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주교의 일기장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악행
  • 신성국 신부
  • 등록 2015-10-12 10:00:10
  • 수정 2015-10-15 17:29:32

기사수정


▲ (사진출처=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한국교회가 지금 시급하게 할 일이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관권을 총동원시켜 총체적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은 반민족 친일파 일당들이 현재 추진하는 한국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막아내야 한다. 매일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 진실과 선을 파괴하는 거짓의 악들과 맞서 싸우는 소명감을 가져야 한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를 따른다는 천주교회는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 세월호 학살 범죄를 저지른 생명 파괴범들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추악한 범죄를 심각하게 인식하여 수단과 방법을 다해 막아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을 사는 길이며, 민족을 구원하는 길이다. 만일 이 정권의 패악질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친일파 정권의 범죄에 동참한 것이며, 결국은 하느님과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는 교회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교회의 수장들은 민중들의 비참한 삶에 무관심했고, 지배자이며 약탈자인 일본 권력의 편에서 행동하였음을 뮈텔과 드망즈 주교일기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안중근 토마스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한 날 부터 기록한 뮈텔주교의 일기장을 들추어 보자. 



「1909년 10월 26일  드망즈 신부가, 한 한국인에 의해 이토(伊藤)공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장안에 나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저녁 5시경에 왔다. 애도의 인사를 하러 통감부로 가서 소네 자작의 비서인 사다케 남작과의 면회를 청했다. (소네 자작은 소네 아라스케 통감이며,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제2대 조선 통감)


정치란 서글픈 것이다. 이토 공의 이번 암살은 공공의 불행으로 증오를 일으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습은 일본인들이나 몇몇 친일파 한국인들에게서 보일 뿐이고 일반 민중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10월 30일 : 이토 공의 암살 주범이 천주교인이라는 고발이, 원래 신천 출신으로 2년여 전에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떠났다는 암살자에 대한 소식들과 함께 다시 화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들로 볼 때, 그것은 아마 안 도마(안중근)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11월 2일 : 일본 국경일을 기해 오는 3일로 예정되었던 가든파티가 있었지만 통감부의 초대가 오늘 취소되었다. (11월 3일은 일본의 국경일로 문화의 날이다)


통감부에서, 도쿄에서 이토 공의 장례식이 4일 오후 2시에 거행될 것이라는 통지가 왔다. 불행히도 오늘 오후 또 대련에서 온 전보가 우리의 모든 희망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이 전보에 의하면 응칠(應七)이란 이름은 암살범이 여기저기서 여러 번 사용한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안중근이라는 것이다. 


11월 4일 : 8시에, 수녀들이 만든 화환을 이토 공의 장례식에 보냈다. 용산의 세 신부가 서울에 왔다. 1시 반에 우리는 함께 이토 공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떠났는데 장례식은 헌병대 병사에서 거행되었다. 입장하면서 소네 자작(통감)에게 인사했다. 조화(弔花) 화환은 세 개뿐이었고 그중 天主敎會라고 큰 글자로 쓰인 우리 것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1910년 2월 14일 : 안중근 도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고, 또 신부 한 명을 보내 달라는 전보가 왔다. 


2월 15일 : 여순으로부터 여러 번 전보를 받은 드망즈 신부가 오늘 회신을 보냈다. 나는 거기에 빌렘 신부(청계동 본당 신부)를 보낼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이게 했다.  


2월 16일 : 오늘 저녁 5시경에 여순 재판소의 일본인 검사로부터 사형수와 빌렘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식 전보를 받았다. 이에 대해 면회를 허락해주어 매우 고맙지만 여순으로 신부를 보낼 수는 없다고 회답했다.


2월 21일 : 오늘 저녁 8시가 지나 여순에 온 안명근(야고버)이 빌렘 신부를 안중근 도마에게 보내주도록 다시 간청하러 왔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이유들을 들어 그에게 설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불만해 하는 것 같았고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했다. 


3월 4일 : 빌렘 신부로부터 여순으로 보낼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가 또 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형수로 하여금 그의 거사 이유를 취소케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여전히 거절하는 것이고 그러나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이러한 취소의 어떠한 증거를 나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회신했다. 이 편지를 부치자마자 빌렘 신부가 그저께 여순으로 떠났다는 경찰의 보고 소식을 들었다.


3월 5일 : 오늘 아침 신문에 빌렘 신부의 출발이 보도되었다. 그 편지는 가는 도중 2일에 재령 우체국에서 부친 것이다. 불행하다. 고집 쓰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데!


3월 15일 : 빌렘 신부가 13일 대련을 떠나 같은 날 기차 편으로 진남포로 출발했다고 신문들이 보도했다. 그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2개월 동안 미사 집전을 중지시키는 징계장을 부득이 보내야 했다.


3월 26일 : 망 예수 부활, 안드레아 신부가 예절을 거행하고 드망즈 신부가 엑술떼(Exultet)를 노래했다. 40명 가량의 영세자가 있었다. 저녁때 비가 왔다.」


(위 내용은 뮈텔 주교 일기 4권에서 인용)



1910년 3월 26일은 안중근이 사형을 당한 날이다. 뮈텔 주교의 3월 26일자 일기에는 안중근 사형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3월 28일자 뮈텔 주교일기에 안중근 사형에 대한 소감이 적혀있다. 「안 도마(안중근)의 사형이 26일에 집행되었다. 일본인들이 그 시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 극히 당연한 일이다」 


뮈텔 주교에게 안중근의 행위는 무엇이었는가? 안중근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운 한국의 은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암살자이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진술한 이토오에 대한 거사 이유(이토오의 15개 죄악)는 잘못된 것이므로 철회할 것으로 종용하였다. 안중근이 이토오의 15개 죄악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신부를 안중근에게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은 이토오를 오해한 상태에서 이토오를 살해한 것이라 말한다. 일본의 검사들이 안중근에게 강요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일본 검사는 안중근에게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을사늑약을 맺었고, 안중근이 일본을 오해한 것임을 주장했다. 뮈텔 주교와 일본의 입장은 한결 같이 동일하였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친일파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는가?    

   


[필진정보]
신성국 :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파견사제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