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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 탄성만으로 드리는 자연찬가
  • 전순란
  • 등록 2015-10-22 15: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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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맑음


설악산 대청봉에 기어이 오를 야심찬 생각으로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 일기를 마무리해 올리고 4시 30분엔 아침을 먹고 5시에 택시로 오색까지 가서 대청봉까지 4시간을 걷고 저녁 6시까지는 비선대가지 내려오려니 하였다.





그런데 4시 반경 미루가 부스스한 얼굴로 방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이사야가 밤새 앓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면서 대청봉 등산은 무리고 그가 일어나면 다른 코스를 택하잔다. 등산대장이 아프다니 별수 없이 포기하는 수밖에...


그래도 대장이 몸을 추슬러서 우리 넷은 7시 30분에 아침을 먹고서 8시에 콘도를 나섰다. 가까운 강릉의 전국체전 선수들인지 듬직한 젊은이들이 건물과 마당에 가득가득하다. 덩치는 크지만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초딩들도 우글거려 물었더니만 수학여행이란다. 나도 중딩 2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고 백바지에 줄무늬 세터를 입고서 뽐을 내던 기억도 난다.


오늘은 다행히 이사야가 생기를 보였다. 우리를 싣고 오색을 지나 한계령으로 오르다 ‘흘림골’이라는 데에 차를 세우고 ‘오색약수터’까지의 행군에 들어가잔다. ‘흘림골’ → ‘칠형제봉’ → ‘등선대’ → ‘촛대바위’ → ‘주전골’ → ‘용소삼거리’ → 그리고 ‘오색약수터’로 가는 6km 가량의 코스였다. 8월의 산사태로 막힌 등산로가 최근에 임시로, 그것도 일방통행으로 개방되어 있었는데 이것쯤이야 하고 출발한 길이 보통 가파른 험로가 아니었다.


칠형제봉을 오른편에 끼고 오르고 또 올라 등선대 정상에 이르니 설악의 한계령쪽의 기암고봉들이 한눈에 둘러서 우리를 맞아주고 절정을 맞은 단풍이 빨강, 노랑, 연미와 연두, 오렌지와 진홍으로 온 산에서 불타는 정열을 쏟아내고 있었다.



보스코의 공직생활 중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공연된 어느 칸타타에서 “아버지, 세상에 와 보니 과연 아름다웠습니다.”라는 대사가 십자가에서 단말마를 맞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굳이 천상병 시인이 아니더라도 “가서 아름답다고 말씀드리리라”는 감탄이 절로 났다.    



오늘 우리 그 등산로를 거의 줄지어가던 그 모든 행락객들 입에서, 그리고 우리 네 사람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아, 아, 아!”하는 탄성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보람을 충분히 느끼셨으리라. 하느님은 이 가을을 색칠하시느라 당신 물감이 동났고 인간들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느라 잘도 주절거리는 그 말이 동났으니까...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만드신 세상을 두고 “참 좋았다!”고 감탄하셨다지만...


콘도를 나설 즈음에는 대청봉에 대한 미련이 뱃속에서 스물거렸는데 등선대에서 만난 산악인이 “대청봉도 좋지만 여기만큼 아름다운 코스는 없다!”고 하는 말에 마음을 접었다. 등선대를 내려오면서부터 굽이를 돌 적마다 눈 앞에 새로 나타나는 바위산 기암절벽과 그 비탈에 걸린 소나무들과 오색으로 찬란한 단풍을 감상하면서 한 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꿈속을 거니는 몽롱한 기분에 취했다. 겨우 6km를 걸으며 7시간이 걸렸으니 오색에서 대청봉에 올라 비선대로 내려오는 코스를 갔더라면 오늘 중 하산하기는 틀렸을 게다.






오늘의 산행은 워밍업으로 삼고 내년엔 소청이나 중청에서 일박을 하고 기어이 대청봉을 오르겠다는 내 결심을 엿들은 미루가 산행길 절반에 이미 다리가 풀려버린 보스코를 열심히 꼬드긴다. “대사님, 대청봉은 뭔 대청봉이래요? 그냥 휴천재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서 지리산 영봉을 건너다보면서 향기로운 커피나 마시면서 단풍놀이를 하십시다요.” 보스코도 그게 좋겠단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단풍은 단풍이로다.”하며 게으른 선문답을 흉내내면서...


이 계곡에 둘러선 암봉들은 갖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색을 나와 속초로 가면서 낙산사 가까운 ‘조산초등학교’를 바라보며 보스코가 62, 63, 64년에 청춘의 꿈을 나누던 살레시안들과 매년 한 달 가까이 여름을 보내던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물치’의 회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어스름한 밤바다를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서 우리 넷은 콘도에 돌아와 지치고 풀린 다리를 쉬었다. “하느님, 참 아름다웠습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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