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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나감’을 배우자 [글로벌생명학] 5 : 이제는 생명학이다 이기상 2020-08-24 1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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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살리기에 머리를 맞댄 국제 사회


주요 핵무기 보유국과 원전 보유국들이 참여하는 협의체 ‘핵안보 정상회의’가 올해로 발족 10주년을 맞았다. ‘핵안보 정상회의’는 핵물질이 비국가행위자의 손에 들어가 테러에 이용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모임으로 지난 2012년에는 서울에서 열렸다. 당시 53개국 정상과 4개 국제기구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핵테러 방지 대책을 협의한 후, 핵무기로 전환이 용이한 고농축우라늄(HEU)을 최소화하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울 코뮈니케(공동선언문)'를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공동선언문의 약속이 이행될 경우 핵무기 몇 천개 분량의 핵물질을 지구상에서 감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합의의 구속력이 없어 각국의 자발적 이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가상의 테러집단 손에 들어간 핵도 위험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원자력 발전소의 핵도 치명적 살상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다. 핵에너지 개발은 21세기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을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핵폐기물 중에 포함된 ‘플로토늄239’의 반감기는 2만4000년이고, 무해한 물질이 되기까지는 50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핵폐기물 속에 담긴 방사성 폐기물의 유독성을 제거하는 기술은 없다. 따라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안전한 원전 운영을 위한 국제적 기술협력 방안이 이제 지구촌 전체의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이슈로 작용하고 있다. 


원전이 멈추면 경제가 멈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독일은 2022년까지 탈핵을 완료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지구의 살림살이를 함께 논의하는 국제 사회의 연대는 지속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환경학과 생태학 그리고 생명학


▲ 산호초 사이에 낀 플라스틱 봉지 (사진출처=Noel Guevara/Greenpeace)


환경의 문제가 더 이상 인간적인 관점에서 삶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어 인간을 위한 지상낙원을 건설하자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데에 이의를 달 학자들은 없을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며 최고의 고등생물로서의 인간 환경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생물권을 염려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인간의 미래를 위한 확실한 보장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환경오염과 환경파괴의 문제는 생태학적 관심에 의해서 한층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사안이 되고 있다.


생명체의 근본적인 생태환경에 관심을 갖는 생태학에서는 어떤 특수한 생명체의 생활환경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 모든 생명체의 삶의 조건, 더 나아가 생명과 환경의 ‘관계’를 탐구하려고 노력한다. 환경 문제의 지평이 좀 더 넓고 깊어진 것이다. 생태계의 물음이 생물권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생태학의 화두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대두하게 된다.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생명의 미래’를 우려하고, 지속가능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환경학이 생태학으로 수렴되었듯이 이제는 생태학이 생명의 진리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생명의 발생과 기원, 전개와 진화, 역사와 문화, 변화와 변이, 생명의 원리와 구조, 가능조건과 상호연관, 작용과 기능, 정보와 유전, 다양성과 통일성, 지향성과 의식, 마음과 정신, 물리화학적 토대와 생물학적 구조, 사회학적 학습과 조직, 심리학적 반응과 적용기제, 종교적 의례와 초월, 윤리 도덕적 관습과 가치관 등등 생명과 연관된 제반 현상들을 다른 시각이 아닌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그에 부합하게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닌가? 


‘생명’에 관한 서양의 담론들 : 동물학,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


이렇게 중요한 ‘생명’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지금까지 전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최초의 학문적 논의는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자연, 우주로 향해 있었다. 이때 인간은 전체 생명체를 모델로 삼아서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분석적이고, 환원적인 이론들이 발전하면서 살아 있는 자연과 우주는 기계적으로 잘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기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러나 생명을 생명 현상 그 자체로 고찰하고, 그것을 이론으로 정립한 학문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생명과 관련된 학문이나 과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다양한 지칭들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다. 


생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서양 말의 뿌리로는 그리스어인 조에(ζωη, zoe), 비오스(βιος, bios), 프시케(ψυχη, psyche)가 있다. ‘조에’는 운동으로서의 생명력을 강조한 것으로, 생명 자체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비오스’는 생명체라는 의미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개별 생명체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프시케’는 생명을 생명이게끔 하는 원리로서의 생명혼을 지칭한다. 따라서 프시케는 심리보다는 ‘혼’이라는 의미를 더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생명에 관한 학문[생명학]을 전문용어로 만들기 위해 세 단어에 각각 종래의 방식처럼 학문을 뜻하는 ‘-logy[logos]’를 붙이면 이상하게도 ‘생명학’이 나오지 않고 ‘동물학(Zoology)’, ‘생물학(Biology)’, ‘심리학(Psychology)’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역으로 서양에서 생명에 대한 논의가 생명 현상 자체로서 전개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증명이 되는 셈이다. 어쨌든 서양에서는 이렇게 생명이라는 낱말을 엉뚱한 데 다 써버려 정작 생명 자체가 문제 될 때 그것을 지칭할 기반을 잃어 버렸다. 


‘생명학’ 정립이 필요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학자들은 새롭게 생명체와 그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다루기 시작했는데, 이 새로운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 생태학(Ökologie/Ecology)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 말 뿌리인 에코(öko[eco]-)는 그리스어 오이코스(οικος)에서 왔다. 오이코스는 ‘집, 거주, 주거’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져보면 생태학은 생명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생명 방식의 한 형태를 지시할 뿐이다. 즉 인간 삶의 방식,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의 삶의 방식과 터전을 가리킨다. 


그래서 ‘생명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립하여 시대의 추이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생명관과 학문관이 배어 있는 생명학[생명+학문]을 정립해보자는 것이다. ‘생명학의 정립’은 우선 전통적인 한국의 생명사상을 연구하여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생명의 문화를 이론적·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지표로 삼아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생명학’은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한 ‘이론’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 속에 담겨 있는 실천적 지혜를 한 데 모으자는 뜻이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삶의 지혜들을 생명운동의 차원에서 커다란 얼개와 틀로 정리하여, 다시 삶을 위한 지침과 가치로 삼아보겠다는 ‘생명 실천적[살림살이]’ 의도를 담고 있다. 삶과 앎이 분리되지 않고, 이론과 실천이 따로 놀지 않는, 삶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사람이 묻고 배운 지혜들을 지침으로 만들어 다시 삶 속에 되먹임시키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나감’에 대해 묻고 배우자


▲ ⓒ 가톨릭프레스 자료 사진


‘생명학’에서 필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생명’에 대한 논의를 다른 관점이 아닌 생명의 관점과 삶[살아 있음, 살아나감, 살림]의 관점에서 개진해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생명에 대한 ‘과학적’ 논의라는 구실 아래 주로 서양의 논의들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 동서 통합을 이야기하는 마당에서 다른 문화권의 생명에 대한 이해에도 귀를 기울여볼 때가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 내지는 ‘과학’에 대한 이해도 서양의 학문전통이 아닌 동양의 학문전통에서 새롭게 이해해보려 시도해 학문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다. 삶에 되먹임되어 삶과 연결되지 않는 앎이란 죽은 이론으로 남을 뿐이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인의 생명에 대한 이해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우리의 ‘생명’이라는 낱말에는 ‘하늘의 뜻[명령]’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생명(生命)’에는 ‘살라는 하늘의 명령’ 또는 ‘웋일름[천명(天命)]에 따른 몸사름’이라는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둘째, 하늘의 명령으로서의 생명과 그 명령에 따른 개별 생명체의 구체적인 삶은 구별된다. 생명은 생명체와 구별된다. [우주적] 생명과 [개별 생명체의] 삶은 구별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생명학적 차이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셋째, 모든 생명현상에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하늘의 뜻이라는 지향성이 들어있다. 이것을 하늘의 마음이라 부를 수 있고 학문적으로 생명학적 지향성이라 이름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첫째 것의 다른 면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학적 차이와 생명학적 지향성이다.


그 다음으로 동아시아의 학문에 대한 이해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서양에서 ‘학문’ 또는 ‘과학’이라는 말은 라틴어로는 ‘시엔씨아(scientia)’, 독일어로는 ‘비쎈샤프트(Wissenschaft)’다. ‘비쎈(Wissen)’은 앎(지식)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지식(앎)의 체계다. 그런데 우리에게 ‘학문(學問)’은 말 그대로 ‘배워 물음[묻고 배움, 묻기 위해 배움]’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묻고 배움[배우고 물음]으로 보았던 이 점을 우리는 오늘날 되살려야 한다. 묻고 배움의 의미는, 묻고 배워서 ‘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궁신지화(窮神知化)의 길 속에 들어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학문의 길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지식획득이라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뜻을 정성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식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이 속해야 한다. 그런 다음 가족을 돌보고 보살펴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잘 다스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연 자체의 변화를 알고 신의 뜻을 알아내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생명의 문제, 통합적 시선이 대안이다


오늘날 현대 지성인은 어떻게 하면 전수받은 전통과 문화로부터 생명에 대한 논의를 풍부하게 이끌어내고 활성화시켜서 지구촌 시대에 하나뿐인 지구 생명을 살려나갈 것인지에 뜻과 지혜를 모아 동서 통합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현대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에서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 생명의 미래를 위한 생명담론이 펼쳐져야 한다. 우리는 현대적 문제의식과 미래 지향적 시각에서 과거의 문화유산을 오늘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철학을 논의하는 데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그 논의가 문헌학적인 해석에서 끝나버린다는 데 있다. 이제는 그러한 해석들이 오늘날의 문제의식과 맞물려야 한다. 우리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해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 번 물어보아야 한다. 우선 오늘날 세계가 처한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분명히 하자. 그리고 과거의 우리 문화유산을 되돌아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구적 생명문제를 다함께 슬기롭게 풀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생명과 관련된 인류의 모든 문화자산을 탐구하여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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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제는 생명학이다>, 『경향잡지』2012년 5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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