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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지 않는 빛, 녹지 않는 소금 - (지성용) "우주의 중심인 줄 착각하는 경우들"
  • 지성용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1-03-05 12:34:02
  • 수정 2021-03-05 1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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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인간의 창조까지 우주 진화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고도의 사고능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인간의 사회가 조직되고,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일구어낸 오늘날의 상황은 예견된 결과였을까? 인간은 일어난 일, 결과를 보며 원인이 무엇이었나를 찾아가는 인과론(因果論)적 설명을 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늘 아래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없다’는 생각과 사변은 인간 본성이다. 


한때 종교는 인간의 삶과 문화 전반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세계와 우주에 대한 모든 해석과 담론을 종교의 권위가 틀어쥐고 있었다. 교육과 음악, 미술, 경제, 정치, 학문과 사람들 관계는 모두 종교의 틀 안에서 이해되고 맺어지고 이루어져 갔다. 과학의 등장으로 종교는 가장 먼저 우주론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종교가 설명하던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우주에 인류가 고안한 탐사선이 올라가고, 우주의 폭발과 팽창을 설명하는 빅뱅이론과 같은 우주 기원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지며 더이상 하늘 위에 하느님의 자리가 있지 않다는 과학적 사유와 인식으로 종교는 서서히 그 힘과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종교가 단순한 관념이나 이념이 아닌 삶의 구체적인 현실, 몇몇 종교는 우리들의 생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대한민국은 2020년부터 지금 2021년 2월까지도 그리스도교 수난의 시대가 진행 중이다. ‘COVID 19’라는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세계의 모든 상황이 변화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영역의 숱한 변화들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세계의 혼란 가운데서 모범적인 방역을 통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1차, 2차, 3차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는 수많은 기독교 종교단체들이 등장했다. 신천지, 전광훈, BTJ열방센터, IM선교회, 부천영생교로 이어지는 대규모 감염확산에 ‘기독교포비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종교에 대한 혐오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며 퍼져나갔다. 이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종교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 


학과 종교는 정말 충돌하는가? 


▲ < Galilée devant le Saint-Office au Vatican >(1847). Joseph-Nicolas Robert-Fleury


천동설과 지동설로 충돌했던 역사가 있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인류는 과학혁명으로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코페르니쿠스가 행했던 인간중심의 지구중심설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중심설로의 전환을 오늘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명한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괴테는 지동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와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는 ‘천상의 혁명’을 주도했고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지상의 혁명’을 시작했다. 혁명은 정치적으로 기존 정권을 갈아엎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아마 그보다 큰 혁명은 기존의 종교와 전통적 사고를 뒤엎는 일이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에 대한 그의 역작 ‘천체의 회전에 관해(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Orb)’(전4권)를 거의 완성했으나 이단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출판하지 못한 채 1520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찰스 다윈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1882년 4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2009년 화제의 책 『종교전쟁: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는 진화생물학자(장대익 서울대 교수)와 종교학자(김윤성 한신대 교수·종교문화학), 신학자(신재식 호남신학대 신학과 교수)가 같이 쓴 책이다. 


“왜 지금 과학과 종교가 문제인가?” “종교의 유통기한은 이제 끝난 것 아닌가?” “과학이 정말 종교의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과학의 오만이 아닌가?” “창조과학이 이렇게 번성하는 것은 어떤 징후인가?” “종교는 미래에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세 저자는 이렇듯 다양한 질문을 주고받는다. 신재식 교수는 “진화라는 사유의 틀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창조’ 대 ‘진화’ 논쟁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과학은 우주의 구조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종교는 우리 삶에서 적절한 윤리적 가치와 영적 의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 안에서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결정적으로 입장이 다르다. 이번 코로나 확산 시기에도 종교는 입에다 소금물을 뿌린다거나, 기도를 통해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대중에게 퍼 날랐다. 결과는 잠잠해질 만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집합 예배와 방역 거부, 역학조사 방해로 2차 3차 범유행을 만드는데 교회가 한몫을 했다는 국민적 냉소를 불러왔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구호가 ‘예수 감염, 불신 방역’이라는 역 구호로 온라인을 도배했다.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신(神)이 영혼을 창조하여 인간에게 불어넣었다는 가톨릭의 믿음과 진화는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천 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기억의 정화’를 모토로, 과거 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했다. 십자군 원정, 종교분열, 나치즘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점 등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 있고 겸손한 행위”이다. 그 행위는 “신비체 안에서 우리를 서로 결합시켜 주는 유대 때문에, 우리가 비록 우리를 앞서간 이들의 과오와 잘못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고 그 심판은 오직 모든 이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근대에 이르러 ‘역사적 판단’과 이성과 합리성이 주도하는 ‘과학적 판단’이 끊임없이 충돌해 왔다.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은 종교인들의 주장이 과학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종교적 믿음이 모두 비과학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 의미와 가치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나무라거나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과학이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M. 엘리아데는 “종교는 직립한 인간이 하늘을 보기 시작하며 생겨났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종교를 자연현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은 인지과학과 진화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 지난 20년간 ‘종교의 자연과학’연구와 저작이 많이 나왔다. 그러면서 종교는 적응의 길을 택해왔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이해의 가능성을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로 제기한 학자다. 인간의 마음은 신과 같은 초월자를 믿도록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동물집단에서 나타나는 서열 행동이 종교와 권위에 순종하는 인간의 행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서열 행동은 각자의 적응적 이득을 높이듯이 인간도 종교적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높였을 것으로 주장한다. 보편적 종교 전례에 등장하는 속죄와 희생의 제사는 지배적 존재자에게 복종하는 행위이며 일종의 지배 위계에 순종하는 것은 개체의 생명 유지, 지속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윌슨의 주장이다. 


데이비드 윌슨(David S. Wilson)은 종교집단이 비종교 집단보다 더 응집적이고 자원을 공유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더 협조적이기 때문에 종교는 개체 수준이 아닌 집단 수준에서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유기체 또는 초유기체에 비유하곤 한다. 심지어 벌이나 개미처럼 무리를 지어 사는 곤충들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 (사진출처=MBC 영상 갈무리)


교회에서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공동체는 우리를 ‘우리’ 안에 들어가게 하는 마법이다. 결속력을 부여하고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배타성을 갖는다. 교인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매우 특수한 상황 안에서 사용한다. 같은 교회(다른 교회나 성당에 다니면 같은 신앙인이어도 공동체는 아니라는 의식이 강하다) 그리고 같은 교회 안에서도 같은 그룹, 소공동체 모임끼리의 친밀함과 결속력은 특이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와 국가를 공동체로 보지 않게 된다. 사회와 국가는 집합된 거대 사회에 불과하고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교인들은 본인이 속한 소위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집중하고, 국가와 사회의 규율과 방역수칙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소공동체 그룹이 주는 달달함에 더 넓은 사회공동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잃어버린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큰 깨우침은 ‘세계는 모두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아프리카 끝까지 도착하는 현상을 바라보며, 세계공동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나도 불안해진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공동체’라는 허울 좋은 단어로 배타적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것은 ‘악’이다. 잘못된 개념은 인간이 사고하는 폭의 경계를 설정하고 경계는 외부에 있는 것들을 배제하고 경계 안의 것들만을 포용하며 때로는 범죄와 윤리적이지 않은 것들마저도 공동체의 이름으로 끌어안고 무너지게 된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종교를 통해 세상과 우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발전시켜왔다. 이 능력은 모든 현상에 인과관계의 추론을 시도해 보는 소위 ‘믿음엔진: Belief Engine’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해결할 수 없는 ‘원인(原因)’, 찾을 수 없는 원인(原因)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과 무능력을 체험하며 부재한 원인을 찾지 못해 ‘믿을만한 스토리텔링’을 고안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를 ‘정신의 바이러스’라고 까지 말한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 이라는 책에서 로봇 피그시의 말을 인용해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우리 세상을 상상해 보라. 그러한 세계는 자살 폭탄 테러범도 없고, 9.11 테러도 없고, 십자군도 없고, 마녀 사냥도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말한다. “무신론자는 위축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무신론자라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무신론을 펼치며 그리스도교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는가? 그가 출판을 결심한 배경에는 기독교 우파진영의 열성적 지지자 미국 대통령 부시의 집권 4년을 경험하면서였다고 한다. 과학이 종교를 공격하는 이유는 종교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고,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치에 기웃거리며 이해관계에 따라 그릇된 결정으로 나아가는 도구로 작용하는 것을 본 양심적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다. 사실 코로나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종교집단들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 유불리에서 자유로운 깨어있는 시민 정신에 의해서였다. 오히려 천주교나 불교 등의 종교계 내부에서는 해당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최근 부천 영생교발 집단감염이 보도되면서 달린 댓글들의 반응이 대략난감하다. “교회에 가두어 놓고 못나오게 해라” “예수님이 부활하면 목사부터 없애버릴 듯” “예수쟁이들이 문제” “예수 자체를 불법으로 지정하자!” “교회가 나라망친다. 지긋지긋”


한국사회 그리스도교의 성적표다. 교회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 교회는 시민사회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광기의 집단으로 매도될 위험에 놓였다. 우리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시민사회 안에서 충분히 토론해야 한다. 중세처럼 세상의 모든 일에 참견하며 이익을 보려는 선교(?)적 자세를 거두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며 공동선을 향한 작은 몸짓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강력한 변화를 주도하며 세계의 중심에서 작용하겠다는 망상은 거두어들여야 한다. 목사나 신부들은 아직도 천동설, 내가 우주의 중심인 줄 착각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신도들은 여전히 목사나 신부를 바라보며 예수를 보듯 한다. 미칠 지경이다. 결국, 이런 믿음체계를 만든 것은, 종교 엘리트와 기득권 세력의 연합으로 공고해진 종교그룹, 거기에 의존하는 이성 없는 신앙으로 광신이 되어버린 소아병적인 신앙인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래도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와 위안을 얻으려는 작은 우주를 만들고 자족하며 우리끼리의 리그를 만들어 놓았다. 교회는 변화해야 한다. 그동안 누리던 특권들을 내려놓고 세계시민들과 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불타 오르는 빛과 녹아버리는 소금”처럼 살아가며 사라져 가야 한다. 그렇게 죽으면 예수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렇게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그렇게 사라져야 참된 시작을 볼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3-4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신부: 인천교구 송림동성당 주임신부, 인하대학교 인문융합치료 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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