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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7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6-07-23 10: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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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창세 18,20-32)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시편(137)

제가 부르짖는 날 제게 응답하소서 


제2독서(콜로 2,12-14)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복음(루카 11,1-13)

<청하면 너희에게 주시리라>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연중 제17주일 독서·복음 해설



제1독서(창세 18,20-32) 해설

<올바른 사람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간구는 공동체 전체에 구원을 가져다준다>


구원을 이어 주는 중개자들: 악한 사람들이 결국 선한 사람들을 물들게 하여 악하게 만들고 말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들에게 감화를 받아서 악한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오늘 창세기 독서에 나오는 일화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어떻게 해서든 멸망에서 구해 내려고, 올바른 사람 열 명만 있어도 구해 주시겠느냐고 주님께 여쭙는다.


점진적으로 더욱 뚜렷해지는 계시: 에제키엘(22,30)과 예레미야(5,1)는 한 도시를 구해 내는 데는 다만 의인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이사 53에서는 오직 ‘종’ 한 사람이 온 나라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도 홀로 당신 기도와 희생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신다.


인류 공동체의 구원은 오직 새로운 아담이신 올바른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외면하고서는 악한 길로 치달을 도리밖에 없다. 오직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올바른 길을 가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끼리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고, 세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와 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올바른 사람들만이 불의한 사회와 세계를 돌아서게 하여 구원할 수 있다. 


시편(138) 해설

<제가 부르짖는 날 제게 응답하소서>  

 

주님께서는 낮고 낮은 사람들 위에 불쌍히 여기시는 당신 눈길, 애착하시는 당신 눈길을 쏟고 계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이 울적해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기들끼리도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 올바른 사람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


올바른 사람들이라야 어질고 진실하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곤경에 처할 때 하느님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다.


제2독서(콜로 2,12-14) 해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의 참상을 함께 겪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민족현실과 인류현실 속에 자신을 내던져 몰입하기: 신앙생활은 어떤 특정한 이념체계도 아니고, 도덕체계도 아니다. 신앙인이란 어떤 ‘이념가’도 아니요, ‘덕행 전문가’도 아니다. 신앙인은 속칭 속된 사람들과 구별된 별천지에 속한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이란 어떤 울타리나 제도나 건물 속에 모여 구원을 독점하고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그 울타리를 넓혀가는 독선적인 선택된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이란 인간실존과 민족현실과 인류현실 속에 잠겨서 모든 사람의 고뇌와 고통과 죽음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이다. 신앙인이란 죽기를 각오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정의와 사랑의 길을 꿋꿋이 따라가는 사람이다. 신앙인이란 자기 자신 속과 사회 속에 도사린 악마의 세력을 쳐부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몸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다.


용서와 기쁨과 자유: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아 처벌과 멸망에서 구출되고 죄악과 악마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은 기쁨과 환희에 넘친다. 그런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누구 앞에서도 겁먹을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와 기쁨과 자유가 세상 안에 넘쳐흐르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것이다.


복음(루카 11,1-13) 해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만나고 성령과 친밀해지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간구하라고 가르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인 예수님의 아버지시므로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 나 또는 몇몇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 흑인, 백인, 황인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똑같이 애정을 기울이고 계시는 아버지시다. 민족이나 국적의 장벽은 그 한 분 아버지 앞에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온 인류는 한 혈육이요 한 형제요 한 가족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모든 사람・모든 백성・민족전체・인류전체를 내 형제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느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내가 모든 사람을 내 혈육과 내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때이다. 민족과 인류가 처한 현실과 상황 속에 온 몸으로 뛰어들어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아버지의 나라가 어서 빨리 임하시도록 기원하고 몸 바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내 아버지도 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서로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적에, 아버지께서는 부족하지 않게 먹고 살 양식을 골고루 베풀어 주실 것이다. 사람은 하루 세 끼면 족하다. 욕심 부려 하루에 열 끼 스무 끼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골고루 나누노라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친교와 기쁨이라는 천상양식이 철철 넘칠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가장 사람다운 행위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결함투성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감싸주고 덮어주고 용서하는 길이다. 사람은 사람을 서로 애초부터 이미 용서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결과를 대신 받으려는 그리스도다운 자세가 인간관계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만큼 하느님께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집요하게 간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고 위대한 선물인 성령을 주실 것이다. 성령을 생명으로 받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지시에 충실한 사람은 무한한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 성령께서 그런 사람에게 아버지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불붙여 주실 것이다.



묵상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하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어떤 때는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되는 수도 있지만, 흔히 기도와는 거리가 먼 심경일 경우가 많다. 잡다한 일상사에 짓눌리고 쫓기다 보면, 마음을 다잡아 하느님과 대면하고 대화를 나눌 여유를 찾기가 힘들다.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스승께 청한 사도들의 태도를 본받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도 스승께 기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답변은 항상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를 뛰어넘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 준다거나 기도하는 안전한 방법을 일러 주는 대신, 우리를 기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버지와 직접 친교를 누리게 하신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루카 11,2)


이 단순한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참신함을 엿볼 수 있다.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그대로 따라할 일이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늘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모든 일을 상의 드려야 할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기도는 사랑의 친교이며, 우리 편에서 보자면 거저 받은 은총임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는 생활 자체이다.


실천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자칫하다가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오늘 복음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을 청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집요하고 끈질기게 청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나에게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국내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청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지시에 충실히 따를 수 있게 해 주시라는 기도를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끈질기게 바쳐야 한다. 기도를 어떻게 바쳐야 할지 몰라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로마 8,26)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의 기도에 우리 마음 자세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드리고 계신다. 그 간절한 성령의 열망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때 우리 삶 자체가 기도로 변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쳐 주고 지시해 주시는 성령께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성령의 지시에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즉 기도하는 가운데서라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아버지의 구원 계획과 구원 사업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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