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할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는 길이 깨끗하고, 성당의 미사가 제시간에 봉헌되고, 지하철이 제시간에 다가오고, 상점들이 분주하고, 자동차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고, 택배가 제시간에 도착하고, 화물들이 원하는 곳에 도착하고, 공적인 약속들이나 계획들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며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소금 같은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조문도 문상도 끝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오늘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49일입니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에 떠밀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꽃 같은 청춘들이 쓰러져 실려 나갔습니다. 참사도 큰일이었지만 이후 우리는 황당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위패도 영정도 없는 조문이 시작되었고, 대통령이 그 허공에 사흘이나 나가서 조문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2차 가해, 법적인 문제가 된다는 소리를 들었고, 언론은 연일 희생자들의 이름을 은폐하기에 바빴습니다.
애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문도 문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문(弔問)하다’의 “문”과 문상(問喪)의 “문”은 물을 “문”입니다. 죽음의 이유와 원인을 묻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고 가족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조문이고 문상입니다. 그런데 사십구재 즈음에 이르러 녹사평역에 간신히 영정과 위패를 모시며 비로소 조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은 말합니다. 희생자 가족들이 모이면 “세월호처럼 시민단체 횡령수단 가능성”(권성동)이 있다. “시체 팔이 족속들, 나라 구하다 죽었냐?”(김미나, 창원시의원), “이태원 참사 현장 300m 거리에도 시신이 있었다.”(송언석 국회의원), “다 큰 자식 놀러 가는 걸 못 말려놓고, 왜 정부 책임이냐?”(김성회, 전 대통령 비서관). 망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누가 유가족들의 입을 막고 있었는가요? 누가 희생자들의 가족들 만나는 것을 가로막았나요? 왜?” 유족들은 말했습니다. “저희 동의 없이 위패 없이 영정 없이 차려진 분향소가 저한테 2차 가해였습니다.” 정작 희생자들을 2차로 가해한 자들은 바로 윤정부의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었고 경찰청장이었고 마약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검찰이었습니다. 그리고 망발을 쏟아내는 그들의 더러운 입이었습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 말만 하면 윤정부는 ‘2차 가해’라 하며.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정작 희생자들 가족들이 서로 만나야 자조하고, 만나야 서로 위로하고, 말해야 서로 공감하며 스스로 공생의 길을 찾아갔을텐데... 패륜은 바로 희생자 유가족들의 조문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윤석렬 정부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윤석렬 정부의 패륜이었습니다.
세상의 법은 만신창이가 되어
박은정(朴恩貞)은 대한민국의 검사입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소금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당시 검찰총장의 징계안을 작성했던 엄정한 감찰의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서울행정법원 합의12부는 지난 2021년 10월 14일, 윤석열 대통령 (전 검찰총장)에게 내려진 징계처분에 대해서 ‘면직’ 이상의 중대 비위에 해당하므로 징계처분이 정당했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당시 법원은 윤 전 총장 측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던 감찰 과정의 위법성 부분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6월 서울중앙지검도 윤 전 총장 감찰 관련, 보수 시민단체 등의 박은정 검사에 대한 고발사건에 대하여 혐의없음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불기소처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은정 검사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검찰은 박은정 검사를 탈탈 털며 재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윤 전 총장(현 대통령)의 징계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을 뒤집기 위한 보복 수사입니다. 지금 달라진 것은 징계대상자가 대통령이 된 것뿐입니다. 사실관계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승소한 1심 변호인을 윤석열 정부 법무부는 해촉했습니다. 박 검사는 지난해 8월 휴대폰을 압수당할 때 ‘비번을 풀어서’ 당당하게 수사에 협조했습니다. 한동훈 법무(法無) 장관처럼 비번을 풀지 않거나, 수사 검사와 몸싸움을 벌이며 일어난 해프닝을 ‘독직폭행’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비위를 숨기지도 않았고 당당하게 대한민국 검사로서, 부끄럼 없이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 굳이 비번을 숨길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뭐가 부족했는지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노부모가 거주하는 친정집까지 압수수색을 당하는 모욕적 행태들을 국민은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법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윤석렬은 말했습니다. “수사로 보복하는 것은 검사가 아니라 깡패일 것”이라고. 이렇게 법을 소금같이 운용하던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위협을 당하고 사라지면서 세상의 법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조국, 추미애 장관이 그랬습니다. 임은정, 박은정이 그랬습니다. 그들을 바른 자리에 놓아두지 않으면 다시 언제 어느 때 어디서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날지 우리는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윤석렬의 장모 최은순의 재판은 거꾸로입니다. 대법원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과 의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최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최씨에게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다른 피의자들은 이미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았음에도 대통령의 아내는 수사도 기소도 예외가 되었습니다.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도 알만한 얘기인데, 허위학력에, 허위스팩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주가조작으로 큰돈을 모아내는 불법 의혹이 가득한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수사가 면제된다는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법치국가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칼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박은정 검사는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9기로 사법연수원 수료 후 2000년 검사로 임관했습니다.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2년 2월, 18대 국회의원 나경원의 배우자이자 판사인 김재호로부터 기소 청탁을 받았었다는 양심선언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나경원은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이리저리 출세길이 열려있던 의원이었는데 그런 나의원 배우자의 문제를 세상 안에 던지며 당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의 국민적 요구가 증폭되었습니다. 이 양심선언은 국민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나라의 사법체계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의심, 회의와 성찰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16강의 기쁨을 뒤로하고 국민이 분노했던 이유는 바로 심판의 공정하지 못한 판정 때문이었습니다. 충분히 시간이 있었음에도 코너킥을 허용하지 않았던 심판과 브라질에 주어진 두 번째 페널티킥은 이리저리 보아도 판세를 뒤엎어 버리는 잘못된 판정이었습니다. 축구에서조차도 판정시비가 이렇게 큰 문제로 비화하는데, 하물며 나라의 운영과 심판의 업무를 가진 자들이 이렇게 뒤에서 ‘기소를 해라, 말아라’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박은정 검사는 2002년 춘천지검 원주지청에서 여성전담 업무를 시작한 후 형사부에서 10년간 성폭력 수사를 전담해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최다 처리 실적을 보유하고 있는 능력 있는 검사였습니다. 서울서부지검 성폭력전담검사로 근무하면서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조사부 개설 이전 검찰 최초로 성폭력범죄대응센터를 개설했고, 대검찰청 성폭력 TF 총괄팀장을 맡아 검찰의 성폭력·가정폭력 관련 수사지침과 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조사지침, 성폭력 수사지침을 통합해 ‘성폭력 사건 처리 및 피해자 보호·지원에 관한 지침’을 제정하고 검찰 최초로 ‘가정폭력사건 처리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성폭력 분야 공인전문검사로 인증받아 스웨덴, 노르웨이로 아동 성폭력 피해자 보호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국외 연수 기회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박은정 검사는 윤정부가 폐지하려는 여성가족부의 장관이 되면 딱 알맞을 그런 소금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윤정부의 쓸모없는 정치검찰들은 이러한 박은정 검사를 잡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래서 박은정 검사는 칼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더 강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검객, 그의 칼은 약자들을 위한 칼이었습니다.
언론과 국민의 힘 의원들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2020년 1월 법무부 감찰담당관에 임명된 박은정 검사를 친정권 정치검사로 분류했습니다. 박은정 감찰담당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감찰의 실무자로서 적극 감찰했습니다. 윤석렬은 △주요 사건 재판부 분석 문건(‘판사 사찰 문건’) 작성 및 배포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 △정치적 중립에 관한 부적절한 언행과 같은 세 가지 사안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권한을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검사로서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법무부 징계위는 윤석렬 당시 검찰총장을 정직 2개월 처분하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돌려 갈 수만 있다면, 여기서 만약 민주당과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일어나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지금의 촛불처럼 들고 일어나 징계위의 미약한 징계를 나무라고 면직 처분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낼 수 있었더라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입니다. 역사는 늘 지난 후에 돌아보면 ‘만약 그때 우리가 이렇게 했었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금같이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조국 장관이 그랬고, 추미애 장관이 그랬고, 한명숙 총리가 그랬고, 노무현 대통령, 박원순 시장, 노회찬 의원이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한동훈 같은 사람을 법을 관리하는 장관으로 만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은 사람이 죽은 뒤에 약을 짓는다는 뜻으로, “버스 지나간 뒤에 손을 든다”와 같은 말입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성어 망양보뢰(亡羊補牢)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친다’는 뜻입니다. 양을 이미 잃고 난 뒤에 우리를 고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마치구(失馬治廐: 말 잃고 마구간 고친다), 실우치구(失牛治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사전대비가 없으면 큰 화를 입게 마련입니다.
드럼통 1,500개의 대책
인천대교에서 한 주간에 3일 동안 연이어 세 명이 투신했습니다. 올해 2022년에만 40명이 넘게 투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갓길에 드럼통 1500개를 놓아 투신하지 못하게 한다는 게 인천 지방정부의 대책입니다. 이것이 드럼통 놓아서 해결될 일인가요? 지금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리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국가가 사라졌습니다. 정책은 실종되고 정쟁만 난무합니다. 말꼬투리를 잡고 싸움만 하는 국회와 의원들. 말은 ‘민생이다 국민이다’ 하지만 모두 제 잇속만 차리며 다음에 또 해먹을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안과 그들의 분노, 그들의 우울을 드럼통 1,500개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요? 국가정치가 주는 불안과 신자유주의 경제가 양산하는 패배자들, 약자들의 신음과 울부짖음을 국가가 보호해주고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어야 텐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고된 날들을 참아 지내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그냥 헌금도 모자라 2차 헌금, 건축헌금, 감사헌금을 무언중에 강요하며, ‘예수다 마리아다. 국론분열 하지 마라!’ 말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요? 과연 우리 종교의 책임은 없단 말인가요? 어떤 목사는 시가 89억 교회를 500억 보상받으며 자식에게 물려주고 ‘배 째라!’ 하는데 종교중독 신자들은 ‘아멘! 아멘!’ 하며 ‘할렐루야’ 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악은 어디에 있는가요? 어디서부터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가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나라가 바로 설 때까지, 추모는 계속될 것이고 끊임없이 물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길바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 시간 혼잡경비를 감당할 경찰 인력이 조용히 있었던 것인지, 깨어있는 시민들은 계속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텅 비어있던 광장을, 텅 비어버린 성전을, 불타오르던 예수성심을, 아합과 이자벨이 성소에 들어 주술과 무속으로 성전을 더럽혀도 우리는 오히려 제단의 정의로운 사제의 목을 날렸습니다. 그들 주술과 도술 무속에 휩싸여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거룩한 몸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하며 맡겼으나, 참사의 원인을 은폐하는 권력을 향한 풍자, 만평 하나를 올렸다고 불온한 정의를 말한다며 참말 하는 사제의 성체를 빼앗아간 교회의 권력은 회개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소리 높였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의롭고 거룩한 사제는 성전에서 쫓겨났고, 바알과 우상을 섬기던 이들은 따뜻한 명동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그들이, 아니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무엇이 참된 길인가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가요? 알량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교회 정신은 하느님의 정신과 뜻을 넘어서는가요?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어찌 말하는 이들이 이리 불손한가요. 세상은 점점 더 미쳐가고 있습니다.
이제 깨어있는 시민들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 물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들의 촛불을 가로챈 이들이 누군가? 그리고 왜 이리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가? 무엇을 개선하고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물어야 합니다. 대의민주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외형적 성장과 치장을 했지만, 정보혁명, 디지털 혁명 시대는 더이상 권위적인 텍스트, 일방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디지털의 핵심은 쌍방향소통, ‘하이퍼텍스트’ 입니다. 그것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입니다. 정치의 효능감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기성종교가 무너져 내리면서 사람들은 영성의 길을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중개하는 종교. 사찰. 교회. 성당이 대의(代議) 하거나, 중개의 기능,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사원을 떠나 길 위로 뛰어나왔고 제대의 촛불은 거리의 촛불로 빛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길 위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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