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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 포럼 : "폭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2부
  • 이찬수
  • 등록 2016-01-29 10: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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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억의 사람이 종교인이라지만 폭력적 현실은 지속된다. 종교가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평화를 내세우는 종교인이 도리어 폭력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을 벌였다. 토론회의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토론자(가나다순): 

김근수(가톨릭프레스 발행인, 해방신학)

김대식(대구가톨릭대 대학원 강사, 종교학)

류제동(성공회대 연구교수,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윤인중(에큐메니안 운영위원장, 인천평화교회 목사)

이관표(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철학/신학)

이병두(종교칼럼니스트/북칼럼니스트,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사회)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 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박사)

홍정호(연세대 학부대학 강사, 선교학)




국가와 종교, 유사한 체계


- 이찬수: 계속해서 국가와 종교의 구조적 폭력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가르침에서 보편성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진리는 보편적이라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가르침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보편적 진리가 적용된다는 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서 3:28) 이것은 혈연, 지연, 신분, 성차별을 철폐하고 인류가 하나라며 선언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을 통해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간주되는 이들을 차별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면서 다른 국가의 국민들을 차별하거나 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도화된 종교나 국가의 자기중심적 폭력은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영토 안에 있는 이들만을 내세우는 근대 국민국가라 체제 안에 있는 종교가 과연 보편적 진리를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종교는 보편적 진리를 말한다면서 실제로는 자기중심적 해석을 통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모순을 범하지 않습니까. 


- 이관표: 서양의 역사에서 국가와 종교는 대립관계를 지속해 왔지만 오늘날의 종교를 보면 국가의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종교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 국가와 종교 모두에 있어서 종교성의 문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보수와 진보로 드러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호(好) 불호(不好)의 문제입니다. 절대성에 대한 추구를 통해 삶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기대가 무너지는 데 따른 불안과 공포가 특정한 하나의 입장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자비나 평화처럼 국가나 종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종교가 갈등을 빚고, 종교 간에도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종교적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공포라는 면에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정주진: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공모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치권력이 종교집단에 원하는 것은 표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신도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표를 얻는 게 가능합니다. 때문에 정치권력은 종교를 이용해 표를 얻고, 종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부여받는 관계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신도들의 시민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종교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이병두: 그렇습니다. 정치권으로서는 종교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종교가 당선은 못 시켜도 낙선은 시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1987년 대선에서 불교세가 강한 부산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가 예상보다 적게 표를 얻고 결국 낙선된 배경에서 이런 일이 드러났고, 그래서인지 김영삼 씨는 그 뒤 불교계에 과도한 공을 쏟아 부었고, 이런 일은 또 불교계 일부에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잘못된 자신감을 갖게 해서 그 뒤 선거 때마다 정치권의 ‘예산 지원’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부 신흥종교 집단의 경우에도, 집단을 형성하고 있어서 ‘표의 결집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대선 때에는 그쪽에게 이런저런 약속을 해주었던 것으로 압니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성직자, 순종하는 평신도


- 김근수: 종교 내부에서 종교권력은 이미 완결되었습니다. 국가와 거래를 하는 것은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지, 평신도들이 아닙니다. 성직자들과 소수의 평신도 그룹이 다수의 평신도를 장악하는 구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국가와 타협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내부의 권력구조를 개혁할 필요가 있습니다. 


- 전철후: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세력을 확산해 가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종교들이 사회복지시설이나 청소년 시설 등을 법인화하고 위탁사업 등을 진행하려면 종교가 국가권력의 관리 아래 들어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종교의 확산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신앙과 수행 체험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너무 방편적인 부분에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국가 위탁사업들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평신도들은 교세 확장이라는 명분을 위해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정치권력과의 공모관계에 기여하는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 정주진: 평신도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종교 내에 폭력적 구조가 만연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평신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복종에 익숙한 신자들의 복종이 종교가 국가폭력을 강화시키거나 유지하는데 영양분을 제공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각 종교의 평신도들이 민주적 시민의식을 길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 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좀 더 알고 있는 교회를 보면, 교회는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신자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식수준이나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도 그런 교회와 구조에 전혀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는 교회의 폭력적 구조에 익숙한 신자들은 국가 구조 안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는 시민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교회의 폭력적 구조에 의해 복종에 익숙한 시민이 길러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폭력적 구조를 바꾸는데 교회가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폭력적 구조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폭력적 사회 구조를 강화시키는 종교와 국가의 협력적 관계가 만들어져 있는 겁니다.  


- 김근수: 천주교 성직자들은 민주주의를 싫어합니다. 민주주의를 사회에서 확산시키고 싶으나 교회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만, 신자들이 교회 내에서 민주주의를 하자고 하면 성직자들은 당황할 것입니다. 가톨릭의 원죄는 가르침과 조직의 분열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은 평등을 지향하는데 조직은 권력의 상하 구조 속에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되, 그 틀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탈/신성화된 국가, 종교들의 유착


- 이관표: 국가와 종교의 체계는 유사합니다. 국가나 종교나 상층부에 있는 지도자들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 국민들은 국가를 신성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국가는 철저하게 탈신성화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층의 부정이나 전횡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유사한 체계인 종교에 있어서 탈신성화는 아직도 요원한 과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큰 교회들에서 세습이 가능한 건 권력이 여전히 신성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김근수: 국가가 탈신성화되었다는 말씀도 이해되지만, 국가도 종교처럼 신성화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국가가 비신성화 되는 길을 걸어왔지만, 우리의 경우는 국가의 틀이 갈수록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종교의 역할을 오늘날 국가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종교가 국가의 신성화의 틀을 깨 주어야 할 상황입니다. 


- 원영상: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종교가 국가권력의 신성화를 보증해 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근대 국민국가는 종교와 국가의 갈등으로부터 출현했는데 현실에서 종교의 역할은 국가의 지배 아래에서 국가가 상실한 신성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면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 이찬수: 가령 유럽의 경우에는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타결되었고, 이를 통해 한편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종교들이 싸우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상위 범주가 되었습니다. 종교가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는 하위 범주로 전락한 거죠. 근대 국민국가체제는 국가가 종교 위에 군림하는 구조입니다. 종교와 국가의 긴장 관계가 깨지고, 종교적 통치의 자리에 국가가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종교에 충실할수록 상위 범주로 작동하는 국가를 인정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종교는 국가의 폭력을 구조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온 셈이기도 하구요. 


- 홍정호: 종교가 국가폭력을 구조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 온 데 있어서 개신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오늘날 논의되는 종교권력이란 개신교권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근대 한국사회에서의 종교와 권력의 유착관계의 원형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김진호나 강인철, 윤정란의 연구가 참고가 될 텐데, 한국개신교는 그 탄생의 기원으로 간주되는 ‘평양대부흥운동’에서부터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반공주의와 자본주의를 ‘올바른’ 신앙의 내용으로 학습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추동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두 축이 거칠게 말해 반공주의와 자본주의 아니었습니까. 개신교와 근대 한국사회의 이념이 완벽하게 결합한 사례입니다. 불교나 가톨릭의 근대화 모델은 이 점에서 개신교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톨릭단체에서 주관하는 어느 모임에 초청받아 알게 되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도 신자들이 자꾸 이탈하니까 개신교로부터 교회성장의 전략을 배워야한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김근수: 저는 한국의 근대화를 독립 세력과 개화 세력의 충돌로 봅니다. 종교는 개화 세력에 신경을 썼고 독립 세력은 약했습니다. 남한의 역사는 독립 세력보다는 개화 세력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종교가 국가와 타협을 했습니다.



비판하며 따라하기


- 정주진: 해방 후 역사를 보면 특히 개신교는 권력 지향적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개신교 목회자들을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로 채워졌고, 교회가 미국의 물자 지원을 적극 이용하는 혜택도 받았습니다. 군목제도도 사실상 개신교가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기독교적 성향이 강한 미국의 정치권력과 역시 기독교 인사들이 대세를 이룬 한국의 정치권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가운데 한국 개신교의 급성장이 이루어진 건 사실입니다. 


- 이병두: 맞습니다. 스님들 중에서도 조용기 목사를 부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 원영상: 불교도 이제 일요법회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신도 교육도 활발해졌습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운영체계를 분석하여 벤치마킹을 하기도 합니다. 제도화된 종교의 폐쇄성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불교에서조차 근대 기독교의 성장모델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병두: 해방 이후 비구-대처 사이의 치열한 내분을 거쳐 1962년 자칭 통합조계종단이 출범한 이후 수십 년 동안 불교계가 ‘현대화 한다’며 추진해 온 일들, 예를 들어 군법사 ‧ 종립학교 교법사 제도와 병원과 복지재단 설립 등은 개신교를 부러워하며 그들을 추종하기에 급급했던 것이죠. 다른 한편으로 교단 구조나 신도와의 관계 설정 등은 천주교를 모델로 삼고 있죠.


- 이관표: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성장을 추구하는 종교가 사람들이 무지한 방식으로 이끌고 있지만, 사람들이 왜 그것을 따르고 있는지를 동시에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근대화의 모델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이른바 보수적인 신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찬수: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중심적 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려는 입장이나 자세에 역시 종교의 이름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자세들이 각종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원인 아닌가요. 그런 자세가 폭력적 현실에 공헌하는지 어떤지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폭로하는 일이 긴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종교는 없는 편이 나을 것 같구요. 이런 토론을 하는 이유도 우리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위험한 구조 속에 노출되어 있는지 더 적극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면 폭력은 인간의 목을 더 죄어오고 종교는 계속 모순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토론 내용을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비판적 폭력 담론도 좀 더 확대되어서 국가의 폭력적 구조, 종교의 모순적 환경이 극복되는 데 일말이나마 공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좀 더 노골적이고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 "폭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3부에서 계속됩니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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