀 내리 잠만 잤단다. “굿네이버스에선 다들 너처럼 죽을 힘 다해 일하니?” 물으니 다들 그렇단다. 급료가 적은 NGO 단체지만 하고 싶은 일, 보람 있는 일이어서 책임지고 하다보면 저리 되는구나 싶다. “우리 아들, 훌륭하다! 힘들었을 테니 어여 자거라!”며 전활 끊었다.



오늘 온 ‘전라도 닷컴’을 보다가 한 글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백성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 더구나 재해를 구하고 피해를 입은 백성을 돌보는 것은 특히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백성이 편안한 자리로 옮겨간 뒤라야 내 맘도 편할 것이다”(정조: 안대희, 「정조 치세 어록」에서) 왕조시대에도 저랬는데 요새 새누리당 특히 친박 눈에는 대통령만 있고 국민은 없다. 오늘이 전두환이라는 자가 일으킨 두번째 군사반란의 날이어서 더욱 기분이 나쁘다. 


저녁식사 후 소담정 도미니카가 jtbc 뉴스룸을 보러 올라왔다. TV를 안 보던 나도 손님 맞느라 그녀 옆에서 뉴스룸을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책 읽을 시간을 빼앗겨 바보상자 앞에 앉기를 가급적 피했는데 이번에 촛불집회가 시작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정국을 보면서 뉴스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연속극보다 재밌다!”는 손석희씨 뉴스룸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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