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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이빨을 지으신 하느님의 장난끼
  • 전순란
  • 등록 2015-10-15 09: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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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맑음

 

서울 가는 '함양지리산고속' 버스를 탔다. 남이 운전하는 차라 좋고 일반 승용차보다 좌석이 높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산위로 마악 피어오르는 안개며, 그 산 기세에 눌려 야트막하게 순응하는 농가들이 겸손하다. 농사를 지어보면 하늘이 주셔야 모든 게 풀린다는 인생사를 가장 뼈저리게 익힌 사람들의 삶이 그 집집에 담겨 있다.



길가에 검정 망을 깔고 그 위에 나락을 널면서 땅바닥을 기는 아짐들 손길이 바쁘다. 흰쌀은 노랑 겨를 입고, 검정 쌀은 거무튀튀한 겨를 입고서 몸에 배인 마지막 물기를 말리는 중이다. 자식 보살피는 어미 맘으로 아침에 나락을 널고 저녁에 거두는 아낙들의 손은 거칠지만 한없이 정성스럽다. 그 눈길들은 대견하기만 하고 그 맘들은 뿌듯하기만 하다. 쌀가마니에 담기는 것은 나락이라기보다 저 이들의 땀과 정성과 뿌듯함이다. 도시 살 적에는 시골길 절반을 말리는 나락이 차지하면 성가셨는데 이젠 맞은 편 차를 기다리는 여유가 생겼다. 자연이 일러주는 너그러움이다.



8시 20분. 터미널 건너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버스에 오르니 벼농사가 대충 마무리된 할메들의 서울 나들이가 많이 보인다. 기사가 버스표를 받으며 돌다가 “할메, 딸네집 가죠?” “우에 알았노?” “보따리에 호박닢 한 가득하구먼. 며느리네 갈 땐 그리 안해. 참깨나 돈 나가는 거 담제.” 딴 할메가 말을 거든다. “맞아. 며느리한테 이런 거 갖다 줬다간 쓰레기통으로 직빵이라, 즈그 오메가 갖다 주는거나 먹제. 그러니께 갖다 주기 전에 꼭 물어봐야 혀. 딸이나 지 오메가 농사짓느라 울매나 고상혔는가 싶어 아까바서라도 다 먹지....”

 

아아~, 그 며느리도 누군가의 딸이련만... 아짐들 맘 속엔 ("금쪽 같이 키운 내 아들 홀려서 데려가 버린 년"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하다. 며느리를 마치 딴 별에서 온 E.T. 취급을 하니까 '며느리’라는 여자도 “‘시’자가 들어가는 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2시에 한전병원에서 이를 뽑아야 하는 보스코는 마을버스에서 중간에 내려 병원으로 곧장 걸어가고 나는 통장댁에다 밀가방을 맡기고 뒤따라갔다. 옥련씨랑 함께 살짝 치과에 들러보니 과장 의사의 뻰치와 송곳과 연장에 주눅이 들었는지 보스코는 아야 소리도 못하고(마취를 시킨 뒤여서겠지만) 입을 벌리고 있다. 내가 함께 갔더라면 엄살 꽤나 했을 텐데....

 

그래도 용감하게 이를 뽑았노라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오다 나를 보고 씨익 웃지만 엑스레이 필름에 나타난 그의 치아치고 가지런한 이빨이 단 한 개도 없다! 이번에 빼낸 송곳니 위 잇몸 속에 옆으로 누워 있는 앞니 하나는 큰아들 빵기에게도, 큰손주 시아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되었다. 어쩌면 저런 고약한 것까지 유전이 되는지... 하느님은 창조사업에서도 장난끼가 꽤 심하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스코 이가 못났지만 튼튼하기로는 이를 데가 없어 애오라지 감사드릴 밖에.  


집에 와서는 단호박을 쪄서, 갈아서, 우유에 섞어서, 죽을 쒀서, 또 차게 식혀서 보스코에게 먹였다. 브로콜리와 두부 무침, 상추 샐러드, 비름나물을 상위에 올렸더니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하고 잘도 먹는다. 그의 이쁜 점 하나가 일년 열두 달 365일 단 하루도, 단 한 끼도 “입맛 없어. 밥 먹기 싫어.”라는 말을 안 하는 거다.

 

내일 송목사가 오랜만에 인사차 들른다기에 조개 스파게키를 해 주려고 동네시장엘 갔다. 생선집 아줌마가 고추에 멸치를 볶아 담고 있어 “아저씨가 세상을 버려서 혼자 힘드시죠?”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버리긴 누가 버리라고 했나? 지가 버렸지. 뵈기 싫어. 생각도 하기 싫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엔 그 새 눈물이 가득하다. 집에 와 파브리카 구이를 해놓고 조개를 손질하면서도 생선집 아저씨 생각이 많이 났다. 퉁퉁한 얼굴에 후덕한 말씨로 누구에게나  넉넉하던 분이었다. 하느님 품에서 그 오랜 병고를 털고 행복하시기를... 남아 있는 아내에게도 넉넉한 위로의 마음을 전하시기를....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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