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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 [이신부의 세·빛] 단식의 윤리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2-03-03 21:52:57
  • 수정 2022-03-03 21: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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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첫 금요일(2022.3.4.) : 이사 58,1-9; 마태 9,14-16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단식의 의미와 윤리를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던 재의 수요일 미사 복음에서도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윤리에 대해서 들었고, 이 세 가지 행위가 주요한 종교적 성무가 된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단식도 그저 음식을 끊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기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이며, 단식으로 절약된 몫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함이라고 상기시켜 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매우 근본적으로 단식의 이유와 의미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단식 관행에 대하여 이사야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3-5).


이러한 이사야의 비판은 당시 유다교에서 아주 형식적으로 행해지던 단식 관행을 고발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당시의 유다교의 형식주의적 종교질서를 송두리째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이후 5백 년이 흐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형식적인 단식 관행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기준으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비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사야가 전해준 예언의 뜻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귀머거리였던 셈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물론 그분이 바라시는 종교질서를 선보이고 계셨는데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식 여부 그 자체에만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 활동은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본 바를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희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8-9).


교우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의 종교 현실을 바라본다면, 과연 무어라 말할 것 같으십니까? 구체적인 실천이야 믿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다를 것이니 이사야가 비판할 것 같아 보이는 바를 이 강론에서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사야가 촉구할 것 같은 메시지는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하느님과의 관계와 교우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일은 매일의 기도와 주일의 미사차례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한 제사이며, 우리의 실천을 다짐하는 것이 그 예물입니다.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면, 매일의 기도를 거르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기를 바란다면, 주일미사를 의무감에서만 참례해서는 안 될 것이고 하느님께 본격적으로 드리는 제사답게 정성껏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흐름을 파악하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시대의 징표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우들과의 관계를 맺는 일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본당에서든 다른 활동에서든 교우들끼리 맺는 인간관계는 교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신앙감각을 존중하는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흔한 인간관계처럼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나이 등으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는 교우들끼리 맺어 놓은 공동체가 사도직의 지향을 가지고 활동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이익으로 뭉쳐서 관계를 맺지만, 교우들이나 의로운 이들은 선한 지향으로 관계를 맺고 사도직 활동에 임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분열하고 쉽게 해체됩니다. 하지만 이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는 일이 사도직 활동의 생명입니다. 


마치 종이 주인 앞에서 발을 씻겨주듯이 섬기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되, 겸손한 처신으로 완덕의 길을 걸으려 하고, 서로의 뜻이 살아 있는 한 함께 하려는 지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의 세속적인 모임이 그러하듯이 쉽게 갈라서고 쉽게 헤어질 것입니다. 이 구조는 교황청이나 교구청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 현장에서 평신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에서는 더 필요하고 또 그리되기만 한다면 위력적인 선교의 힘이 발휘될 것입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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