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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 포럼 : "종교와 국가의 공모" -2부
  • 이찬수
  • 등록 2016-03-28 10:46:47
  • 수정 2016-03-28 18: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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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종교, 국가, 자본주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다. 종교인이 그렇게 많아도 사회와 국가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더욱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허심탄회하면서도 비판적으로 탐색한다. 토론회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토론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박일준(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책임연구원, 종교철학)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제정치학),

신익상(성공회대 연구교수, 조직신학, 정리),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철학/신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불교담당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진행),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종교는 국가와 대결하기도 한다


- 이관표: 종교사학자들은 종교를 두 가지 부류로 이야기한다. 하나는 자연종교적인 입장으로서, 계급 질서를 유지하고 삶의 자연법칙을 맞춰가는 형태다. 다른 하나는 모세로부터 출발한 유대의 종교가 취하는 입장이다.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에서 나온 만인사제설의 정신이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등에 담긴, 불쌍한 자들의 혁명을 지지하는 형태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그렇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도태돼서 사라져 버려라”라는 법칙에 충실한데, 개신교는 원칙적으로 이런 법칙을 반대하는 제일선에 서 있다.


하지만 오늘날 개신교는 국가와 결탁하여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비판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참다운 종교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개신교는 ‘호국 기독교’ 노릇을 하며 국가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를 자처하기도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논해야 한다.


나의 종교적 배경인 개신교의 경험으로 보면, 종교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서 순응적 삶을 단절시키려는 삶의 형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천국과 지옥이라는 내세관이 유행하는 것은 자신만 ‘잘 사는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원래 종교는 끊임없는 자기합리화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혼란스런 삶을 제어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국가와 대결구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원영상: ‘종교’는 원래 불교적인 개념이었다. ‘종(宗)’, ‘교(敎)’, 그리고 ‘종교(宗敎)’라는 말은 본래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용어다. 근대에 일본이 Religion의 개념을 이해할 때, 서양의 계시적인 종교를 개오(開悟)적인 종교인 불교 같은 동양 종교의 시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으로 불교와 같이 삶의 철학과 결부된 동양의 종교를 서양의 종교적인 측면으로 봄으로써, 종교적인 제도도 함께 도입하게 된 것이다. 정교분리를 이러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적 전통에서 생긴 정교분리 제도가 들어와 국가와 종교라는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된 것은 근대국가의 성립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성과 속을 지배하는 이러한 양자의 체제는 결국 같은 형태의 권력을 내부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다. 한편, 오늘날 종교는 이러한 정교분리의 우산 속에서 오히려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 공공질서를 앞세워 종교설립에 대한 인증을 국가가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국가의 하부구조로 전락한 종교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국가 존재의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종교가 결국 스스로 정치화, 계급화 하는 가운데 게토화되면서 국가 권력에 의해 그 자유와 자율성이 해체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는 종교적인 선을 추구하는 것도 분명히 있다. 또한 인간이 직면한 불안이나 한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고 위안을 주는 것이 여전히 종교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본연의 목적에서 이탈한 종교는 정교분리라는 미명 하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의 속성을 닮고 구조화해 가는 바람에 국가 폭력에 의해 무기력하게 해체되어가는 중이다. 


- 이찬수: 정교분리의 근본 원인을 종교에 있다고 보아야 할까, 국가에 있다고 보아야 할까. 어느 한쪽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는가. 


- 원영상: 서양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 원인은 어디까지나 종교 내부에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末法)시대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시대를 말한다. 정법(正法)시대에는 가르침과 수행, 그리고 깨달음이 모두 존재했다. 하지만 말법시대에는 수행과 깨달음은 없고 거짓 가르침만 난무한다. 그런데 말법시대의 도래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패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의 부패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대집경(大集經)》에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 이로 인한 무질서와 패악으로 인해 종교 스스로 해체되고 만다는 말법시대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모습의 하나는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국가의 영향력으로 인해 교회, 사찰, 그리고 교당이 또한 자본주의화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예컨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마음공부나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종교는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기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힐링 프로그램은 자본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은 없이 오직 자본주의의 속성인 소비되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개인 차원의 위안만 제공하고는, 자본주의적 삶에서 낙오한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고 이러한 고통스런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그것도 자본의 힘으로...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 Schumacher, 1911~1977)에 의하면 불교는 본래 가장 자본주의적인 종교라고 한다. 최소한의 소비와 자원의 순환을 지향하는 불교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주장하는 자본의 논리에 맞으며, 자원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생태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호불호를 떠나 일본에서 불법(佛法)민주주의라는 슬로건으로 행해지는 정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종교는, 자본과 함께 무한팽창을 노리는 국가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종교 내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시하고 해법을 찾을 때에라야 가능하다. 가령 불교는 성불(成佛)이라는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제중(濟衆)이라는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유교도 격물(格物)로 시작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종교는 자신의 고유한 내적 질서에 입각해서 개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 


- 박일준: 한 가지 걸리는 것은, 21세기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국가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현재 국가 제도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종교의 모습을 고려할 때, 종교는 갖추고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에 국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힘들고, 따라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힘들다. 


하지만 기독교 초대 공동체의 경우를 모델로 보면, 공산주의와 조금 달랐던 부분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동등하게 나누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각자의 필요를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한 친숙한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형성해서 경제를 일구어 나갈 때 각 종교 안에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원리가 있을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대안보다 더 큰 그림이 21세기에는 필요하다.


이찬수: 이관표 선생님이 아까 도태가 자연법칙이라면 그것을 거부하고 비판하며 바로 잡으려는 자세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자연법칙과 종교적인 것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원영상 선생님이 말한 불교의 말법도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어져간다는 것을 판단할 어떤 기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기준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은 반자연적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관표 선생님의 이야기와 원익선 교무님의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영상: 중국에서 발생한 정토교(淨土敎)나 삼계교(三階敎)의 이념을 보면 철저히 반권력적이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삼계교 같은 경우는 국가에 대항하는 종교였다. 무진장원(無盡藏院)이라는 창고를 만들어서 시주한 재물을 모아 민중을 구원해주는 역할을 했다. 종교 자체가 국가의 역할을 했다. 국가의 역할인 분배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이로 인해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아 소멸되었다. 정토교도 마찬가지이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 하나만으로 계급이나 차별을 떠나 완벽한 평등을 구현하려 했다. 이것은 인간의 하열한 근기로 인해 구제불가능하다는 말법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자대비의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 종교이다. 종교의 이러한 출발은 오늘날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이고 반국가적인 역할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다.


이찬수: 그것도 한 때 얘기 아닐까. 오늘날 종교에 그런 대안성이 있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하튼 개념 정리를 위해, 종교가 국가에 대항한다는 말은 부당한 권력에 대항한다는 뜻으로 좁혀 이해하는 게 좋겠다. 국가에 대해 대안적이라는 말도 개인의 주권을 침해하는 상위의 권력이 개인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할 능력이 종교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그게 가능한가이다.



종교도 자본에 포획되어 있지만


김근수: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의미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이미 자본에 장악당한 이후에는 종교와 국가의 관계에서 종교와 자본의 관계로 논의 주제를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민족국가 시대를 지나 다국적 기업이 등장하고 권력이 선거를 통해 교체되는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국가와 종교의 관계보다 종교와 자본의 관계가 좀 더 절실하고 솔직한 논의 대상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국가와 종교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해도, 국가 뒤에 있는 자본, 국가 권력을 지휘하는 자본 권력이 먼저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이찬수: 종교가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일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진단할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어떨까.


이병두: 불교의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 당시 사람들이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부르던, 오늘날의 재벌급 되는 사람으로 수닷따라는 이가 있었다. 이 이는 황금을 팔아서 기원정사를 지을 땅을 사주기도 했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도 앞장섰다. ‘외로운 이들을 지원해준 부자’라는 의미에서 급고독장자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는 스님들이 가난한 자를 돕는 급고독(給孤獨)의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이제는 부자, 장자(長者) 이야기만 한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장마철 안거(雨安居)를 날 수 있기에 가장 적합한 땅을 사서 절을 지어드리려고 마음먹었으나 그 땅의 소유자가 ‘팔지 않겠다’는 뜻으로 “필요한 만큼의 땅에 황금을 깔아놓으면 그곳을 팔겠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결국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하는 불교 최초의 절을 지어서 교단에 바친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20여 년 전까지는 부처님 오신 날(佛誕節)의 법문 주제가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 해서 부자들이 켠 등은 밤새 꺼져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켠 등은 밤새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이야기들이 사라졌다. 빈자들이 등을 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벌급 부자인 장자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변화가 모든 종교에게 공통된 사정일 것 같다.


어찌 보면 한국의 거의 모든 종교계가 ‘자본에의 종속’을 넘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국가의 역할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서보혁: 국가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국가 자체를 목적으로 보던 중세 말의 경우와 달리 제국주의가 팽창할 때에는 국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시각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수단으로 보고 있다. 또 국가를 하나의 공간으로, 여러 집단들이 경쟁하고 자기 이익을 투사하는 공간으로 볼 수도 있다. 


1970년대 자본주의가 정체되었을 때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국가를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당시 국가에 대한 이해는 여러 성격이나 종류가 있었던 것 같다. 국가를 도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국가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그러나 강력한 수단으로서 중앙정치권력을 말한다. 그 다음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우리가 사회운동이나 여론 등을 통해서 국가의 제도나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상당히 기능적인 차원에서 국가를 이해했다는 뜻이다.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종교와의 관계 설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박일준: 미국의 총기 소유 논란을 통해 국가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지금 미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총기 소유 문제이다. 미국적 상황에서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미국은 주정부와 연방정부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연방정부가 주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한 것이 총기소유이다. 지금에 와서 그것의 부작용으로 총기소유 금지 문제가 나오지만 그 때마다 다시 거센 반대가 일어나는 이유는 총기소유가 연방정부에 대한 주정부 독립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총기소유를 금지한다고 해서 총기소유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는다. 결국 정치제도는 어떤 특정시대의 산물이지 않을까 싶은데, 국가 없이 폭력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근대국가 이전에도 이에 대한 조정은 있었고 그 이전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부족사회에서도 사실은 통제 활동이 있었다.


서보혁: 국제정치를 보는 패러다임에 따라 다르지만, 현실주의 시각에서는 국가가 가장 중요한 어떤 유일한 행위자라고 가정을 하고, 자유주의에서는 국가가 중요한 행위자라는 것을 인정하되 국가 행위자 외에도 NGO나 정부 간 기구, 또는 유엔 등도 행위자로 이야기한다. 시각에 따라 기본적으로 다르다. 정부 간 기구에서는 안보문제를 중요시 하고 세계화 들어서는 금융통상 문제도 다루고, 인권 문제의 경우에는 비정부의 역할도 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제도적으로 구체화되어 가는지의 여부이다. 


정주진: 앞서 제가 종교 집단은 국가보다도 폭력을 제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러면 국가는 제대로 작동하느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가능성을 열어두고는 있다. 민주주의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가능성은 열려 있고, 시민들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국가의 폭력적인 면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또한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자본이 국가를 집어삼켰다고는 하지만, 자본주의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구조를 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국가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자본을 상대 할 때는 국가를 상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자들이나 국가를 대변하는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시민인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자본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종교에 역량이 있다면


박일준: 그것이 중요한 차이였던 것 같다. 여전히 국가를 통해서 개선의 장치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우리 시대의 국가가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국가보다는 종교가 그런 내적인 역량을 갖고 있다. 비록 그 역량이 종교 내에서 왜곡됐지만 어쨌든 그런 역량을 내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실 관점의 차이다.


정주진: 저는 그 부분에서 낙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가 가능성이 있다 해도 지금의 종교는 구조와 체계를 갖춘 제도 종교, 종교 기구가 되면서, 일부 집단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로 살펴봤을 때, 저는 지금까지는 없다고 본다. 교회도 성직자 중심으로 모든 제도가 돌아가는데 그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권력을 분배하고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신익상: 양자의 견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제도종교와 종교의 정신을 분리해서 논의한다면, 두 분의 견해는 사실 같은 것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도종교가 종교 본연의 정신을 왜곡하거나 내버렸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듯하다. 정주진 박사님은 종교의 정신을 배반한 제도종교의 측면에서 종교비판을 하고 계시다면, 박일준 박사님은 종교의 원 정신에서 국가의 폭력성을 극복할 대안을 찾고 계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좀 더 구체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그 한 예로, 저는 근본주의 비판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근본주의는 종교적 보수주의가 정치적 세력화를 통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기에 종교와 정치를 잇는 매개변수로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계속)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 "종교와 국가의 공모"- 3부에서 계속됩니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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