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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23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8-27 16:00:21
  • 수정 2016-03-23 16: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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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내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여러분을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여러분을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29당신의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당신의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시오. 30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당신의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시오. 31남이 여러분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 주시오. 32여러분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습니까?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합니다. 33여러분이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습니까? 죄인들도 그것은 합니다. 34여러분이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습니까?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줍니다. 35그러나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친절하시기 때문입니다. 36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  

37남을 심판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심판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단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38주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받을 것입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여러분 품에 담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여러분도 되받을 것입니다.” (루가복음 6,27-38)




   

27절에서 30절에 8번의 명령형 동사가 쓰여 졌다. 27-28절에 그룹에게, 29-30에는 개인에게 향하는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27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28절에 있는 ‘미워하는, 저주하는, 학대하는’ 세 동사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누가 나의 원수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기준은 그 셋이 되겠다. 나를 ‘미워하는, 저주하는, 학대하는’ 사람들이 곧 나의 원수다. 


예수는 나의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제안하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마태5,44 이하에도 나온다. 예수가 실제로 한 말 같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특징으로 예부터 여겨졌다. 다른 종교에 그런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친구에게 잘해주고 원수에게 막 대해도 좋다는 상식은 플라톤 이후 의문시되었다. 철학자 세네카는 신을 닮으려면 감사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잘 대하라고 권유하였다.(Si deos...imitaris, da et ingratis beneficia)  


29절 뺨 이야기는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비유다. 다른 뺨을 맡기는 행동은 가해자를 더 분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야 50,6) 다른 뺨을 맡기는 행동은 가해자나 세상인심에 호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 뜻에 따르기 위해 하는 것이다. 


31절 행동 원칙은 18세기부터 황금률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황금률은 다른 문화에도 이미 있었다. 여기와 마태오 7,12에 나온 황금률의 그리스도교적 특징은 개인 또는 이름 없는 타인뿐 아니라 악인과 죄인 그룹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나의 원수는 개인 뿐 아니라 집단 등 세력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성 원칙에 따라 자신의 처신을 결정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바라는 보편적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느님도 사람을 대할 때 상대성 원칙에 따라 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36절에서 krestos는 우리말 공동번역성서에서 ‘인자하시기’로 옮겨져 있지만, 나는 그 단어를 ‘친절하시기’로 고쳤다. 37절 oiktirmon(자비하신)과 인자하시기는 그 뜻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krestos(친절한)과 oiktirmon(자비로운)은 하느님의 특징 자체로 자주 소개되었다.(시편 68,17-; 111,5; 145,7)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11,45) 하느님이 친절하고 자비로우시니, 우리도 친절하고 자비로워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운가.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운가.


36절에서 루가는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했지만 마태오는 하느님의 완전함을 강조하였다. 자비로운 사람은 완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자비롭다. 그리스철학에 의하면 완전함은 오직 신에게만 해당되겠다. 그러나 자비롭게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완전함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그리스도교는 가르친다. 


원수사랑이 유다교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잠언 25,21) 그러나 일반적인 계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로마 12,20-21)이 루가의 오늘 단락에 가까운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비판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적개심에 기초한 저항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저항을 하라는 말이다. 원수인지 아닌지 잘 분별하라는 뜻이  포함되었다. 나의 잘못된 판단 기준에 의해 이웃을 함부로 원수로 규정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내 판단 자체를 의심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사랑에서 시작된 저항이라는 아름다운 사례를 예수와 로메로 대주교가 보여 주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은 그들을 눈여겨보면 좋겠다. 사랑에 기초한 저항이 진짜 저항이다. 그 저항은 원수를 회개시킬 수도 있다. "의로운 사람은 자비롭고 후하게 베푼다." (시편 37,21) 의로운 사람만 진실로 자비로울 수 있다. 정의감이 모자란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는 욕심은 지나치다. 정의 없이 자비 없다. 


사랑도 없고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은 원수 사랑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태도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착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 없는 저항은 위험하지만, 저항 없는 사랑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아름다운 말을 악의 세력이 얼마나 나쁘게 악용하여 왔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악인은 발음하거나 인용할 자격도 없다. 악인이 할 일은 그저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는 것이다. 교묘한 방법으로 악인의 편에 서서 야릇한 신학적 변명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천벌을 받는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원수를 사랑하기란 당연히 쉽지 않다. 원수가 없이 사는 것도 역시 어렵다. 어차피 생길 원수라면,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은 그런 시도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은 사람이 원수 사랑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내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아주 많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원수의 잘못된 언행을 인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원수에게 물리적 보복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는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하진 않았다. 예수는 비폭력 저항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28살 청년 체 게바라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이런 말을 반박할 자신이 없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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