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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list.php?mcode=msub1</link>
		<description><![CDATA[가톨릭정보, 사회문화 소식, 영상뉴스 등을 제공하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가톨릭프레스]]></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Mon, 27 Apr 2026 18:27:0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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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톨릭프레스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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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소의 뿌리는 가정과 삶의 태도에 있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umVXHt79_222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70"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부활 제4주일 (2026.04.26) 성소주일&nbsp;: 사도 2,14-41; 1베드 2,20-25; 요한 10,1-10&nbsp;<br><br>1. 전례의 취지<br>부활 제4주일인 오늘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성소라고 하는데, 성소 주일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함께 이 부르심에 대해 드려야 할 우리의 응답에 대해 생각해 보는 특별한 날입니다.&nbsp;<br>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매년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했습니다. 사실 성소는 믿음을 받아들인 모든 신자들에게 열려 있는 은총이지만, 특별히 하느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봉헌할 일꾼들인 사제, 수도자, 선교사의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일깨우는 날이 오늘, 성소 주일입니다.<br>하느님 나라의 일꾼들, 즉 사제와 수도자와 선교사를 부르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수확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이 장차 사제, 수도자, 선교사로 받을 부르심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리와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혼인 성소를 통해 성화시켜야 할 가정이요,&nbsp; 그 기회가 직업 성소를 통해 세상에 나가서 봉사하는 신자들의 모범입니다.&nbsp;<br>성화된 가정, 적어도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는 자녀라야 일꾼을 바라는 꿈을 꿀 수 있고 그런 꿈을 지닌 자녀라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 듣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어린이들이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nbsp;<br>또한 세상에 봉사하는 직업을 통해 신앙을 증거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란 자녀라야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꿈을 꿀 수 있고 그런 꿈을 간직한 자녀라야 장성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와 탐욕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 대한 봉사의 직무로 직업을 성화시키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 청소년들이 성소의 싹을 키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가 사제 성소는 물론 수도자 성소와 선교사 성소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br>2. 말씀의 흐름<br>전례의 취지를 말씀드린 데 이어 오늘 미사의 복음과 독서에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도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은 요한 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이고, 제1독서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오순절에 유다인 군중에게 행한 설교이며, 제2독서는 베드로 사도가 교우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부활 시기에는 요한 복음과 사도행전을 집중적으로 봉독하는데, 그 이유는 특별하고도 중요합니다. 공생활 동안에는 그 신원이 가려져 있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분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사가들이 기록한 복음서의 메시지입니다.&nbsp;<br>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달랐습니다. 아예 복음서의 처음부터 예수님의 참모습을 전제하고 공생활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한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존재로 소개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곱 가지 표징 사건으로 복음서를 구성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증언되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부활하시는 분이기 이전에 이미 부활한 경지에서 존재하고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등장하고 또 활약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남기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인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일곱 가지의 표징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다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br>이렇게 부활 시기에 선포되는 부활의 복음은 독서로 배치된 사도행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는 체험을 세 번이나 하게 된 제자들이 사도로 변화되어 교회를 세우는 장엄한 과정을 증언하는 ‘교회의 복음서’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굼뜨거나 허약한 처지를 벗어나서, 담대한 믿음으로 용감하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목숨을 걸고 증언하고 다녔습니다. 발현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그토록 강렬했던 것입니다.&nbsp;<br>그랬더니 그들과 성령으로 함께 하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입과 손을 통해서 기적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 불구자가 일어나 걷고 뛸 수 있었던 기적이나 이미 죽은 사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적도 사실은 사도로 변화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했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br>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초대교회 신자들도 변화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를 지켜본 사도들도 이것이 예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줄을 깨닫고, 용기 백배하여 사방에 나가 ‘예수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변의 유다인들이 경탄하며 믿음을 청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신자들의 수효가 날로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과 유다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날로 커 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되어간 과정만이 아니라 변화된 사도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일반 신자들까지도 변화되어간 과정까지 증언하는 교회의 복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nbsp;<br>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 성소를 위해서도 신자들의 가정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이 여기서 비롯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하고 밝히신 뜻입니다. 제자들도 이 ‘양 들의 문’을 통하여 들어갔기에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고, 변화된 사도들을 통해서 신자들도 이 ‘양 들의 문’을 통해 들어갔기에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의 문’이라고 밝히신 예수님의 계시에 따라서 우리네 가정과 직업이 그분 삶을 통해서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일, 이것이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 선교사 성소를 계발하고 키우는 일의 시작입니다.<br>3. 성령의 이끄심<br>부활 시기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마칩니다. 부활하신 경지에서 가르치고 증언하시며 일곱 가지 표징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서를 통해 들은 교회가,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되고 또 변화된 사도들에 의해서 신자들이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나설 수 있을 만큼 변화될 수 있었던 기운은 성령의 이끄심 덕분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전례상으로 50일 동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사십 주야 동안 받으신 후,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 사명을 선포하실 때에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신 데에서 기원합니다.&nbsp;<br>“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nbsp;<br>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끄시는 성령에 따라서 부활의 경지에 오르신 것이었으며, 당신의 제자들도 같은 경로를 따라서 사도들이 될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제자의 처지에서 변화된 사도들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기적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끄셨고, 또 이를 목격한 초대교회의 신자들 역시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는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는 복음 선포의 길로 이끄셨던 것입니다.<br>사제와 수도자, 선교사가 성소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응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도 성령의 이끄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로 성화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을 통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의 이끄심에 끌리게 됩니다. 기도에 맛들이고 봉사의 보람을 알게 되면, 사제나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로서 살아가고 싶은 거룩한 열망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이나, 일생을 바쳐 성소에 응답한 이들의 한결같은 비결은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 성소의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성령의 이끄심과 도우심 덕분에 기도하면서 힘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nbsp;<br>성령께서 이끄시고 도우시는 값진 열매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사랑인데, 이것이야말로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보증입니다. 이는 “나는 양들의 문”이라고 계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처럼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고 당부하시고는, 제자들과 모든 믿는 이들에게 밝히신 최후의 심판의 척도를 밝히신 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마태 25,40) 그 척도가 바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래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는 예수님 말씀이 실현됩니다.<br>오늘날 성소자가 감소하는 바람에 성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성 소 감소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면 성소 위기에 대한 진단부터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작 성소의 위기는 사제직과 수도생활 그리고 선교사 지망자가 줄어드는 결과적 현상이 아니라, 기존의 성소자들인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선교사들이 이 열매와 척도를 뚜렷하게 증거하지 못하는 원인적 현상에서부터 옵니다. 성소의 위기를 가정마다 한 자녀만 낳는 풍조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예수님도 나자렛 성가정에서는 하나 뿐인 외아들이셨습니다. 또 자녀들이 많은 신자 가정이라고 해서 성소자가 꼭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nbsp;<br>부모의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양들의 문’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 예수님의 당부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는 계기는 바로 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 선포입니다. 죄악에 물든 세상의 현실에 실망하게 되는 체험도 이 계기와 더불어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에 허무함과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nbsp;<br>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예수님의 매력에 빠지며 교회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섭리로 서서히 끌려가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고요히 마음을 들여다 보며 기도에 맛들여가는 때도 이때요, 경건하게 거행되는 미사에서 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는 때도 이때입니다. 그야말로 오늘 미사의 화답송 후렴에서 기도한 바와 같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신학교와 수도원, 선교회 등에서 진행되는 성소 주일 행사는 바로 이때를 맞이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을 맞이하는 성령의 이끄심이 됩니다.<br>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3천 명도 넘는 유다인 군중 앞에서 행한 설교가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하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도 성소 주일 행사의 미사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성소를 느끼게 된 이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죄란 바로 사랑하지 못한 죄입니다. 사랑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한 죄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지 못한 죄입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정도를 넘어서 이 근본적인 회개를 해야 할 깨달음을 느끼게 해 주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입니다.<br>교우 여러분! 성소의 바탕은 부모의 혼인 성소와 직업 성소에서 마련되고, 그 계기는 기존 성소자들이 증거하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에서 마련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06:10:0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quot;</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TX8xZB1v_042626_EBB680ED999C_ECA09C4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8"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yfEw0sFa_5BEABEB8EBAFB8EAB8B05D042626_EBB680ED999C_ECA09C4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9"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14ㄱ.36-41)<br>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br>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br>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br>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2,20ㄴ-25)<br>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nbsp;<br>“그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nbsp;<br>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nbsp;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br>복음 (요한 10,1-10)<br>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nbsp;<br>“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br>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br>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br>“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24 Apr 2026 11:14:19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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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종교의 위기, 신자 감소가 아니라 ‘의미 없음’이 문제</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4</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lxuyEU8R_ECA285EAB590EC9D98_EC82ACED9A8CECA081_EC9881ED96A5EBA0A5.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5" style="clear:none;float:none;" /><br><br>한국 사회에서 종교를 둘러싼 변화는 이제 단순한 신자 수의 증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느냐가 아니라,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삶 속에서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br>이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에 따르면, 지난 40여 년간 종교의 사회적 위상은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변화는 단순한 감소가 아니라, 종교와 사회의 관계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br>확장되지 않는 종교, 멈춰 선 영향력<br>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인식은 뚜렷하게 변했다.<br>1980년대 약 70%가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2025년에는 이 응답이 24%로 줄었다. 반면 “과거와 비슷하다”는 응답은 53%로 절반을 넘었고, “감소하고 있다”는 응답도 23%에 이르렀다.<br>종교는 더 이상 사회를 이끄는 중심 동력이 아니라, 확장도 축소도 아닌 ‘정체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이해됐다면, 지금은 그 영향력이 점점 일상과 분리된 채 머무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br>특히 주목할 점은 종교인(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비종교인의 인식 격차다. <br>종교인은 여전히 종교의 사회적 기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개신교인 80%, 천주교인 70%, 불교인 61%가 종교가 사회에 도움을 준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게 종교는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체계로 작동하고 있다.<br>반면, 비종교인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비종교인의 68%는 종교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는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종교를 사회적 갈등을 낳거나 시대와 어긋난 제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br>믿음은 약해졌지만 ‘초월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다<br>초자연적 개념에 대한 인식은 또 다른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br>‘기적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57%로 과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천국·극락(44%), 사후 영혼(43%), 절대자·신(41%) 등 전통적인 종교 교리와 연결된 개념들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다.<br>이는 사람들이 종교의 교리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월적 세계나 설명할 수 없는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 상태임을 보여준다.<br>특히 ‘기적’에 대한 높은 응답은, 그것이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이라는 일상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결국 이 같은 특징은 교리는 약화되었지만, 초월에 대한 감각은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PxeObL7K_EBAA85ECA088ECB0A8EBA180EBB0A9EC8B9D.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6" style="clear:none;float:none;" /><br>명절 차례 문화의 변화 역시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br>유교식 차례를 지낸다는 응답은 53%로 줄었고,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은 35%까지 증가했다. 특히,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은 1992~2014년 10% 내외 였다가 팬데믹 시기인 2021년에는 32%로 급증했는데 이후에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은것이다. <br>차례는 특정 종교라기보다 가족 공동체가 유지해온 생활 속 의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례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특정 신념을 따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실천 자체를 지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br>종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br>이번 조사 결과 종교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서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에서는 영향력이 정체되고, 개인에게는 중요성이 낮아지며, 비종교인에게는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br>특히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종교를 비판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br>▶ 이전기사 보러가기<br><br><br>]]></description>
			<author>임신비</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21:04: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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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닿았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OyRFsrmZ_2222.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3"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제공 = 이기우) </acronym><br><br>부활 제2주간 토요일 (2024.04.13)&nbsp;: 사도 6,1-7; 요한 6,16-21<br>초대교회에서 사도들과 신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채울 사도를 선출하는 일이었습니다. 마티아가 뽑힌 이 보궐선거 다음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두 번째로 한 선거가 부제 직무를 신설하고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사도들이 안수한 일이었습니다.&nbsp;<br>오늘날 부제 직무는 과도기 부제직이든 종신 부제직이든 사제직을 준비하거나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달랐습니다. 모두 백스무 명이나 되는 사도 및 신자들이 장엄하게 성령을 받고 뜨거운 은총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켰고, 이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신 기적들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nbsp;<br>아파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치유의 기적을, 소외되고 차별받아 마귀들린 가난한 이들에게는 구마의 기적을 일으켰던 예수님의 공생활이 사도들에 의해서 고스란히 재현되기에 이르자, 이를 지켜본 신자들은 뜨거운 은총으로 감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당부하신 대로,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며 서로 서로 발을 씻겨주는 심정으로 가진 것을 나누고 특히 궁핍한 이들을 돌보았습니다.&nbsp;<br>그랬는데도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내부의 불평등이 생겨났습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새로 신자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주류였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게 닥친 첫 시련이요 갈등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 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br>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사도들은 기도와 전례 거행 그리고 복음 선포 등 순수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고, 신설된 부제 직무는 식탁 봉사 즉 공동체 내부의 복지와 경영 등 경제적인 직무를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 내 약자들에 대한 복지적 배려와 교회 외부의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공동체 경영의 직무가 생겨난 것입니다.&nbsp;<br>그런데 스테파노가 교회의 첫 순교자로서 치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부제 스테파노는 단순히 내부 복지와 외부 나눔이라는 경영 직무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종교적인 직무에 전념하겠다던 사도들은 자신들을 극도로 경계하던(사도 5,33) 유다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새로운 신흥 유다교 종파로 보일 정도로 신중하고 조신하게 처신했고(사도 3,1) 박해 받을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갈등을 일으킬 만한 충돌 요인을 죄다 피해갔습니다.&nbsp;<br>그러자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사도 6,8) 이에 반대하는 유다인들, 이른바 해방민들과 케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기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치열한 논쟁을 벌일 지경이 되었습니다.(사도 6,9) 그러나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고(사도 6,10), 급기야 사람들을 선동하여 최고 의회에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발해 버렸습니다.(사도 6,12-14)&nbsp;<br>사도행전 7장은 이 최고 의회 법정에서 스테파노 부제가 행한 긴 연설을 장중하게 들려줍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즉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설교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깊이 들여다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기성 사도들과는 물론이고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던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용감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스테파노의 결기어린 모습은 최고 의회 의원들을 포함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재판이나 선고도 없이 돌로 쳐서 죽이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습니다.&nbsp;<br>애초에 초대교회 내부의 더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라고 신설된 부제 직무에 선출되었지만, 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도단의 소극적인 처신으로 말미암아 기성 유다교단과의 마찰이나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던 스테파노는 교회 역사상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사도 7,60) 부활 시기 동안 요한 복음과 특히 사도행전의 선포를 하는 교회의 전례적 취지를 길잡이로 삼아온 맥락에서 보자면, 스테파노가 맡은 부제 직무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한 책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사아 사명의 최우선적 사명으로 삼으셨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족례나 성찬례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nbsp;<br>오늘 복음의 상황은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 억지로라도 당신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쫓아오던 군중을 피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겪으신 일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이 바람은 북쪽 헤르몬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과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치는 맞바람이었습니다(마르 6,45-52). 새벽이 되자 더욱 거세어진 바람에 밀려 배가 뒤집어질 지경이 되었고 높은 파도로 인해 넘쳐 들어온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마태 14,22-33).&nbsp;<br>예수님께서는 며칠째 군중을 가르치시느라고 시달리셨기 때문에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커다란 기적까지 일으키시고 난 후에는 이들로부터 벗어나서 홀로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중도 제자들도 다 돌려보내시고 헤르몬 산에 올라 하느님께 기도하시다가 문득 제자들이 처한 위험이 감지되셨나 봅니다.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기도를 하다 보면 흔히 겪게 될 영적인 감지현상을 보여 주신 셈입니다. 이때 감지된 제자들이 겪고 있던 그 위험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타고 가실 배도 없었던 형편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느라고 물 위를 걸어가서 구해 주셨습니다.<br>&nbsp;생전 처음 보는 이 광경에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마태14,26),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태연히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이 배에 오르시자 그렇게 거세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마르 6,51). 기적 같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때는 맞바람 때문에 노를 젓기가 그렇게 힘들더니(마르 6,48), 그분이 함께 계시니까 노를 젓지 않았는데도, 배가 어느새 제자들이 가려던 곳에 슬그머니 가 닿았던 것입니다(요한 6,21).&nbsp;<br>거센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는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이 기적은, 이 자연현상으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도 가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려던 곳에 어느새 가 닿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빵이 늘어난 일이나 물 위를 걸은 기적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려진 이 기적 현상이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메시지이고, 이는 독서에서 부제 직무를 신설한 사도들의 행위와 맞물려서 교회 직무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제든 부제든 교회의 직무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점이고,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nbsp;<br>어제의 독서 말씀에서 들으셨다시피, 성령을 받은 후 사도들은 대외적으로는 박해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사제, 수석 사제들과 경비대장 등을 앞세운 유다 최고 의회로부터 툭하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매질도 당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 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요구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고 버티기도 하고,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하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nbsp;<br>그러자 이에 격분한 대사제로부터 공연히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도들은 억울해 하기는커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습니다(사도 5,41). 그런 와중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군중 앞에서 태생 불구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사도 3,8.12), 이 기적을 목격한 군중과 소문을 들은 이들을 합해 무려 오천 명 이상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며(사도 4,4), 몹시 분주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nbsp;<br>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부제 직무를 신설한&nbsp; 이 조치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면제하게 된 결정과 더불어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공동으로 합의한 첫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소집했던 역대 공의회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내린 이 결정은 또한,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예수 추종의 직무’에 있어서 사도들이 수행하던 사제직으로부터 예언자직과 왕직을 분리해 내려던 조치였습니다. 이리하여 부제들 중의 한 명으로 선출된 스테파노의 예로 미루어 보면, 당시 부제 직무는 말씀도 선포하고 식량 배급도 담당한 것으로 보아 그렇습니다(사도 6,8-15). 예언자직과 왕직까지도 수행했던 스테파노의 부제 직무를 보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서라면 기성 유다교단의 종교적 권위와의 긴장이나 충돌도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nbsp;<br>교우 여러분!<br>말씀을 선포하는 직무는 물론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직무에 있어서 간직해야 하는 자세는 예수 추종과 성령 순종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 역사상 천8백년 만에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명제를 회복시킨 레오 13세와 비오 11세의 회칙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무는 주교와 신부 등 온 성직자와 온 신자들이 더불어 힘을 합쳐서 해내야 할 메시아 백성의 사명입니다. 과도기 부제직이나 종신 부제직을 넘어 주교와 사제 등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무 담당자들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던 이러한 은총을 청해 받는다면 우리가 탄 교회라는 배는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을 것입니다. ‘추종’과 ‘순종’으로 예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야말로 교회와 복음화를 위해 무척 소중하고 바람직한 직무영성입니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15:2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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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사·기소 분리 검찰개혁이 놓친 문제와 해법</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EftMUs4q_chhh_20260104_1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4"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MBC)</acronym><br><br>검찰개혁의 상징이었던 검찰청법 폐지법안과 함께 공소청 신설법안과 중대범죄수사처 신설법안이 드디어 지난 3월 25일 국회를 통과했다.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며 국가와 사회에 군림해온 무소불위 검찰청이 공소청과 중수처로 완전히 쪼개져서 곧 박물관으로 사라질 것이 국민의 이름으로 확정된 셈이다. 수사와 기소가 조직적으로 분리된 형사사법의 새 길이 날지는 막판까지도 안개 속이었다. 정부안 성안 과정과 당정청 협의 과정이 모두 순탄치 않고 파열음이 끊이지 않았다.&nbsp;<br>기대를 모았던 두 차례의 정부안은 개탄스럽게도 누가 봐도 검찰기득권 수호법안이었다. 촛불시민들이 경악과 분노로 부글부글 끓었고 그나마 국회법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줬다. 드디어 지난 3월 16일 밤 이재명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민심을 수용했다. 대통령의 결단으로 특사경 수사지휘권 박탈을 포함한 ‘검수완박’이 관철되고 검찰개혁이 비로소 모양을 갖췄다. 그러나 검찰개혁은 수사-기소 분리로 끝날 일이 아니다.<br>한국 사회에서 검찰개혁은 지난 수년간 가장 뜨거운 정치적 화두였으나 그 담론과 실천의 폭은 갈수록 왜소해졌다. 본래 검찰개혁의 본령은 견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해체, 재편해서 형사사법 절차에서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데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검찰 제도의 법적 틀 전반을 손보는 것이 검찰개혁이 해야 할 일이다. 애당초 검찰개혁 논의는 정치검찰의 통제와 해체에 초점을 맞춰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수사·기소 분리’ 혹은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프레임으로 옮겨갔다. 정치검찰 해체를 포함한 핵심 개혁 의제들이 슬그머니 시야와 논의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검찰개혁 담론의 빈곤화와 파편화는 정치권의 편의주의와 검찰의 생존전략, 학계의 직무 유기와 언론의 무관심이 맞물린 결과로 개혁의 실천적 한계를 필연적으로 설정하고 말았다.<br>검찰개혁 담론이 놓친 첫 번째 본질적 의제는 대통령의 검사인사권 독점 문제다. 대한민국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늘 도마 위에 오르는 근본 원인은 대통령이 2300여 명에 달하는 모든 검사의 임용과 승진, 보직 경로를 100% 장악하고 있는 비정상적 인사구조에 있다. 실은 이것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핵심 권한의 하나다. 민정수석실의 관여를 통해서 대통령 1인의 의중이 검찰 조직 전체의 목줄을 쥐는 결과를 낳으며, 검사들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해바라기성 줄 세우기’ 문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인사권이라는 뿌리가 대통령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 수사권을 박탈하고 기소권만 남겨두더라도 기소권의 정치적 오남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통령의 검사인사권 문제는 야당일 때는 줄기차게 외치다가 여당이 되면 쏙 들어가는 대표적인 내로남불의 하나다.<br>실은 대통령이 검찰총장과 검사장급만 인사권으로 장악해도 나머지 검사들은 ‘검사동일체 원칙’이라는 위계 구조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다. 검사의 독립관청성과 양립하기 어려운 강한 검사동일체 원칙은 검사에게 양심적, 전문적 판단에 의한 직무면제요구권이나 법정 내 자유 발언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더 완화하여야 맞다. 그러나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 인사권이 존재하는 한 그 실효성은 낮을 것이다. 독일이 연방검찰총장 임명 시 주정부 대표로 구성된 연방참의원의 동의를 구하고, 헝가리가 검찰총장 임명에 의회의 2/3 이상 동의, 즉 야당의 동의를 구하게 한 입법례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독립적 헌법기관인 ‘최고사법평의회’에 검사인사권을 맡기고 행정부의 개입을 차단하는 입법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br>두 번째로 외면당한 과제는 ‘법무부의 검찰화’와 그로 인한 문민 통제의 상실이다. 본래 법무부는 검찰을 감독하고 견제하는 문민 통제의 본산이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 차관과 검찰국장 등 요직을 현직 검사들이 독점해 왔다. 이는 감독기관을 피감독기관의 구성원이 장악하는 기형적 구조이다. 결과적으로 법무부가 검찰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법무부를 통해 조직 이익을 관철하는 ‘역전 현상’이 초래됐다. 법무부의 인적 구성을 변호사나 법학교수 등 검사를 대체할 법전문가들로 탈검찰화해서 법무부를 실질적인 검찰 통제기관으로 세우는 작업 없이는 검찰은 사실상 대통령의 직할 부대로 남을 뿐이다.<br>세 번째는 검찰의 기소 독점권을 견제할 시민적 통제 장치인 ‘기소배심제’의 부재다. 수사권이 분리되어도 검찰이 기소 여부와 기소 혐의, 기소 시점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한, 검찰은 여전히 보완수사요구권을 통해 특정 표적을 향한 ‘먼지털이식’ 압박을 가하거나 정권 실세를 보호하는 권한을 여전히 유지한다. 현재의 수사기소심의위원회처럼 검찰총장이 위촉한 전문가들이 권고 의견만 내는 방식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무죄 주장 사건, 표현의 자유 침해 사건, 대기업의 ESG(환경, 인권, 지배구조) 책임 위반사건, 정무직과 판검사의 독직비리 사건 등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안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기소배심제를 필수적으로 도입해야 한다.<br>네 번째로, 개혁 담론에서 유독 소외되었던 지점은 행정부 소속 특별사법경찰(특사경)에 대한 수사지휘권 문제다. 특사경은 민생현장과 기업활동에 관한 각종 규제 입법과 기업 형법을 다루는 전문분야 경찰을 의미한다. 전국적으로 2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지난 2021년의 수사권조정 국면에서도, 이번 검찰개혁 국면에서도 검찰의 특사경 수사지휘권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세, 금융, 노동, 환경, 해양, 식품, 약품, 건축 등 전문 분야를 다루는 특사경은 검찰에게 권력과 네트워크, 이권을 보장하는 황금거위였다. 이번에 이재명 대통령의 막판 지시로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삭제된 것은 전관 비리를 포함한 검찰 비리의 거대한 황금어장을 걷어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성과다. 다만 특사경이 실질적 수사 주체가 되고 검찰은 법률검토와 자문에 집중하는 정교한 협력 시스템 설계와 특사경의 전문 수사역량 강화 방안 마련이라는 과업이 남아있다.&nbsp;<br>다섯 번째는 헌법에 박힌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문제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에 삽입된 이 규정은 사전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없던 시절에 피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검찰의 경찰수사 지휘권을 전제로 만들어진 헌법적 대못이다. 이미 사전 영장실질심사제와 사후 구속적부심제가 확립된 지금의 사법체계에서, 더욱이 검찰이 수사(지휘)권을 내려놓을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영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항에 대해 판사가 최종 결정하기 전에 검사의 검토까지 이중 통제를 받게 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개헌을 통해 영장청구의 주체를 법률로 정하도록 유연화함으로써 검사는 본연의 기소 및 공소 유지 기능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br>여섯 번째 과제는 검찰 권력의 사유화를 막기 위한 전관 비리의 근절이다. 전관 비리의 몸통은 판사보다 검사다. 지금까지 수사와 기소, 형 집행의 모든 단계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특히 퇴직 검사들이 재직 시 쌓은 공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수사와 기소 축소 은폐, 형벌 감경과 가석방 편의 등으로 막대한 수임료를 챙기는 행태는 사법 정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범죄행위다. 전관 비리 근절이라는 공익은 일부 퇴직 검사의 직업의 자유보다 훨씬 중대하다. 누가 보더라도 공직 경험의 사유화와 영리화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상당 기간의 변호사 개업 금지나 관련 기업 취업 금지 등 현행보다 훨씬 강력한 수준의 규율이 도입되어야 한다. 잘못된 동료의식의 발로와 퇴직보험 용도로 법과 정의를 비틀고 국민 불신과 조롱을 자초하는 전관 비리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유산인지 현직 판검사들과 온 국민이 총궐기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br>마지막으로 이러한 본질적 개혁 의제들이 그동안 왜 정치권과 언론, 학계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는지를 짚어봐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치검찰 해체가 검찰개혁의 첫 번째 목표였는데도 정치검찰을 낳는 대통령의 인사 전권 문제는 논의 밖이었다. 검찰총장 추진위 구성의 중립화 방안이나 검사장 주민직선제 등 개혁 입법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당은 대통령 권한이라 입을 다물었고, 야당은 지리멸렬해서 생각 자체가 없었다. 권력에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책임을 지닌 언론과 복잡다단한 진실을 해명해야 할 책임을 지닌 관련학계도 제 역할을 방기했다. 반면 ‘수사권 박탈’이라는 선명한 구호는 시민 설득과 지지층 결집에 유리해서 정치 가성비가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은 수사-기소 분리의 문제점을 과장하고 수사-기소 분리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만 하면 됐다. 외부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그리로 유도하며 인사제도 논의나 시민 통제 논의, 특사경 논의를 성공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br>위에서 보았듯이 검찰은 사법부에 맞춰 대검, 고검, 지검으로 나눈 무시무시한 검찰청 조직을 가진 것으로 성에 안 차 3만 5000 수사경찰은 물론이고 2만여 특별사법경찰(특사경)을 종 부리듯 부렸으며 법무부를 장악했다. 특히 특사경 수사지휘권을 통해 특사경을 운용 중인 대부분 행정조직(국세청, 노동청, 환경청, 식약청, 산림청, 해양청 등 외청, 시청, 도청 등 각 지자체)에 막강한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떤 집단도 갖지 못한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온갖 규제당국 및 피규제 기업들과 구축했다. 이것이 검찰의 권한 남용 공간이자 뇌물과 향응 등 독직비리 창구로 작동했다.&nbsp;<br>검찰은 검사동일체의 강고한 위계질서 아래 무제한적 수사(지휘)권과 헌법상의 영장청구권, 독점적이고 편의적인 기소권한을 행사하며 국가 내부의 국가로서 거대한 특권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검찰은 법무부의 외청을 훌쩍 뛰어넘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에 비견할 만한 ‘검찰부’의 위상과 권력을 향유했다. 오직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척하며, 국가권력의 꼭대기에서 정치권, 관계, 재계, 언론계 등 국가와 사회의 중요부문 위에 군림해 온 것이다.<br>이렇게 볼 때 지금의 수사-기소 분리로 검찰개혁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몽과 환상에 가깝다. 간신히 가장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검찰개혁의 목표는 검찰의 견제 없는 집중 권력을 해체하여 민주적 통제시스템 속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어야 한다. 법무부, 의회, 법원, 시민, 언론이 각기 다른 층위에서 검찰권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촘촘한 그물망을 완성할 때, 비로소 검찰개혁은 마무리된다. 이제는 검찰 수사권 논란에서 벗어나 우리가 놓쳤던 좀 더 본질적인 개혁 과제들을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래야만 수사-기소 분리 개혁이 뿌리내리고 기대효과를 낼 수 있다. 그래야 세계에 유례없이 견제 없는 집중 권력을 누렸던 한국의 정치검찰을 민주사회의 인권검찰로 정상화하고, 진정한 법치주의의 기틀을 세울 수 있다.<br>윤석열의 망나니 검찰정권을 3년이나 경험하고 나서도 검찰 권력이 정권의 주구로 전락하거나 마구 날뛰는 꼴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br><br>]]></description>
			<author>곽노현</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23:28: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quot;</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gZmkEatA_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0"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QqpWvJ2i_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B3B5EC9D8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1"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3695266591_wd1JcO52_5BEABEB8EBAFB8EAB8B05D041926_EBB680ED999C_ECA09C3ECA3BCEC9DBC-EBB3B5EC9D8C-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62"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19일 주일 (부활 제3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14.22ㄴ-33)<br>오순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br>“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br>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br>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br>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1,17-21)<br>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br>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br>복음 (루카 24,13-35)<br>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br>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br>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br>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br>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br>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22:43: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8</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8pjHRqvw_Gemini_Generated_Image_hsgvrbhsgvrbhsgv.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5"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2026.4.11): 사도 4,13-21; 마르 16,9-15<br>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쁨을 노래하고 축하하는 팔일 축제 기간 동안 네 복음서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는 장면이 주로 소개되었고, 사도행전의 독서에서는 발현 체험을 한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이 주로 소개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이미 가르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확신시켜 주셨고, 이 확신을 얻어 사도가 된 제자들은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nbsp; 하느님 나라와 예수 부활에 관한 이 복음은 네 복음서 전체에서 소개된 발현 기사와 사도행전에서 집중적으로 보도된 사도들의 행적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br>오늘 복음에서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차례로 나타나신 일들을 간추려 보도합니다. 발현을 목격한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처음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알아보고 나서는 죽으셨던 분이 부활하셨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놀라고 나서야 비로소 기뻐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후에 비로소 자신들도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으로 기운을 얻게 되고, 그 기운으로 자신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거룩하고도 놀라운 변화를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nbsp;<br>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스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삼 년 동안 배웠던 바를 상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었고, 이것이 참된 진리임을 확신하게 된 계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이었기에 사도가 된 제자들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nbsp;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르침이었고, 부활의 복음은 이 새 세상을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nbsp;<br>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인간에 관한 이 복음은 겁이 많고 믿음이 약했던 어부 출신 제자들을 담대한 용기와 믿음을 지닌 사도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불구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 능력마저 갖추게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당돌한 저항자들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기적의 증거가 살아 있는 데다가 이를 찬탄해 마지않는 군중 앞에서 감히 어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도들은 당당하게 이렇게 반박하고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br>이렇게 해서 예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이 사도들로 놀랍게도 변화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 즉 발현체험에 입각한 신앙 증거의 행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nbsp; 이런 놀라운 과정과 기적적인 시작이 사도들과 교회가 체험할 수 있었던 부활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확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부활의 은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br>오묘한 섭리로 이 땅에 들어온 한국 천주교회 역시 새 세상과 새 인간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선 지배층이 주자학을 국교처럼 신봉하던 탓에 참으로 부당하게도 오랫동안 억압받았던 민족의 종교심성을 각성 시켰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은밀하게 그러나 억누를 수 없이, 이제야 우리 겨레가 민족사의 초창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디어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오래된 종교적 희망을 다시 불러 일으켰습니다.&nbsp;<br>또한 유학 고전에 대해 주자가 달아 놓은 해석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바람에 사상적 계엄령과도 같았던 사문난적(斯文亂賊)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도 중국 명왕조에서 서양 선비로 대우받았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가 저술해 놓은 천주실의 덕분이었습니다. 숱한 당쟁(黨爭)과 억울한 사화(史禍)의 위협에 숨죽여 살던 양반 선비들도 드디어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희망까지도 불러 일으켰습니다.&nbsp;<br>더욱이 양반 선비들에 비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 차별당하던 중인 신분 이하 상민들은 물론이고, 마치 사고 파는 짐승처럼 부림을 당하던 천민 출신들은 천주교 교리에서 하느님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복음을 듣고 감격해 마지 않았습니다.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존여비의 굴레에 매여 있던 여성들도 그 복음적 감격의 정도는 천민들에 비해 전혀 못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워진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사회적 희망이 강력하게 불타올랐습니다. 그리하여 탄압이 더욱 잔학해져 가던 19세기 중반 이후에 천민 출신과 여성들의 입교가 더 늘어났습니다. 박해 속에서 교세가 늘어났던 이 현상은 세계 선교 역사상 한국에서만 일어났던 기현상(奇現象)입니다.&nbsp;<br>이러한 점이 보편 초대교회의 현실과 정확하게 상통하는 한국 초대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를 아주 대표적으로 증거한 인물이 황일광 시몬(1757~1802)입니다. 그는 천민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명랑한 성격을 타고 났습니다. 그는 1792년 무렵 홍산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권일신의 제자 이존창이 천주교 교리에 해박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배운 후 교우촌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내가 천한 신분임에도 양반 교우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더 있음이 분명하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의 천당이란 교우촌이었습니다.&nbsp;<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rTLcDg9S_e9629798-2c86-4d98-ac27-b7926713c32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6" style="clear:none;float:none;" /><br><br>1800년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여러 교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특히 ‘주교요지’를 짓고 있던 정약종과는 그야말로 믿음의 벗, 즉 교우로서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일광은 유학자로서 식자층(識者層)이 쓰던, 유식하되 어려운 언어에만 익숙하던 정약종에게 진솔하면서도 쉬운 민중의 언어와 그 안에 담긴 민족의 종교심성을 그 특유의 뛰어난 지능과 솔직함으로 전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주교요지’는 ‘천주실의’보다 더 뛰어난 교리책”(주문모 신부)이 되어 신유박해 이후 지속된 백년 동안 교우촌의 신자들로 하여금 박해에 대항하여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준 사상적 방패가 되어 주었습니다.<br>교우 여러분!<br>보편 초대교회에서나 한국 초대교회에서나 기적 같은 선교 활약을 펼친 신앙 선조들은 모두 다 발현 체험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사도 4,20) 발현체험은 부활 신앙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미사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교회의 발현 양식입니다. 습관화된 자세로 말씀을 듣거나 성찬에 참여하지 말고, 복음과 독서에 나온 증인들의 눈으로 새롭게 말씀을 듣고 성찬에 참여해 보십시오.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새롭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발현체험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nbsp;<br>그리하여 솟아날 믿음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새로운 사회는 지금도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미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도들처럼 부활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계십니까?&nbsp; 우리가 보고 듣는 체험을 증언하는 그 작은 일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끝내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nbsp;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해서 옵니다.&nbsp;<br><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09:3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왕과 사는 사람, 왕을 파는 사람</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9</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qeo5yGWz_common.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7"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acronym><br><br>1,600만 명의 시민이 영화관을 찾았다. 569년 전 죽은 단종(1457)을 2026년의 국민들은 왜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까. 프로이트와 융의 통찰을 빌리자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우리 사회의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던 ‘정의에 대한 갈망’과 ‘지워진 존재에 대한 부채감’이 단종과 엄흥도라는 상징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br>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기록이 아니라 민심의 준엄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화려한 권력 찬탈사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영월의 하급 관리였던 엄흥도에 주목했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모두가 눈을 감을 때, 그는 유배된 왕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엄흥도에게 왕은 이용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버려진 그 참혹한 순간에도 곁을 지키며 고통을 함께 ‘살아냈다’. 관객들이 공명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권력의 서사가 아닌, 끝까지 곁에 남은 ‘인간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br>기억의 전례, 2천 년 전 중동의 청년 예수를 부르다<br>이러한 기억의 소환은 인류 역사 속에서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왔다. 2천 년 전, 중동의 한 청년 예수는 권력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인류는 그를 죽음 속에 방치하지 않았다. 매주, 매해 반복되는 전례(Liturgy)를 통해 그를 기억의 광장으로 불러냈다. 예수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전례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오늘 우리 곁으로 살려내어, 그가 추구했던 사랑과 정의를 현재의 삶으로 살아내겠다는 강력한 부활의 선언이다.<br>이 기억의 전례는 오늘날 작가 한강의 문장들과도 맞닿아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는 묻는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한강이 그려낸 광주와 제주의 영혼들은 산 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들의 고통을 나의 통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을 통해 비로소 완전해지며, 산 자는 그 기억을 짊어짐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찾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살아있는 오늘’이 된다.<br>정치라는 이름으로 오염된 기억<br>그러나 정치의 장면으로 오면 이 숭고한 기억은 일순간 왜곡되고 오염된다. 선거 국면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소환할 때, 시민들은 그것을 온전한 애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울시장을 하겠다는 정원오가 박원순 시장을 소환한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살리기 위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을 위한 ‘정치적 호출’로 읽히기 때문이다. 애절한 비극이 권력 쟁취의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민심은 등을 돌린다. 기억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이다.<br>과거 한 시대의 중심에서 ‘3철’이라 ‘독수리 5형제’라 불리던 인물들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지난날의 혼란과 무능에 대한 책임은 증발했고, 정치는 다시 비정한 계산기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숨어들고, 누군가는 밀려나며, 누군가는 다시 배지를 향해 달린다. 비루하다. 참으로 비루하다. 그들은 한때 왕과 함께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왕을 파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이재명 대통령의 사진보다는 자신의 정책과 성과를 들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br>아스팔트의 연대, 거래되는 정치를 거부한다<br>우리는 기억한다. 윤석열-김건희 정권의 비정상적인 통치와 계엄의 공포 속에서, 아스팔트 위로 나오라 외치던 그 간절한 소환을. 시민들이 추운 겨울.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민주당은 연대를 말했고 함께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사람을 나누고 줄을 세운다. 소위 ‘배지’를 달았다는 자들은 회의 석상에서 “거리에서 싸운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해도 된다”고 냉소한다. 연합정치의 틀을 부수어버린다. 대통령이 사랑의 교회까지 찾아가 이영훈 목사를 만나며 손을 잡고 평강과 연합을 외치고 있는데, 추운 겨울 아스팔트 거리 위에서 싸워왔던 동료들을 “세력도 없는 시민사회 단체, 대화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연합정치를 걷어차는 발언을 하고 있는 소위 “뺏지”들을 바라보며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말릴 것이다. <br>이것은 단순한 공천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단종을 기억하는 사회와 죽음을 소비하는 정치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하나는 과거의 억울함을 통해 현재를 바꾸려 하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비극을 팔아 현재의 권력을 사려 한다. 지금의 정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지켜내려 했던 그 정치인가.<br>정치가 답할 차례다<br>혹자는 물을 것이다. 왜 지금 ‘왕’이라는 봉건적 언어를 다시 꺼내느냐고. 여기서 말하는 ‘왕’은 권력의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고,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라 그 곁에 서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br>하느님의 시선은 언제나 지워진 자들의 곁에 머문다. 고통의 곁을 지키지 않고 그 고통을 팔아 연명하는 정치는 영적으로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다. 1,600만 시민은 이미 답했다. 우리는 ‘왕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왕과 함께 살아내는 엄흥도’를 원한다고.<br>이제 비루한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치가 답할 차례다. 당신들은 기억을 짊어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거래할 것인가. 죽은 자들의 소리 없는 외침이 오늘 당신들의 발등을 찍고 있음을 잊지 말라.<br> <br><br>]]></description>
			<author>지성용</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10:40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quot;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quot;</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QZkB4Pm1_041226EBB680ED999C_ECA09C2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3"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5FHo6gRs_5BEABEB8EBAFB8EAB8B05D041226_EBB680ED999C_ECA09C2ECA3BC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4" style="clear:none;float:none;" /><br>2026년 4월 12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br>제1독서 (사도행전 2,42-47)<br>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br>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br>제2독서 (베드로 1서 1,3-9)<br>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br>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br>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br>복음 (요한 20,19-31)<br>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br>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br>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br>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br>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09:51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강하구 북한 땅에 국제기구도시를 세우자</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10</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gKTkaqJt_5BEABEB8EBAFB8EAB8B05DDSC01873.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지구촌 평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동북아는 늘 문제의 진원지로 거론된다. 북핵 위기, 미중 패권 경쟁, 한반도 분단.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문제의 진원지가 해법의 진원지가 될 수는 없을까.<br>평화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제도가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지속된다. 국제기구란 그 제도의 물리적 형태다. 기구가 한 곳에 모이면 분쟁을 조정하는 중립지대가 생기고, 사람이 오가고, 돈이 흐르고,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브뤼셀이 유럽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br>유엔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br>1945년 만들어진 국제 질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 이 설계했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 나라는 이후 모두 핵보유국이 됐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은 이 다섯 나라의 동의 없이는 어떤 집단 행동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유엔은 핵을 가진 자들이 핵전쟁을 방지하는 클럽으로 설계된 것이다.<br>그 설계의 한계가 21세기 들어 날마다 폭로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채 4년째 전쟁을 이어가고,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br>트럼프의 미국은 무도한 이란 침공을 강행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거부권 앞에 무력하게 침묵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와 푸틴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해도 집행할 방법이 없다.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이라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 현실이다.<br>더 결정적인 것은 유엔이 구조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 붕괴, 생태 파괴, 빅테크 데이터 독점, 팬데믹 — 이것들은 모두 국경을 넘는 문제다. 그러나 유엔 헌장 제2조 7항의 불간섭 원칙은 강대국이 무슨 짓을 해도 '내정 간섭'이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형 위협에 맞게 설계된 기구가 21세기형 위협 앞에서 무력한 것은 설계 실패가 아니라 설계 의도의 한계다.<br>그 결과 지금 지구촌에서는 새로운 국제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유엔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것 — 공유 자원의 민주적 관리, 강대국 지도자에 대한 실질적 제재, 지구 차원의 공공재 공급 — 을 담당할 새로운 성격의 기구들이 절실해졌다는 것이다.<br>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자원, 핵 감시, 생물다양성 — 분야마다 새로운 국제 협력의 틀이 요구되고 있다.<br>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왔다<br>국제 거버넌스의 수요가 폭발하는 바로 이 시점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했다. 2000년 세계 GDP의 30%이던 아시아의 비중은 2025년 현재 약 50%에 달한다. 중국 18.3조 달러, 일본 4.1조 달러, 한국 1.7조 달러. 동북아 3국만 합쳐도 세계 경제의 22~23%다. 세계 4분의 1의 경제를 움직이는 권역이다.<br>그런데 이 권역에 국제기구 본부는 얼마나 있을까. 국제기구연합(UIA) 2024/2025년 연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활동 중인 국제기구는 약 4만 5,000개, 등록된 기구는 7만 8,500개를 넘는다. 2008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그 본부 소재지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에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브뤼셀 1,000개, 파리 288개, 런던 284개, 빈 156개, 제네바 135개. 아시아 최다인 싱가포르가 111개, 도쿄 92개, 서울 76개다. 동북아 3대 도시를 합쳐도 210개 — 브뤼셀 혼자의 5분의 1에 불과하다.<br>세계 경제의 비중과 국제기구의 비중 사이에 이토록 큰 괴리가 있다. 이것은 불균형이다. 그리고 불균형은 언제나 조정을 요구한다.<br>트럼프가 만들어준 역사적 공백<br>2026년 1월,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으로 66개 국제기구 및 UN 산하기구에서 탈퇴와 재정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UNFCCC(기후변화협약), IPCC, UNCTAD, UN민주주의기금, UN인구기금 등 제네바와 뉴욕에 집중된 핵심 기구들이 포함됐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낡은 다자주의 모델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추가 탈퇴 가능성도 열어두었다.<br>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기회다. 미국이 떠난 기구들에 새 거점이 필요해졌다. 제네바의 한 언론은 이 상황을 "국제 제네바를 대변할 지도자가 없다"는 위기로 묘사했다. 동시에 이것은 미국 없이도, 혹은 미국을 대신하는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자각을 촉진하고 있다.<br>신설, 이전, 확충. 지금이 바로 세 가지를 동시에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br>한강하구, 지구촌에 이런 곳은 없다<br>어디에 새 거점을 마련할 것인가. 필자는 2018년 이 지면에서 한강하구를 제안한 바 있다. 지금 그 제안을 다시, 훨씬 강한 근거를 들어 꺼낸다.<br>한강하구 일대 약 260㎢, 개풍군을 중심으로 개성공단과 강화도 북부를 포함하는 이 땅은 서울 면적의 절반이다. 북한 땅이 대부분이다. 70년간 접경지대로 묶여 손 못 댄 그 땅이, 지금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도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br>입지 조건을 보라. 인천공항까지 1시간, 베이징·상하이·도쿄까지 2시간 항공권이다. 해양(서해)과 유라시아 대륙철도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상 유일한 지점이다. 2천만 인구 밀집지가 1시간 안에 있고, 세계 경제의 거점인 동북아 3국이 코앞이다. 군사적 긴장만 완화된다면 지구상에 이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없다.<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4/975027450_5zUNi7MK_19520_65843_2630.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9"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필자가 제시하는 국제기구도시 후보지. (사진제공 = 이원영)</acronym><br><br>여기에 국제기구들이 들어선다. 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보건, 군축 — 국경을 넘는 문제를 다루는 기구들이 국경 그 자체인 이 땅에 자리 잡는다. 기구의 존재 자체가 평화의 물리적 보증이 된다. 한강하구를 침범하는 것은 그 기구들에 입주한 수십 개국을 동시에 건드리는 일이 된다. 브뤼셀이 유럽에서 한 역할을, 한강하구가 동북아에서 할 수 있다.<br>여기에 각국에 50년 장기 임대하는 조차지 기능을 더한다. 상하이가 조계지를 통해 이종 문명의 시너지로 성장했듯, 홍콩 옆 선전이 그랬듯, 이 땅도 그렇게 진화할 수 있다. 토지는 북한이 소유한 채 지대를 받아 주민에게 돌린다. 개성공단이 이미 소규모로 이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br>북한에게도 유력한 출구<br>북한도 지금 절실히 평화를 원하고 있다.<br>한강하구 국제기구도시는 북한이 체제를 바꾸지 않고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력하고 현실적인 경로다.<br>국제기구가 들어오면 세계와 소통하는 인프라가 생긴다. 국제 사회는 이 도시의 안전을 보장할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북한을 고립시켜 만들어진 위협은, 연결이 만들어낼 안정으로 대체된다.<br>이 구상이 실현되면 한반도 평화는 더 이상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는 수동적 평화가 아니다. 지구촌이 함께 이해관계를 가지는 능동적이고 구조적인 평화가 된다.<br>상상이 전략이 되는 순간<br>노예제 폐지도, 여성 참정권도, 유럽연합도 처음에는 공상이었다. 역사는 불가능이 필연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다.<br>유엔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새로운 지구 거버넌스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트럼프는 기존 국제기구 질서를 흔들어 공백을 만들고 있다. 동북아는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국제 거버넌스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변방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지금 동시에 맞물리고 있다.<br>한반도의 지정학적 무게를 짐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꾸는 것, 분단의 접경을 인류 협력의 거점으로 바꾸는 것 — 이것이 적극적 평화전략의 의미다. 방어하는 평화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평화다.<br>신설하고, 이전하고, 확충하라. 한강하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br>&nbsp;<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16:08: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새로운 존재방식, 이것이 부활입니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5</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8UuQwmeS_9999.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8" style="clear:none;float:none;" /><br><br>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2026.4.5)&nbsp;: 창세 1,1-31; 창세 22,1-18; 탈출 14,15-15,1; 이사 54,5-14; 이사 55,1-11; 바룩 3,9-4,4; 에제 36,16-28; 로마 6,3-11; 마르 16,1-7<br>1. 파스카 성야 전례의 뜻<br>오늘은 파스카 성야(聖夜)입니다. 인류의 파스카를 위해 전례로 미리 성취하는 거룩한 밤입니다.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에서 파스카 전례가 시작될 때 암시되었듯이, 예수님의 제사에는 죽음과 부활이 이미 담겨 있었습니다.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절에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바쳐야 할 희생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지향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nbsp;<br>성토요일을 지내고 맞이한 이 밤은 파스카의 절정인 부활 성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 덕분에 부활한 우리가 새롭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향을 보여 줍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기운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지금 여기서 그리고 우리 자신부터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존재방식, 이것이 부활입니다.&nbsp;<br>2. 말씀의 흐름<br>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말씀하시고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죄를 범한 아담과 다시 인류의 시조가 된 노아 이래로 사람들은 하느님과 엇박자를 많이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셨습니다.&nbsp;<br>아담에서 노아, 아브라함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으로 중시했던 일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제사였습니다. 제사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지향과 제물이 중요한데, 아담은 원죄를 저지른 데 대한 속죄의 제사를 바쳤을 것이고, 노아는 대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의 제사를 바쳤을 것입니다만, 짐승을 불살라 바치는 번제가 그 제물이었습니다.&nbsp;<br>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얻은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했으나 그 믿음을 크게 보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외아들 대신 어린양을 바치는 제사를(창세 22,13) 바쳤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바치실 본연의 제사의 예형(豫型)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는 지향으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속죄와 감사의 지향을 수렴하되 본연의 지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본연의 제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JxoSF4fm_111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9" style="clear:none;float:none;" /><br><br>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혹독한 강제노역으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해방됨으로써,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해방되어야 할 인류 전체의 파스카 과업을 미리 보여주는 역사적 예형이 되어 주었습니다.&nbsp;<br>파스카 과업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사야는 노아 시대에 있었던 대홍수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류와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알려 주었고(이사 54,9-10), 그 평화의 계약은 장차 사람으로 강생하시어 세상에 오실 성자 하느님께서 직접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이었습니다.&nbsp;<br>마침내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마치시고 부활하셨고, 그분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임을 알아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분과 계약을 새로이 맺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이들에게 이 세례성사에 담긴 창조와 해방의 은총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로마 6,8).&nbsp;<br>이상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흐름을 간추려 드렸습니다. 이 말씀들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부활 찬송에서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강생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오, 복된 탓이여!”라고 외치며 감격하였습니다.&nbsp;<br>3. 말씀의 성취인 부활<br>부활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희생 봉헌한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받으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이야말로&nbsp; 당신을 가장 닮은 인간이심을 증명해주신 가장 큰 복음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시며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준 으뜸 메시지가 창조라면, 이를 완성하는 부활은 신약성경 최대의 메시지입니다.&nbsp;<br>그래서 창조는 우리 믿음의 바탕이 되고, 부활은 그 목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고 의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될 뻔 했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만큼 그분의 부활이 중요하고, 놀라우며, 감사한 은총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분 안에서 부활해야 하고, 부활이 그저 육신의 소생 사건이 아니므로 우리의 부활은 역사적인 미래의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민족과 함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nbsp;<br>4. 부활의 지평이 여는 미래<br>오늘 파스카 성야 미사의 말씀에 따르자면, 부활은 하느님을 닮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민족 안에서 마주치고 있는 최우선적인 과제는 무신론 풍조를 극복하여 겨레로 하여금 창조주 하느님을 알게 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하느님 신앙에 대한 박해를 이겨낸 우리 교회는 영혼을 잊어버린 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현세적 삶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nbsp;<br>미사는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 최대의 정성으로 바쳐드려야 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로서, 감사와 속죄의 지향에 더하여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미사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찬에서 받은 거룩한 기운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일이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쳐드리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미사에 맛들인 신자들에게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쉬는 신자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nbsp;<br>그 옛날 이집트와 가나안은 파스카 과업의 역사적 예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부린 파라오 대신 물질 숭배와 특히 자본 숭배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고, 여기서 탈출하여 해방되어야 할 목표로서는 가나안 땅 대신에 사랑의 문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랑의 문명을 위한 평화의 계약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몸소 보여주신 대로 사랑을 자비롭게 실천하는 다짐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신앙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가야 할 새로운 갈릴래아는 바로 아시아 대륙입니다.&nbsp;<br>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25년 이상 새로운 갈릴래아로 떠오른 아시아 대륙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숙고해 온 아시아의 주교들은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요한 바오로2세 교황과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과거에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던 아시아인들 가운데에서 믿는 이들이 고작 3%에 머물고 있는 역사를 반성하면서, 이제 복음화의 방향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br>지난 세기 서구 열강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나라들이면서도 아시아인들에게 착한 이웃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식민지로 정복하여 사람들을 노예처럼 억압했으며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수탈해 갔었습니다. 선교 역사가 5백 년이 넘어가는 아시아 대륙에서 복음화가 지지부진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종교간 교세를 경쟁하는 식으로 선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도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본받고 싶은 나라로 삼게 만들고 있는 한류 문화 현상의 주역인 한민족이 이제 아시아 복음화에서도 앞장 서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류의 복음화입니다.&nbsp;<br>이미 한민족의 근현대사에서 입증되었듯이 가장 불행했던 처지에서 가장 부러운 처지로 변화시킨 이 가톨릭 한류가 복음화를 밑거름으로 삼아서 아시아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도 원동력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nbsp;<br>5.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존재방식<br>그래서 아시아 주교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전체 아시아 그리스도인이 삼중의 대화로 새로운 존재방식을 살아가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첫째로는 아시아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의 종교들이 진리를 향한 구도적 대화에 나서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진리야말로 종교간 대화에 매우 적절한 화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시아의 오랜 연륜을 지닌 전통 종교들로부터 진리를 깨닫고자 치열하게 정진하는 구도의 정신과 자세에 대하여 풍요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 종교가 인격적인 신이신 창조주 하느님과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전하고 계승해온 거룩한 전통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nbsp;<br>이러한 종교간 대화와 더불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사회의 논리적이고 분석적 논리로만 그리스도 신앙 진리를 전할 것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의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방식으로 전하고자 노력하는 문화간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의 사유방식 차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 이신 분이시며, 엄밀히 말하면 아시아의 서쪽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라나시고 활동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아시아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시아적 사유방식을 배워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nbsp;<br>또한, 광범위한 빈곤과 가혹한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의 현실과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할 수 있는 한 이들이 이 빈곤과 독재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과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이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아시아 종교의 영성과 문화적 감수성을 가장 진하게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hvnqPJ9T_333333.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0" style="clear:none;float:none;" /><br>교우 여러분! 아시아 주교들이 권고하는 이 ‘삼중의 대화’야말로 아시아 복음화 과업을 향한 새로운 존재방식이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 주교들의 성찰을 드러낸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에 관한 성명서 일부를 소개합니다.&nbsp;<br>“(아시아 교회는) 우리 문화들의 양식과 틀에 맞게 그리스도교 생활을 육화하지도 못했으며, 교회를 토착화하지도 못해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회를 이 땅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 아시아의 위대한 여러 타 종교 형제들과 더불어 개방적이고 진지하고 꾸준한 대화를 나누기로 약속한다. … 복음의 생활과 메시지가 아시아의 유서 깊은 문화 속에 더욱 융화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FABC 제1차 총회 성명서 「오늘날 아시아의 복음화」, 1974년 타이완 타이페이).<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04 Apr 2026 10:30:05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그제야 보고 믿었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4</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K5eyPGwt_040526ECA3BCEB8B98EBB680ED999CEB8C80ECB695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6"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t8pS0dCl_5BEABEB8EBAFB8EAB8B05D040526ECA3BCEB8B98EBB680ED999CEB8C80ECB695EC9DBC-EBB3B5EC9D8C.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7" style="clear:none;float:none;" /><br><br>202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br>제1독서 (사도행전 10,34ㄱ.37ㄴ-43)<br>그 무렵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br>“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br>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3,1-4)<br>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br>복음 (요한 20,1-9)<br>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br>“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br>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br>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03 Apr 2026 17:3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예수는 전쟁하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Y5GMpTHO_cq5dam.thumbnail.cropped.750.422.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1"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VATICAN NEWS)</acronym><br><br>레오 14세 교황이 지난 29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미사에서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강조하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전했다.<br>교황은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폭력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선택하신 예수를 묵상했다.<br>“그분은 다른 이들이 폭력을 부추기는 동안에도 온유함 속에 굳건히 머무르십니다. 다른 이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 때에도, 그분은 인류를 품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br>교황은 예수가 어둠과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세상에 생명과 빛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느님과 이웃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인류를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고자 하셨다고 설명했다.<br>교황은 “평화의 왕”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수난의 순간마다 드러난 예수의 선택이 곧 평화를 향한 길이었다고 밝혔다.<br>제자가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었을 때, 예수는 칼을 거두라고 명하셨다. 또한 십자가 위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내어주셨다.<br>“그분은 언제나 폭력을 거부하시는 하느님의 온유한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을 구하기보다, 인류 역사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짊어지는 모든 십자가를 끌어안으셨습니다.”<br>교황은 이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강조했다.<br>“너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나는 듣지 않는다. 너희 손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br>그러면서 교황은 “예수는 전쟁을 거부하시는 평화의 왕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을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그것을 거부하십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br>또한, 교황은 세계 곳곳에서 폭력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언급하며, 인류 공동체가 입은 상처를 깊이 우려했다.<br>“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시 외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비를 베풀어라! 무기를 내려놓아라! 너희가 형제자매임을 기억하라!”<br>강론을 마치며 교황은 하느님의 종 토니노 벨로 주교의 기도를 인용하며 희망을 전했다.<br>“거룩하신 마리아, 셋째 날의 여인이여,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소서. 전쟁의 번쩍임이 저물어 가고,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이 사라지게 하소서.”<br>이번 강론은 예수의 수난을 단순한 신앙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전쟁과 폭력의 현실과 직접 연결해 해석한 메시지로 읽힌다. 특히 “전쟁하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신앙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선언으로 주목된다.<br>로이터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교황의 이번 발언을 두고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상황 속에서 나온 가장 직접적인 종교적 경고’로 평가하며, 신앙이 폭력의 명분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비판한 발언이라고 해석했다.<br>▶ 원문보기&nbsp;<br><br>]]></description>
			<author>강재선</author>
			<pubDate>Mon, 30 Mar 2026 21:42: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교회 쇄신 의지와 대대적 각성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2</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fmA9owGR_55555.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52" style="clear:none;float:none;" /><br><br>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26.3.29) <br>
: 이사 50,4-7; 필리 2,6-11; 마르 14,1-15,47<br>
<br>
1. 전례의 흐름<br>
<br>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복음은 성삼일 전례의 흐름을 압축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생애 최후 한 주간의 기록으로서, 3년에 걸친 공생활 전체에 대한 기록과 맞먹는 비중을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이 수난기에서 그분의 참된 신원이 결정적으로 밝혀졌기 때문이고 또한 이 수난 사건이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비롯한 성주간은 연중 전례에서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이제 그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br>
<br>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만 해도 파스카 축제에 모인 군중은 죽은 라자로까지 살려내신 그분의 기적 능력에 비추어 무언가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 역할을 하시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성대하게 환영을 해 주었습니다.<br>
<br>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기대하던 그 어떠한 현세적인 차원의 정치적 역할도 하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이 장악하던 성전을 정화시키셨고 바리사이들과는 율법 논쟁을 하셨으며, 이들이 주도하던 유다교에 대해서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마르 11,12-14)에 빗대어 군중에게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정의의 실천으로 사랑과 평화의 열매를 맺었어야 했음에도 당시 유다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br>
<br>
이로써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던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자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에 대항하기보다는 십자가 죽임을 각오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따라서 독립을 위해 민중이 봉기하도록 앞장을 서주시지나 않을까 하고 내심 바랐던 군중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나중에 스승을 배신한 이스카리옷 유다도 그렇게 실망한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br>
<br>
- 공생활 활동을 모두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와서 하신 그 활동을 당신 제자들이 계승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서로 섬김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것이 그분이 남기신 공생활 최후의 메시지였습니다.<br>
<br>
-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셨는데, 제자들이 잠든 가운데 공포와 번뇌에 휩싸여 피땀을 흘려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마음의 준비를 하는 처절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배신자 유다를 앞세워 이곳으로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무리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쳐서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체포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최후의 메시지에 대한 사두가이들과 이스카리옷 유다의 반응이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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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소집된 유다 최고의회에서 아무런 증거나 제대로 된 증인도 없이 졸속으로 조작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사형 판결을 정해 놓고 시작된 재판이었고 율법 규정도 지키지 않은 채 진행된 협잡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정치범에 대한 사형집행권이 없던 유다 의회는 날이 밝자 마자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저로 그분을 끌고 가서는, 총독의 권세를 빌려 그분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두 번째 요식 재판을 벌였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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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관저 앞마당에는 사두가이파와의 비밀협상으로 동원된 혁명당원들이 우연히 모여든 구경꾼으로 위장한 채 집합해 있었습니다. 그들 혁명당원들은 이미 폭력행위로 사형판결이 내려져 있던 자신들의 동료 바랍바를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맞바꾸자는 비밀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짜고 나머지 군중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금방 폭동이라도 벌일 것 같이 사나워진 군중의 위세에 겁이 덜컥 난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을 핑계로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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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인들의 소행들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시며 순순히 감당하셨습니다. 모진 매를 맞으시어 기진맥진하신 터에 무거운 십자가까지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언덕 정상에서 다른 두 죄수와 함께 못 박혀 숨지셨고 그 순간에 하늘과 땅에서 커다란 표징들이 일어났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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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의회 이후의 한국교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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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이할 때와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는 백성임을 드러낸 대형 행사들이 여러 차례 개최되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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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981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에서 신자들이 모여 치룬 대형 공식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같은 자리에서 ‘천주교 선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및 시성식’도 열렸습니다. 이 행사를 뜻깊게 준비하기 위하여 1981년 말부터 4년 동안 전국에서 사목회의가 평신도와 수도자와 성직자 대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열려서 한국판 공의회를 치루었고,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메시아 백성으로서 거듭 나겠다는 다짐을 12개 의안에 걸쳐 표명하였습니다. 또한 1989년에는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대회’가 열렸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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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한 바오로 교황의 메시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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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을 바티칸 대성전에서 거행해온 오랜 관례를 깨고 파격적으로 서울 여의도 광장을 방문하여 한국의 순교 복자 103위를 시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 한국교회가 한민족을 복음화시키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 재차 방한하여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 2,14)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주교들과 언론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한반도의 평화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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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와 유림들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래, 식민통치와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빼앗긴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빼앗아 간 주변 강대국들보다 더 정의로워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한민족이 한반도 평화 회복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나서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사 32,17; 사목헌장, 78항)라는 명제가 그러한 요청의 근거였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원인이 되어 빼앗긴 한반도 평화를 피해자인 한국교회가 나서서 회복해 주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간절한 권고이기도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를 열고, 민족 복음화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한국교회가 나서줄 것을 교황권고 문헌 ‘아시아 교회’를 통해 강력하고도 간절하게 요청하였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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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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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124위 순교자 시복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교황은 아시아 복음화와 한반도 평화에 관해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한 메시지를 이어 받아 복음화를 위한 교회 쇄신을 주문하였습니다. 한민족에게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와 같이 정의로운 행보로 평화를 회복하고자 나설 것을 촉구하였으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여러 메시지들의 방점은 교회 쇄신에 찍혀 있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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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주교단에게는 한국교회를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로 쇄신해 줄 것을 주문하였고, 평신도들에게는 순교자들을 본받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에 순교정신으로 투신함으로써 역시 교회를 쇄신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도 참석했던 1984년 전국 사목회의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한국판으로 옮겨와서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 그리고 신앙 토착화를 다짐하고 12개 사목의안을 결의했던 바가 지난 40년 동안 전혀 실천하지 않았던 데 대한 쓴 소리였습니다. 마치 제 때에 열매 맺지 못하던 무화과 나무와도 같았던 이스라엘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바를 연상시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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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두 교황의 메시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려면 보편 교회의 여망에 따라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봉헌으로서 한국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하라는 것이었고, 그리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복음화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리라는 사목적인 훈수였습니다. 그 전제에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근거로 깔려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여기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인류의 복음화, 특히 말씀의 본 고장인 아시아의 복음화이고 곁들여 받게 될 선물은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복음화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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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사목의안이 발간된 1984년 이후 사목회의에서 제안된 교회 쇄신 제안은 통합 의안집이 재발간된 2022년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구간 전례와 사목지침 통합 작업만 이루어졌을 뿐 지지부진합니다. 이로써 한국천주교 주교단에서는 사목회의에서 제안된 교회 쇄신을 추진할 의지가 박약함을 알 수 있어서, 평신도들에 의한 밑바닥 교회 쇄신이 요청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것이 공의회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의 현세적 메시아니즘과는 또 다른, 고난을 회피하는 메시아니즘의 현실입니다. 교회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은 교회 쇄신이란 외부의 위협이 크게 닥치거나 내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쇄신 요구가 생겨나기 전에는 한 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교회 쇄신 의지가 생겨나야 하고, 대대적인 각성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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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메시아 백성이 되도록 부름받은 한국 교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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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와 메시아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 전하신 메시지를 옛 이스라엘 백성은 저버렸습니다. 새 이스라엘로 세워진 가톨릭교회도 지난 2천 년 역사를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는 개선주의(凱旋主義)적 교회관과 유럽식 교회 모델을 옮겨 심으려던 부식(扶植)적 선교관을 추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 못지않은 선교적 시행착오를 많이 저질렀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반성하면서 예언자들의 메시아 백성 예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천명하였습니다. 즉 고난받고 부활하는 메시아를 따르는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천명한 것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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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구 교회는 공의회가 폐막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이렇다 할 메아리가 없는 가운데, 백년 박해를 이겨낸 한국 교회는 독보적인 활력을 보여주면서 보편교회의 여망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를 두 교황의 방한 메시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부활하는 메시아와 메시아의 고난과 부활을 따르는 메시아 백성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기껏 성대하게 환영해 놓고 불과 며칠 만에 배신한 옛 이스라엘의 죄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가 새 이스라엘로서 메시아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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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두 교황은 한국교회에 복음화와 이를 위한 교회쇄신이라는 메시지로 격려하면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휘두른다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의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부디 보편교회의 여망을 대변하는 두 교황의 메시지를 교우 여러분들이 알아 들으시기를 기도합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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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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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Sat, 28 Mar 2026 10:10:03 +0900</pubDate>
		</item>
		<item>
			<title>민치제(民治制)를 병행해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K5BwsUz6_photo_2026-03-27_19-33-14.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4"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촛불행동)</acronym><br><br>한국 현대사의 두 차례 촛불+빛의 혁명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없는 이정표를 남겼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외침은 단순히 특정 정권의 퇴진을 넘어, "선거날에만 주권자로 대접받고 평상시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대의제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br>그 함성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시민이 광장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제도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 곧 헌법의 재해석을 통한 민주주의 재설계다.<br>아테네의 고전적 지혜와 스위스·미국·대만의 현대적 실험을 통해, 한국이 더 이상 제도 밖의 시행착오에 머물지 않고 '시스템 민주주의'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본다.<br>아테네의 유산 — '추첨'이 민주주의의 본질이었다<br>흔히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불리는 고대 아테네에서 '선거'는 오히려 귀족적이고 과두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 돈 많고 이름 알려진 자들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는 '추첨(Sortition)'이었다.<br>아테네의 핵심 의사결정 기구였던 '500인 평의회'는 30세 이상의 시민권자 중 추첨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1년 임기 동안 입법 안건을 준비하고 행정을 감시했다. 평범한 신발 수선공이나 농부가 오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내일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이는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피치자가 될 수 있다"는 민주적 평등의 극치였다. 현대 대의제가 잃어버린 '국민의 얼굴을 닮은 의회'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br>스위스·미국·대만 — 대의제의 벽을 넘는 현대적 실험<br>대의제의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스위스다. 스위스는 연방 차원의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를 헌법에 명문화하여, 의회가 처리하지 못하거나 거부한 사안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전통을 150년 이상 유지해 왔다. 선출된 의원과 직접민주주의 장치가 상호 견제하며 공존하는 이 모델은 대의제 보완의 가장 오래되고 검증된 사례다.<br>현대 대의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미국에서도 대의제의 결함을 보완하려는 움직임은 치열하다. 특히 캘리포니아, 오리건 등 서부 지역은 20세기 초 부패한 정치 카르텔에 맞서 강력한 '주민발안(Initiative)' 벨트를 구축했다. 의회가 기득권에 막혀 처리하지 못하는 사안을 시민들이 직접 투표에 부쳐 법으로 확정하는 이 시스템은, 주권자가 언제든 '최종 결정권'을 회수할 수 있는 제도적 우회로를 보장한다.<br>대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디지털을 통해 민의를 제도화했다. 2014년 '해바라기 운동' 이후, 대만은 유권자의 0.01%(약 2,000명)만 찬성해도 정책 제안을 공식 등록하고 정부의 답변을 강제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vTaiwan' 같은 플랫폼을 통해 갈등 사안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이를 정책에 녹여내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vTaiwan이 모든 의제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노동법 개정이나 에너지 정책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에서는 정부가 플랫폼의 결론을 외면한 사례도 있었고, 참여자가 기술 친화적 계층에 편중된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그러나 '대화의 판'을 제도화하고 시민의 일상적 참여를 시스템화하려는 시도 자체는 대의제의 '불통'을 돌파하는 중요한 실험임에 분명하다.<br>한국의 현실 —민의는 어디서 잠드는가<br>한국은 5만 명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국회의 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고도 결과는 만만치 않다.&nbsp;21대 국회에서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성립된 청원은 194건에 달했지만, 실제 처리율은 고작 17%에 불과했다. 나머지 80% 이상의 민의는 상임위 캐비닛 속에서 잠자다 임기 만료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22대 국회 역시 개원 6개월 만에 60건이 넘는 청원이 쏟아졌지만, 처리된 안건은 단 한 건도 없다(0%).<br>이 수치는 단순히 '국회가 게으르다'는 비판을 넘어, 현행 대의제가 시민의 의사를 흡수할 구조적 통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제도 실패의 증거다. 이래서는 민주주의 구현이 어렵다.<br>한국형 민치제 병행 시스템 구축: '발안-숙의-결정-실행'의 4단계 순환 모델<br>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시민 사회를 가졌음에도, 제도적 출구는 여전히 꽉 막혀 있다. 이제는 광장의 함성을 법전 속의 조문으로 바꾸는 장치가 필요하다. 필자는 '4단계 민주주의 순환 시스템'을 상상한다.<br>1단계: 국민발안 — 강력한 의제 설정<br>현재의 5만 명 성립 요건은 유지하되, 성립된 안건에 대해서는 국회가 '심사 연기'를 할 수 없도록 법적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대만처럼 낮은 문턱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는 구조를 지향하되, 한국의 현실에서는 우선 성립 요건의 강제력 확보가 급선무다.<br>2단계: 추첨제 시민의회 — 대의제의 동맥경화를 치료하다<br>이 시스템의 핵심이자 가장 혁신적인 장치가 '추첨제 시민의회'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국회의 처참한 안건 심의 성적표에 있다.<br>5만 명을 넘긴 안건을 국회가 6개월 이내에 처리하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거부할 경우, 독립적인 추첨제 시민의회로 안건을 강제 회부한다. 또 처음부터 시민의회에 회부할 것을 명시한 안건(가령 개헌, 선거제도 등)도 해당된다.<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GiRP1vIM_7777.jpe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5"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202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시민의회 국제심포지움에서 시민의회입법추진100인위원들이 선언하고 있다. ⓒ 이원영</acronym><br><br>시민의회는 전국 유권자 명부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한 150~200명으로 구성하되, 성별·연령·지역·직업·교육수준 등의 비례를 맞추어 '대한민국의 축소판'이 되도록 설계한다. 임기는 안건별로 3~6개월로 한정하고, 참여 기간의 활동비(일 15~20만 원 수준)와 직장·학업 보호(휴가 의무 인정, 복귀 보장)는 국가가 보장한다.<br>시민의회는 전문가 패널(법률·경제·행정 등 분야별 10~15명)을 상시 지원받아 복잡한 안건도 충분히 숙의할 수 있도록 한다. 숙의 과정은 4~8주간의 집중 토론(온·오프라인 병행)으로 진행되며, 최종적으로 찬반 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국회에 '구속력 있는 권고'가 아닌, '직접 발의안'으로 자동 상정되는 효력을 가진다. 즉, 시민의회가 찬성 과반(예: 55% 이상)을 얻으면 해당 안건은 국회 본회의에 의무 상정되어 표결에 부쳐지며, 국회가 재거부할 경우 최종 국민투표로 넘어간다.<br>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고질적인 모순인 선거제도의 셀프입법, 즉 "선수(의원)가 경기 규칙(선거법)을 정하는 현상"은 바로 이 시민의회로 바로잡아야 한다. 정치학계가 '권력의 자기복제' 또는 '카르텔 민주주의'라 부르는 이 병폐를, 어떤 정파적 이해도 없는 추첨 시민이 고쳐낼 수 있다.<br>3단계: 국민투표 — 최종 결정권의 귀속<br>시민의회가 제시한 안건이 국회에서 재차 거부되거나 수정·삭제될 경우, 자동으로 전 국민 대상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권이 발동되도록 입법한다. 투표 문항은 시민의회가 숙의한 최종 초안 그대로 유지되며, 가령 투표율 30% 찬성율50%이상시 법률로 확정된다. 이는 스위스 모델처럼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이중 안전장치'를 작동시키는 단계다.<br>투표 비용 절감을 위해 온라인 투표 병행(신분 인증 강화)과 우편 투표 확대를 기본으로 설계하면 현실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br>4단계: 실행·피드백·순환 — 민치제의 지속 가능성<br>법으로 확정된 안건은 정부·지자체가 1년 이내에 이행 계획을 수립·공표해야 하며, 이행률을 시민감시 플랫폼(디지털 대시보드) 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행 미달 시 차기 시민의회에서 재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br>이렇게 4단계가 순환하면서 민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제도적 흐름이 된다.<br>가장 많이 나올 반대 논리에 대한 답변<br>반론1) “추첨된 일반 시민이 복잡한 정책을 제대로 다룰 수 있나?”<br>→ 아테네부터 현대 아일랜드·프랑스 시민의회 사례까지, 충분한 시간·정보·전문가 지원이 주어지면 일반 시민의 숙의 역량은 전문 정치인 못지않다는 것이 반복 검증되었다. 오히려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미니 국민'이 더 공익 중심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br>반론2) “일관성·책임성이 떨어지고 극단 세력이 장악할 위험이 있다”<br>→ 추첨은 매번 새로 구성되므로 특정 세력이 장기 장악 불가능하며, 성별·지역·연령 별 추첨+ 무응답자 대체 추첨으로 다양성을 극대화한다. 또한 숙의 과정 자체가 극단 의견을 중도화하는 효과가 입증되어 있다.<br>반론3) “예산과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br>→ 연간 10~20건 안건 기준으로 추산 시 연 500~1,000억 원 수준(활동비 + 운영비 + 투표비 포함)으로, 국회예산 7천억~8천억원의 10%수준이고 전체 국가예산 729조원의 0.01% 수준이다. 국회예산을 약간 증액하는 셈으로 하면 된다.안건 필터링(5만→10만 명 요건 상향 검토) 과 온라인 숙의 비중 확대로 비용을 더욱 압축할 수 있다.<br>물론 이 시스템이 만능은 아니다. 시민의회가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를 대비한 숙의 절차 규정, 투표 결과가 헌법적 가치와 충돌할 경우를 조율하는 헌법재판소의 역할, 그리고 포퓰리즘적 동원에 시스템이 악용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완의 필요성이 시스템 도입 자체를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대의제 역시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다. 제도는 실천 속에서 다듬어진다.<br>결론,&nbsp;민주주의 본질을 향한 입법과 헌법반영<br>대의제는 결코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지금의 시대는 의사결정의 대상이 과거보다 다양하고 대의제에만 맡길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SNS 등으로 권력의지를 표현하는 주권자의 요구도 폭증하고 있다.<br>이 모든 변화를 담으려면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는 헌법 제40조의 낡은 독점을 재해석하여 민치제의 길을 열어야 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발안·숙의·결정의 순환 시스템은 일반입법으로도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당성의 뿌리를 온전히 내리려면 헌법개정시 반드시 반영하도록 한다.<br>즉, "대의제에 맡길 일이 있고, 주권자가 직접 판단할 일이 있다"는 원칙을 제도로 새기는 것, 그것이 두 차례 촛불+빛의 혁명이 진정으로 가리킨 길이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9:39:36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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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감보다 무관심, 갈라지는 한국의 종교 지형</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1</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EQ045aBD_ED959CEAB5ADEC9DB8EC9DB4_ED9884EC9EAC_EBAFBFEB8A94_ECA285EAB590.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0" style="clear:none;float:none;" /><br><br>한국 사회의 종교 지형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장기간 이어져 온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종교인 비율이 소폭 반등했지만, 동시에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br>이 26일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종교를 믿는 성인은 40%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37%에서 증가한 수치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 나타난 반등이다.<br>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종교인 비율은 여전히 감소 흐름 속에 있다. 2004년 54%였던 종교인 비율은 2014년 49%, 2022년 37%까지 하락했다가 이번에 소폭 상승했다. 특히 젊은 층의 이탈이 두드러진다. 2004년 20대의 종교인 비율은 45%였지만 2022년에는 19%까지 떨어졌다.<br><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c8paxPFS_EC97B0EBA0B9EBB384ECA285EAB590EC9DB8.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2" style="clear:none;float:none;" /><br>개신교·불교 비슷, 천주교는 안정적<br>현재 종교 분포는 개신교 18%, 불교 16%, 천주교 6%로 나타났다. 비종교인은 60%로, 여전히 과반을 차지한다.<br>불교는 고령층 중심 구조가 뚜렷해 장기적 교세 약화가 예상되는 반면, 개신교와 천주교는 비교적 연령 분포가 고른 편이다. 특히 개신교는 최근 몇 년간 감소세에서 벗어나 다시 증가 흐름을 보이고 있다.<br>비종교인의 시선… “호감보다 무관심”<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Qih3mLFV_EBB984ECA285EAB590EC9DB8EC9D98_ED98B8EAB090ECA285EAB590.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41" style="clear:none;float:none;" /><br>이번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비종교인의 인식이다. 비종교인이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는 불교 15%, 천주교 11%, 개신교 6% 순으로 나타났다.<br>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지표는 ‘호감 종교 없음’이다. 이 응답은 2004년 33%에서 2025년 67%로, 20년 사이 두 배로 증가했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종교 자체가 삶의 관심 영역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br>비종교인의 종교 경험 자체도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004년 43%에서 2014년 35%, 2025년에는 22%까지 감소했다. 이제 비종교인의 다수는 ‘종교를 떠난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종교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br>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 역시 ‘관심이 없어서’(52%)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과거의 불신이나 갈등 중심의 탈종교화에서, 무관심 중심의 탈종교화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br>신앙은 더 ‘집중’, 그러나 ‘기도’는 줄어<br>한편, 종교인 내부에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은 팬데믹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br>주 1회 이상 종교시설 방문 비율은 개신교 81%, 천주교 68%로 모두 증가했다. 경전 독서 역시 각각 61%, 45%로 상승했다.<br>그러나 개인적 신앙 실천의 핵심 지표인 ‘매일 기도’ 비율은 오히려 감소했다. 개신교 43%, 천주교 39%로, 과거보다 낮은 수준이다.<br>믿는 사람은 더 깊게, 떠난 사람은 더 멀리<br>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의 종교인구가 단순히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br>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반면, 종교를 떠난 사람들은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을 잃고 더욱 멀어지고 있다. 특히, 비종교인의 다수가 ‘종교 경험조차 없는 세대’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종교의 전승 방식과 사회적 역할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br>]]></description>
			<author>임신비</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9:14:09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가스펠:툰]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200</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zJ0YiOyB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8F85EC849C.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2"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ltpcdHSG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1.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3"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HtKYbz08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2.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4"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kbo5zmec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3.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5"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9OY4RzIv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4.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6"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5pSyt8AL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5.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7"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Ta8ISUNe_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6.pn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8" style="clear:none;float:none;" /><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52UsytD7_5BEABEB8EBAFB8EAB8B05D032926ECA3BCEB8B98EC8898EB829CEC84B1ECA780ECA3BCEC9DBC-EBB3B5EC9D8C-7.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9" style="clear:none;float:none;" /><br>2026년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br>제1독서 (이사양서 50,4-7)<br>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br>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br>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2,6-11)<br>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nbsp;<br>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nbsp;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br>복음 (마태오 26,14─27.66)<br>○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br>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물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수석 사제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묻기 시작하였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물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nbsp;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런 다음,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감겨 자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 가시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그때에 무리가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에게도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무리는 예수님을 붙잡아 카야파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곳에는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까지 가서, 결말을 보려고 안뜰로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았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섰지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말하였다.▣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대사제가 말하였다.●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예수님께서 대사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에 대사제가 자기 겉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방금 여러분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자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말하였다.▣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이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다시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수석 사제들은 그 은돈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 값어치가 매겨진 이의 몸값, 이스라엘 자손들이 값어치를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 주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신 대로 옹기장이 밭 값으로 내놓았다.”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총독이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군중이 대답하였다.◎ “바라빠요.”○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군중이 모두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며 조롱하였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군사들은 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nbsp;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nbsp;○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였다.▣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br><br>○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nbsp;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저녁때가 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서 요셉이라는 이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가 내주라고 명령하였다. 요셉은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 거기 무덤 맞은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그들은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br><br><br><br>]]></description>
			<author>김웅배</author>
			<pubDate>Fri, 27 Mar 2026 16:00: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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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방의 개념, 안보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198</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W63T7exJ_160406-N-ZZ999-625.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1"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출처=국방부)</acronym><br><br>2024년 11월, 트럼프가 다시 당선되자마자 서울로 전화한다. 해군함정 손좀 봐주라는 요청을 하는 순간은 커다란 전환의 신호였다. 미·중 경쟁 속에서 미국이 자국 해군력의 일부를 한국의 기술적 역량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다.<br>그리고 2026년 2월, 천궁-II의 실전 배치는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완성한 또 하나의 장면이었다. 한국이 더 이상 ‘기술 수입국’이나 ‘동맹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 방공망의 패러다임 자체를 재구성하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br>우리의 힘을 자각케 해주는 사건<br>천궁-II가 구현한 ‘직격 요격(Hit-to-Kill)’ 기술은, 초고속 탄도미사일의 미래 위치를 극단적으로 정밀하게 예측해, 탄두에 몸체를 그대로 들이박는 형태의 센서·알고리즘 융합 기술이다. 지상 레이더가 제공하는 광역 탐지와 미사일 자체의 탐색기가 포착하는 정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합성해, 기만탄과 파편 속에서 진짜 위협만을 분리해 내야 하는 이 과정은, 고도로 특화된 객체 탐지·추적 기술의 정점에 가깝다.<br>말이 요격이지 귀신보다 전율을 일으키는 기술이다. 초음속으로 날아오고 있는 미사일의 머리를 공중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찰나의 순간에 박치기를 해서 터트릴 수 있다니! 외계인의 기술이 아닌가? 세계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가장 충격을 먹은 나라는 북한 뿐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순서였을 것이다. 저런 극강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다른 무기들은 어떤 것이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것이다. 이젠 판도가 달라졌다. 마치 100년전 미국의 실력이 드러날 때처럼.<br>개발 중인 천궁-III, 그리고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L-SAM과 이후 단계의 L-SAM-II는 더 빠르고 더 기동성이 높은 탄도·극초음속 위협까지 염두에 두고 설계되고 있다.<br>미국이 압도적 물량과 예산으로, 중국이 압축적 양산과 배치로 승부할 때, 한국은 “가장 영리한 머리를 가장 가벼운 몸체에 담는” 방식으로 방어체계를 정교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br>잠수함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핵추진 잠수함(SSN)을 해군 강국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 전술 환경을 들여다보면, 핵추진은 필연적인 구조적 소음(원자로 냉각계통 등)을 감수하는 선택이다. 한국이 선택한 길은 다르다. KSS-III Batch-II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과 소음·진동 저감 공학은, 특히 좁고 복잡한 연안 해역에서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수준의 정적(靜的) 운용을 지향한다. 이 해역에서는 ‘정지에 가까운 조용함’ 자체가 곧 생존성과 공격력이다. 핵 추진이라는 상징을 좇기보다, 자국 안보 환경에 최적화된 잠수함 전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선택은 기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더 영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br>하지만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순한 기술 자랑이 아니다. 한국이 축적해온 이 방어 기술을 통해, 전혀 다른 유형의 힘, 전혀 다른 안보 철학을 모색해 보자는 제안이다.<br>방어자가 공격을 하지 않으면서도 지키는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면, 공격자는 스스로 상처를 입고 공세를 포기하게 된다. 이 패턴이야말로 전쟁을 멈추게 하는 진정한 평화의 메커니즘이다. ‘평화군’으로서의 역할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br>지구촌 방패의 역할을 할 대한민국<br>방어 체계는 한 국가의 독점 자산이 아니라, 여러 국가가 공유할 수 있는 ‘안보 공공재’로 설계될 수 있다. 공격용 미사일이나 전략폭격기가 특정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이라면, 방어 체계는 그 지역 전체의 민간인을 보호하고 확전을 어렵게 만드는 공동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오랫동안 개발해온 무기 체계가 대체로 ‘침략용’이 아니라 ‘억제·보호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국가 브랜드와 외교 전략의 자산이 될 수 있는 특징이다. 한국은 이 “방패의 정체성”을 더욱 의식적으로 다듬어, 지구촌에 안보 공공재를 제공하는 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br>물론 방어 기술의 고도화가 자동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어체계도 군비경쟁과 불신을 자극할 수 있고, 공격과 방어의 경계는 언제나 논쟁적이다. 새로운 요격체계가 등장할수록, 상대는 더 많은, 더 빠른, 더 우회적인 공격수단을 연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방어 중심 전력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한국이 “선제 공격 능력”의 과시보다 “피해 최소화와 확전 억제 능력”을 우선순위에 두는 국가라는 방향성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 방향성은 동맹국뿐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공명한다.<br>한미연합훈련의 방향을 전환할 때<br>이제 한미동맹을 보자. 과거의 한미연합훈련은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전개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결의를 과시하는 훈련이었다. 이 방식은 억지력 측면에서 분명한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주변국의 불안과 긴장을 자극하는 측면도 피할 수 없었다. AI와 디지털 트윈 기술이 성숙해가는 지금, 우리는 훈련의 형식을 재설계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br>미래의 한미훈련은, 외부에 과시되는 병력 규모보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시뮬레이션 인프라가 핵심이 되는 훈련이다.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구축한 디지털 전장 환경 속에서, 수십만 명의 병력을 움직이는 대신 수천, 수만 개의 시나리오를 돌려 보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멀리 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위기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확전이 억제되는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경로는 무엇인가”를 함께 연습하는 것이다. 한국의 방어 중심 기술과 미군의 공격 중심·기동 중심 전력을 결합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신속 공격’보다 ‘위기 관리’와 ‘확전 방지’를 동맹의 핵심 임무로 전환하는 것이다.<br>대한민국은 더 이상 일방적인 의존 관계 속의 동맹 파트너가 아니다. 우리는 독자적인 억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맹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재설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국방의 개념을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Tue, 24 Mar 2026 12:11: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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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십자가, 불신의 병(病)을 치유하는 믿음의 표징</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197</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NkSWCK0e_11111.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30" style="clear:none;float:none;" /><br>사순 제5주간 화요일 (2026.03.24) : 1사무 16,1-13; 에페 5,8-14; 요한 9,1-41<br>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도정에서 거쳐야 했던 시나이 광야에서 양식과 물이 부족하여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진노하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에 물려 죽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 죽음이 불평으로 인한 벌임을 깨달은 백성이 하느님께 사죄하며 모세에게 보속을 청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불 뱀과 색깔이 비슷한 빨간 구리로 만든 뱀의 형상을 높이 매달아놓고 이를 쳐다보게 함으로써 불평과 불 뱀으로 인한 소동이 가라앉았습니다. <br>구리 뱀을 통한 치유의 효과는 이를 명령하신 하느님을 상기하고 뿌리를 생각하게 하여 믿음을 되찾게 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입니다. 불신으로 인한 병을 낫게 해 주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믿음을 되찾음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면 병이 낫기는 고사하고 그 어떠한 인격적 변화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한낱 미신(迷信)에 불과한 것이지요. <br>오늘 미사의 복음 환호송에서는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우리가 인간 생명을 얻었고, 그래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 생명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조상들이 불신에 가득 차서 불평과 불만을 일삼았던 것처럼, 그 후손들도 로마의 식민통치로 민족사 최악의 역경을 겪는 가운데 이 좋지 못한 고질병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오셔서 선민으로서의 희망을 주시고자 가르침과 기적으로 노심초사하셨는데도 그러했습니다. <br>하느님보다 마귀의 영향력에 기대던 유다인들은 별 수 없이 아래에서 온 존재가 되었지만, 위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하느님께로 데려가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불 뱀에 물린 유다인들이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고서야 죽지 않고 나을 수 있었듯이, 하느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아 불신의 병에 걸린 이들 역시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려지신 예수님을 쳐다보고서야 그 존재와 인식이 온전해 질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비로소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중하는 이치입니다.<br>이러한 유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살거나 일하거나 기도하는 모든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어 놓습니다. 쳐다보며 기도하기 위해서이고, 믿음을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비롯한 성물(聖物)들을, 기도하여 믿음을 상기하고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모상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쓰지 않고 장식품처럼 쳐다보기만 한다면 이는 부적(符籍)처럼 취급하는 셈이 되어 그 어떠한 효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br>하늘을 우러러보며 제사를 지내온 우리 한민족 역시 이스라엘 민족처럼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어 왔습니다. 그 제사의 흔적이 고인돌입니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7만여 기(基) 이상의 고인돌 중 그 절반이 훨씬 넘는 4만여 기가 한반도와 만주 지방을 비롯한 그 주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고인돌은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권력자의 영생을 보장받으려고 엄청난 공력과 노역을 들인 무덤이 아니라, 천손의식을 지녔던 선조들이 노아를 본받아 돌을 쌓아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제단입니다. <br>우리 민족이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복음 진리를 들여왔을 때, 조선의 조정과 유림들은 나라가 망할 듯이 호들갑을 떨며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특히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처음에 천주교를 들여온 지식인들을 죄다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바람에 지도부가 와해된 천주교는 끝장 난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벽의 사후에 그 동료 선비들이 역시 자발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임시성사조직을 4년 동안 가동하면서 한양만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양반들만이 아니라 중인, 상민, 천민, 부녀자들을 고루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늘어난 1만 명의 교인들이 신유박해 이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자생적으로 전국에 교우촌을 세워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br>그 교우들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께 기도로나마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의식이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와서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에 식구들이 모여 드리는 기도와, 주일이 되면 공소에 모여 신자들이 드리는 공소예절로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시대 백 년 동안에도 제사를 잊지 않고 바쳤습니다. 이렇듯, 고조선시대 이래의 하느님 제사가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로 인하여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 덕분에 제대로 된 삼위일체 신앙으로 흠숭을 드리는 제사가 바쳐지기에 이르렀는데, 받드시 십자가를 걸어놓은 자리에서 바쳤습니다. <br>십자가 밑에서 바쳤던 이 제사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인하여 그 본질과 핵심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단지 하느님께 복을 청하는 기복적 지향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다짐하는 이타적이고 홍익인간적인 지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쳐다보며 효험을 바라는 부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하느님 닮게 해 줌으로써 불신의 병을 치유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br><br><br>]]></description>
			<author>이기우</author>
			<pubDate>Tue, 24 Mar 2026 11:40:3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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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완수사권'은 별건수사 만능키…열쇠 회수해야</title>
			<link>http://www.catholicpress.kr/news/view.php?idx=8196</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www.catholicpress.kr/data/cheditor4/2603/975027450_TwlEsQOh_555.jpg" class="txc-image tx-unresizable" idx="21729" style="clear:none;float:none;" /><acronym style="margin: 5px 0px; color: #888888; font-size: 11px; 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px; display: block" id="image_0.016691736411303282_text">▲ (사진 = 국회방송 영상 갈무리)</acronym><br>17일 발표된 당정청 합의는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진전처럼 보인다. '검찰청' 간판을 떼고 '공소청'으로 전환하며 수사와 기소를 확실히 분리하겠다는 선언은 분명 개혁의 마침표를 찍는 듯한 인상을 준다.<br>그러나 화려한 간판 뒤에 숨겨진 '보완수사권'이라는 작은 문구를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이 합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타협인지 목격하게 된다.<br>한국 검찰의 본질적 문제는 권한 규모가 아니라, 그 권한이 정치적으로 남용되는 구조에 있다. 한국은 검사 1인 책임제와 기소편의주의로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쌓아왔다.<br>검찰 권력의 본질은 '기록'이 아니라 '행위'에 있다. 지금까지 검찰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법리를 검토해서가 아니다. 직접 사람을 부르고, 집을 뒤지고, 캐비넷에 정보를 쌓을 수 있는 '직접 수사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의 핵심은 이 물리적인 칼날을 거두고 검사를 순수한 공소유지인으로 되돌리는 데 있다.<br>그 캐비넷의 뿌리는 길다. 일제 고등계 형사가 사상범을 분류하던 서랍장,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하던 파일철이 그 원형이다. 기관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정보를 쥔 조직이 권력을 쥔다'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br>검찰 수사권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그 캐비넷의 운영에는 조직이 필요하고, 조직 운영에는 법적 근거와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보완수사권 논쟁의 핵심 쟁점이 있다.<br>이번 합의문과 연계하여 검토 중인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직접 보완수사권'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 조항의 존치는 개혁 전체를 무력화할 잠재적 폭탄이다. 보완수사권이 '요구권(Request)'이 아닌 '직접 행사권(Action)'으로 남는다면, 기존의 거대한 수사 조직과 인력은 '보완'이라는 명분 아래 그대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이름만 공소청일 뿐, 내부에는 여전히 수백 명의 수사관과 정보 부서가 상주하며 언제든 캐비넷의 먼지를 털어낼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br>보완수사권은 '캐비넷'을 여는 유일한 마스터키다. 검사가 직접 보완수사를 할 수 있다는 예외가 인정되는 순간, 송치된 사건과는 무관한 별건 수사의 문이 열린다. "공소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한마디면 검찰은 다시 현장으로 나갈 명분을 얻는다. 이는 결국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겠다는 대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며, 검찰을 다시금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세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br>한국검찰의 구조적 후진성<br>한국 검찰의 후진성은 권한 규모가 아니라 남용을 막지 못한 구조적 결함에 있다.<br>독일 검찰은 직접수사권과 경찰 지휘권을 가지지만, 국가수사위원회의 엄격한 감독과 철저한 영장주의로 정치적 중립을 강제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이는 한국의 기소편의주의와 상급자 지휘 남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br>영국은 검찰의 수사권을 대폭 제한하고 경찰이 주도적으로 수사를 맡도록 하며, 기소 전문기구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설계해 검사들의 정치적 개입을 최소화했다. 반면 한국은 검사 1인 책임제 하에서 수사부터 공판까지 독점하며 통제 장치가 부재하다.<br>일본 역시 특수부서를 통해 정치·경제 범죄를 직접 수사하지만, 내부 감사 체계를 강화하고 장기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운영 방식을 택했다. 한국은 정권 교체 시 정치 보복 수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불안정성을 반복해왔다.<br>이처럼 선진국들은 견제와 균형 장치를 마련해 권력남용을 방지한다. 한국 개혁이 나아갈 길은 권한 회수와 함께 이러한 국제 표준 통제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다.<br>물론 반론이 있다. 경찰 수사가 부실할 경우 검사가 직접 보완하지 않으면 공소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찰 수사 역량의 문제이지, 검찰에 직접 수사권을 존치시킬 근거가 될 수 없다. 부실 수사의 해법은 경찰 역량 강화와 국가수사위원회 감독으로 풀어야 한다. 경찰권력 비대화의 문제는 행정부의 힘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다.<br>예외를 허용하면 예외가 원칙이 되는 것은 법 집행 역사가 수없이 증명해온 사실이다. 요구권+기한제+불이행 제재를 명문화하고, 보완 범위를 본건만으로 제한하라.<br>진정한 검찰개혁은 검사의 손에서 직접 수사라는 '도구'를 완전히 회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족한 수사는 경찰에 다시 하라고 요구하는 '요구권'으로 한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대해진 검찰 조직이 슬림화되고, 비로소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적 원리가 사법 체계에 뿌리내릴 수 있다.<br>정치권은 '공소청'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검찰 조직의 생존 퇴로를 열어주는 기만적 합의를 멈춰야 한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에서 '직접 보완수사'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요구권'으로 명문화하지 않는 한, 어제의 합의는 개혁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를 위한 '세련된 분식회계'에 불과할 뿐이다.<br>국민이 요구한 것은 간판 교체가 아니라, 성역 없는 권력의 해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br><br><br>]]></description>
			<author>이원영</author>
			<pubDate>Fri, 20 Mar 2026 15:09: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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