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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봉헌이 미사 봉헌에 앞서야
  • 이기우
  • 등록 2023-01-18 16: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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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목요일(2023.1.19.) : 히브 7,25-8,6; 마르 3,7-12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사제직무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사제직과 신약 및 교회시대의 사제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사제들은 성전에서 양이나 소 같은 동물을 불에 태우는 제사(번제. 燔祭)로 사람들의 죄를 없애주는 일종의 속죄 대행업을 수행한 반면에, 히브리 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 사제직을 재해석하면서 들려주는 신약의 사제직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직무였습니다. 


또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 회개시키고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만, 여기서 오는 한계는 구약의 사제직에 못지않게 뚜렷했으니, 말씀이 거부당하더라도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그 말씀으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회개하도록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촉구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공동체의 질서를 이루어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방도 하고 촉구도 할 수 있는 실행력이 담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공동체를 창조하게 하자면, 그 말씀을 전하는 이의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는 사제직에 합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권위가 우러나올 수 있고, 이 권위가 구심력이 되어 끌어당겨주어야만 사람들을 흐트러뜨리는 이기심과 욕심의 원심력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약의 예언자직은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사제직의 권위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 권위에 바탕한 힘으로 말씀을 선포하여 공동체를 이룩하는 직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봉헌을 본질적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서 이 본질을 표현하는 기능적 직무가 미사 거행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사제들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이 성직주의 행태인데, 이는 자신의 삶을 봉헌하기를 미룬 채로 미사 거행을 자신들의 특권으로 간주하는 교회판 관료주의 행태입니다. 


하지만 미사를 봉헌하는 기능으로만 교회의 사제직을 이해하게 되면, 구약의 사제직이 자신들의 삶을 봉헌함은 없이 속죄대행업에 종사하기만 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본질은 기능에 앞서듯이, 삶의 봉헌이 미사 봉헌에 앞서야 합니다.   


그래서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복음을 선포하셨기에 질병을 고쳐주시거나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받을 수 있으셨습니다. 이 능력이 삶을 봉헌하는 사제직 실천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이 치유와 구마의 기적에 대한 소문은 요르단 강 건너편의 이두매아 지역이나 갈릴래아 북쪽 해안의 티로와 시돈 같은 지역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던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들까지도 예수님께 몰려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삶이나 말씀에서 우러나오는 권위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봉헌할 줄 아는 사제직이 필요하고, 그런 사제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권위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선포되는 말씀이라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런 공동체들이 퍼져나가야 비로소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런 권위와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무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보이게 진행되는 것은 말씀으로 사람들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연결되어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말씀은 보이고 들리는 성령이시기에 이 영으로 이룩되는 공동체가 세상에 세워지고 이 공동체의 사도직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이 생기를 얻으면 얻는 만큼, 공동체가 커지면 커지는 만큼, 또 사도직이 꼴을 갖추면 갖추는 만큼, 세상의 죄가 없어지고 이를 조장하던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교회 내 성직주의 행태가 내포한 폐해는 이 구마 역량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명심해야 할 바는 이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며 순결하시고 하늘보다 더 높으신’ 대사제께서 지상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사제직무를 사기지은(四奇之恩)으로 힘껏 도와주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18-19)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요한 14,12)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약속과 장담 말씀을 보증수표로 삼아서 우리가 삶을 봉헌한다면 직무 사제직은 성직주의를 극복할 것이고 평신도들의 보편 사제직에서도 수동적인 자세를 극복하고 놀라운 은총이 일어날 것임을 믿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대사제 예수님을 따라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사제직을 계승하는 데 있습니다. 


이 믿음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도직 활동이 달라질 것은 물론 우리네 인생도 달라질 것입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황된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근거로, 즉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특히 그분의 약속 말씀을 근거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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