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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내 안으로 되 돌아오는 숨을 느껴보자 - (지성용) 바벨탑에서 성령강림까지의 소통
  • 지성용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1-01-18 18:24:22
  • 수정 2021-01-18 18: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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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사람들은 동쪽으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느님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두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기(11장)의 바벨탑 이야기다. 저자는 언어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 상황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들은 키루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한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이며,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이란 뜻이다. 


2020년 ‘코로나19’ 이전까지 세계는 ‘초연결사회’를 지향하며 4차 산업혁명, 네트워크의 혁명을 이야기했다. 초연결(hyper-connected)사회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이며, 이미 우리는 이런 ‘초연결사회’로 진입해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는 모든 사물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사람과 연결되는 사회를 지향했다. 초연결사회는 사물 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을 기반으로 구현되며,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증강 현실(AR)같은 서비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은 바벨탑 시대의 하나의 언어를 이루기 위한 연결을 끊임없이 치열하게 시도하고 있었다. 모두 돈의 힘이었다. ‘돈’, 더 정확하게는 ‘이윤’이라는 자본의 속성이 ‘인간’을 치밀하게 계산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연결과 빅데이터는 상품의 판로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마스크… 내 안으로 되돌아오는 ‘숨’을 느끼며


마스크를 쓰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이전에는 마스크를 쓰면 뭔가 불량해 보이고, ‘뭐를 숨기려고 저럴까?’ ‘어디 아픈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 뉴스 안보나?’ ‘도무지 교양이란 없는 사람이군’이라며 뒤를 돌아 보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만남의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약속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다음 기회로 미룬다. 누군가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가 부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그간 불편했던 관계를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내시고 거기에 ‘숨’(루아흐)을 불어 넣으시어 인간을 창조하신다. ‘숨’은 인간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숨’이라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신약성경에서는 희랍어 ‘프네우마(πνεύμα, Pneuma, Spirit)’로 번역되기도 했다. 숨은 ‘들숨’과 ‘날숨’으로 구성된다. 들숨은 주위 환경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산소 21%, 질소 78%, 이산화탄소 0.03%, 수증기 및 기타 성분이 0.97% 함유되어 있다. 들숨 속에 포함된 21%의 산소는 우리 몸에서 5% 정도 사용되고 날숨으로 16%를 다시 내보낸다. 날숨은 산소 16%, 이산화탄소 4%, 질소 78%, 수증기 및 기타 성분 2%로 구성되어 있다. 호흡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지만 들숨으로 들어온 21%의 산소를 다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5% 만을 사용하고 16%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며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평평하게 고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스크의 등장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상당히 많은 ‘숨’이 세상과 교류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상황에 마주한 것이다. 내 안으로 숨‘in(안으로)+spiriatio(숨)’이 돌아오니, 나는 ‘내(ego)’ 안에서 계속 머물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마주하기 어려웠던 ‘혼자’를 체험한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줄 알았는데 ‘혼자’할 수 있는 것들에 많은 한계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마스크… 가면 쓴 얼굴을 한 번 더 가리면 또 다른 나와 만난다


마스크는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게 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 페르소나는 그리스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다.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라고 말한다.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동안 인간은 이러한 자신이 만든 ‘페르소나’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어 왔지만, 이제 인위적인 ‘페르소나’는 다시 한 번 덧 쓰인 마스크에 의해 차단당한다. 곧 천 개의 가면이 무력해 지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입과 얼굴의 근육 등 소통의 80%가량을 차지한다는 ‘비언어적(non verbal) 요소’들의 상당 부분을 차단당하면서 인간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자신에게 더 진실해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코로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진실을 요구했다. 역학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했던 무수한 ‘거짓말’들이 감염의 동선을 알아내는데 혼란을 주니 신용카드,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해 그가 어디에서 어리로 다녔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추적 기술이 급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의 윤리적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는 차고 넘치는 논쟁과 논란이 있겠지만, 당장에 코로나는 우리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숨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마스크를 쓰면서 우리는 숨이 가빠진다. 들숨과 날숨의 교차가 원만하지 않다. 숨을 아주 많이 감지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과는 멀어진다. 그러니 자연스레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면한다. 내 안에 있는 나와 대화한다. 기억한다. 지나간 시간들과 지금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자연스레 내적 작업이 많아졌다. 일상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불편함은 있었지만, 1년이라는 긴 시간 자연스레 피정(避靜), 피세정념(避世淨念), 세상을 피해 마음을 모으는(정념), 피정을 했던 것이다. 무심히 지나갔던 소중한 많은 것들을 돌아보고, 소중했던 만남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인류는 코로나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며 변화와 적응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령강림의 공명 시대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의 언어는 ‘혼란’해지고 그들의 ‘소통체계(communication system)’는 무너졌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소통의 어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com(함께)+ il munere(우주, 세상), ‘소통’ 한다는 것은 ‘같은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언어가 뒤섞여 혼란해지고 탑이 무너지면서 모두 흩어져 숨어 버린 것이다. 서로 다른 그들 언어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 새로운 약속의 시대에는 그렇게 흩어진 인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놀라운 연결과 소통을 체험하게 된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불길처럼 갈라진 성령이 각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가지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서로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그 언어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언어로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의 말을 알아듣게 된 것일까? 인류 보편의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성 있는 실현이었을까? 저자는 과연 어떠한 상황을 서로 알아듣는 상황으로 묘사한 것일까?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어지는 상황은 사뭇 놀랍다. 사도 바오로의 증언이다.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사도 2, 41-47)


그들은 ‘돈’의 논리와 ‘경제’의 논리에서 탈출, ‘엑소더스(Ex+odos)’하였다. 성령으로 불타오르는 순간 그들은 모두 제 소유를 더 이상 제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누고 서로 사랑하였다. 재산을 팔아서 ‘공동소유’를 이루어 낸 것이다. 새로운 소통의 전제는 ‘돈’을 작동하지 않게, 이윤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게 ‘자본’을 묶어 버리니 놀라운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공명하기 시작했고 놀라운 힘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혁의 진통을 겪고 있다. 아마도 2021년은 여전히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라는 화두와 함께, 4월의 보궐선거 진통과 대통령 집권 후반기 야당의 공세, 부동산 임대업자들과 갭투자자들의 몰락과 반란 등이 예상된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등장으로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가운데서 뜻하지 않은 변수들이 발생할 수 있겠으나, 당장에 미국의 금리 상승은 예측되는 일이고 한국 경제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 같은 예감이 온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개혁을 역행하는 돈놀이로 경제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고, 작동하지 않는 정책들로 어느 정도의 혼란도 예상된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과 선한 영향력을 지닌 많은 양심적인 종교인들과 신앙인들, 문화 예술인들과 작가들, 학자들과 교수들의 선한 영향력이다. 그들은 조금씩 움직인다. 어린시절 학교 운동장의 그네처럼, 조금씩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만만치 않은 힘을 낼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선한 영향력’의 파문이 일어나고, 선한 파동이 주변에 울려 퍼져 사람들은 ‘공명’하게 될 것이다. 1940년 11월 7일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Tacoma Narrows)에 놓인 다리가 ‘어이없는’ 바람에 무너진 일이 있다. 아름다운 항구였던 타코마 항에, 당시만 해도 신공법이었던 현수교(Suspension Bridge)로 건설된 이 다리가 탄생했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격찬했었다. 미국 현대 엔지니어링 기술의 자존심을 건 건축물이었던 만큼, 타코마교는 원래 시속 190km 속도의 초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완공 석 달 만에 ‘산들바람’으로 볼 수 있는 시속 70km 바람에 거대한 철 구조물이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강철이나, 콘크리트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들은 저마다 고유의 흔들림(진동)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그네를 미는 것과 비슷한 특성이 있다. 양쪽 교각에 연결한 케이블에 다리가 매달려 있는 현수교였던 이 다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진동이 생겼는데, 이 진동이 다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진동과 일치해서 다리를 더욱 진동하게 만들었고 결국 파괴되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바람의 세기가 아니라 공명(공진)현상 때문에, 다리가 붕괴한 것이다.


인간과 우주의 진실한 파동, ‘성령의 움직임’


▲ ⓒ 강재선


이 글을 마무리 하고 있는 2020년 12월 초, 7일부터 천주교 사제, 수도자 3951명이 검찰개혁과 개혁입법을 외치며 대검찰청 앞에서 공명을 일으키니, 다음 날 목사님들과 개신교 형제 자매들 4천여 명이 강력한 검찰개혁을 외치며 다시 검찰청 앞으로 몰려갔다. 이어 원불교, 10일 에는 천주교 교우들 7천여 명이 옛 명동 성당 들머리에서 성명서를 읽고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공명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는다. 오래 전부터 세상은 민중들의 공명으로 들썩이며 움직여왔다. 동학혁명이 그러했고, 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87년 민주화항쟁, 2016년 촛불항쟁, 2019년 서초대첩까지 국민들은 끊임없이 공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선한 영향력이었다. 중간 중간 악한 무리들의 파동도 있었다. 신천지, 전광훈, 보수 정치인들과 회색지식인들의 요설 등, 선과 악을 흐리는 무수한 광란의 글쓰기와 물타기가 있었지만 커다란 자연의 힘과 민중의 힘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인간과 우주의 진실한 파동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종교인들은 그것을 성령의 움직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코로나 19시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경제적 풍요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도 알게 되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지구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나는 올해 그린피스 후원을 시작했다. 이제 정말 필요한 일들은 당연히 지구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지구를 잘 보존해야 한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지구 생태게를 잘 가꾸고 살려나가야 한다. 누군가 자연을 파괴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해 주고 지구인들을 각성시키는 일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모두 한 해의 시작에 행복한 일 하나 다짐하고 시작해보자. 살아야 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흘러갈 날들이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자.


걸을 수 있다는 것, 아름다운 지구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여기 참 행복한 일이다. 걸음은 우리를 명상하게 한다. 다시 돌아보고 중심으로 본질로 핵심으로 가게 만들어 준다. 죽는 날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지금 여기의 걸음과 숨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하게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1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송림동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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